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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리시 휘장
  • 휘장

    원안의 "ㄱ", "ㄹ"은 구리시의 구리를, 중앙의 원은 시민의 화합과 단결을, 녹색은 쾌적하고 살기 좋은 전원도시를 의미하며 붉은색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고 희망찬 꿈의 미래도시를, 8개의 선은 수송과 교통체계의 거점 도시임을뜻한다.

  • 구리시 시화 : 철쭉
  • 시화 : 철쭉

    우리나라 전역에 자라는 낙엽 관목으로 줄기나 가지는 회백색이고, 잎은 알 모양이며 뒷면은 연둣빛 털이 나 있다. 꽃은 연분홍색으로 5월에 피는데 잎과 동시에 피고 세 송이에서여섯 송이가 가지 끝에 달린다. 꽃부리의 내부는 자갈색이고 반점이 있으며 종 모양으로 생겼다. 꽃받침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고 수술은 10개며 암술은 1개인데 수술보다 길고 털이 있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온 산하를 분홍빛으로 물들인 듯 장관을 이루는 철쭉꽃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더욱 청아하고 순수하다. 1986년 4월 4일 구리시민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시의 꽃으로 지정하였다.

  • 구리시 시목 : 은행나무
  • 시목 :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뒹굴때 면 사람들은 가을을 느낀다. 가로수나 공원수로 많이 쓰여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익숙한 나무로 열매의 겉모양과 색깔이 살구와 닮았다 하여 은행이라 부른다. 구리시에도 1천 2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수세가 곧고 뿌리가 깊어 꿋꿋하고 변함없이 발돋움하는 구리시민의 기상을 상징한다고 하여 1986년 4월 4일 구리시 시목으로 지정되었다.

  • 구리시 시조 : 비둘기
  • 시조 : 비둘기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 남극을 제외한 세계 각국에 약 300여 종이 분포하여 사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양비둘기이다. 양비둘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로 암컷과 수컷 모두 머리 뺨, 턱 밑이 진한 회색이다. 어깨 사이와 등은 회색이며 허리는 흰색이다. 날개에는 폭넓은 검은색의 줄이 2개 있다. 부리는 검은색이며 다리는 붉은 산호색이다. 비둘기의 왕성한 번식력은 날로 발전하는 시세를 상징하고 있으며 평화를 추구하는 구리시민의 소망을 담고 있다 하여 1986년 4월 4일 시조로 지정되었다.

  • 구리시 마스코트 : 아리미
  • 마스코트 : 아리미

    미래를 지향하는 창의적이고 꿈과 희망이 있는 친환경 도시 캐릭터이다. 문화유적이 살아 숨 쉬는 친환경의 아차산과 함께 친환경적 벨트를 이루고 있는 한강-왕숙천의 청정함과 더불어 다채롭고 풍요로운 축제를 머리와 모자에 사통팔달 교통과 유통의 중심도시임을 자유로운 발로 표현하였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바람직한 미래생태 도시를 구현하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스러운 도시로 만들어가는 행복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밝고 희망찬 꿈의 도시, 시민행복특별시
구리입니다.

구리시 정보 도시배경

구리시 연혁

1914.03.01양주군 구리면 신설

1973.07.01양주군 구리읍 승격

1980.04.01남양주군 구리읍으로 관활 변경

1986.01.01구리시 승격

구리시 로고

인구 및 가구수
2021년 2월 28일 현재

인구수 세대수
196,685명 (남 97,601명, 여 99,804명) 81,571세대

면적
33.33㎢ (경기도의 0.33%)

개발제한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문화재 보호구역
20.002㎢ (60.08%) 9.64㎢ (28.95%) 2.29㎢ (6.9%)

행정구역

8동,312통, 1,877반

기구

본청 직속 사업소
3 담당관, 4국 1단(23과),
1 의회
보건소
(2과 2지소)
환경관리사업소(5과),
시립도서관
8개 동

삼한 시대

삼한사회는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삼한 사회는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구리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 마한의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마한은 54개의 국(國)을 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고리국(古離國)을 양주·풍양 일대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이러한 위치추정은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 즉위년(286년) 조에 “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을 고쳐쌓고 방비하게 하였다”는내용이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이 시기에는 한강 하류 지역이 백제의 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371년 지금의 예성강인 패하와 평양성에서 백제와 고구려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구리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이 적어도 371년까지는 백제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396년(광개토왕 6) 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감행하여 백제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을 점령하였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그때 고구려가 점령한 성들의 명칭이 나오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단성'이다. 이 아단성을 지금의 아차산으로 비정 하는 데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당시 백제의 도읍인 한성(오늘날의 경기도 광주)까지 육박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구리 지역과 한강 유역은 고구려 국경 남단에 자리 잡게 되었다. 475년(장수왕 63)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백제를 공격하였다. 장수왕은 이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아차산에서 죽이는 한편 계속 남진하여 한강 이남의 넓은 지역을 고구려 판도에 넣었다. 이때 구리지역은 북한산군(北漢山郡 : 지금의 서울지역) 관내인 골의노현(骨依奴懸 :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과 진건 일대)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 한동안 한강 하류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는데, 551년(성왕 29)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이를 차지함으로써 한강 하류 지역은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553년(진흥왕 14)에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은 또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북한산군 지역(지금의 서울지역)에서 한양군을 설치하고 현재 남양주시 진접ㆍ진건지역을 골의노현에서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황양은 한양군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구리지역도 이곳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 시대

898년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현 구리지역은 양주 또는 남경 담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양주의 변화를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 한양군이었던 지금의 서울 지역은 고려 초기 양주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 뒤 983년(성종 2) 12목 지방 제도를 만들 때 양주목(牧)이 되었다. 995년(성종14) 다시 지방 제도의 개편하여 10도제와 12절도사제로 개편될 때, 이때 양주는 관내도(경기, 황해도지역)에 속했다. 이때 고려 조정은 양주를 좌신책군(左神策軍), 해주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여 좌우 2보(輔)로 삼았다. 1012년(현종 3)에는 2보와 12정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나 1018년(현종 9) 양주는 다시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된다. 그 후 1067년(문종 21)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었다가 곧이어 격하되고 숙종 때 다시 남경으로 승격된다. 이때 구리지역도 남경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후 1308년(충렬왕 34)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현재의 구리지역에 대한 더 자세한 연혁은 아직까지알 수 없다.

조선 시대

1394년(태조 3)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양부에 도읍이 들어서면서 한성부라 개칭하고 양주의 치소를 아차산 남쪽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추정)로 옮겼다. 1394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95년(태조 4)양주부로 승격되었다. 1397년(태조 6)양주의 치소를 고주내(지금의 양주시 고읍동)로 옮겼다. 1410년(태종 10)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양주도호부로 강등되었다. 1466년(세조 12) 다시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양주목을 폐지하고 왕의 사냥터를 만들었다. 1506년(중종 1)또다시 양주목으로 복구되고 치소를 불곡산 남쪽 (지금의 양주시유양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유양동은 양주의 관아가 있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여기에서 지금의 구리지역까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40~60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구지'라는 명칭이 1530년(중종 25)에 만들어진「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주목 구지(龜旨)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부군제 실시에 따라 한성부 양주군에 소속되었고, 1896년에는 13도가 설치되면서 경기도 양주군에 소속되었다. 1912년 발간된 「구한국지방 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일제에 강제 합병되기 전 양주군에 편제되어 있던 32개 면이 나와 있다. 그리고 각 면에 속한 마을도 나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구지면은 사노리(四老里), 인장리(仁章里), 수택리(水澤里), 백교리(白橋里), 토막리(土幕里), 동창리(東倉里), 이문리(里門里), 평촌리(坪村里), 아차동(峨嵯洞), 우미천리(牛尾川里) 등 10개 마을이 있었다. 이러한 10개 마을은 조선 중기 이래 구지면을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인마을이었을 것이다.

일본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후 1914년에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현 명칭인‘구리(九里)’는 이때 생겨났다. 즉, 이때의 행정구역 통폐합 시구지면의 10개 리(사노리, 인장리, 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와 망우리면의 15개 리(묵동리, 신현리, 능후동, 방축리, 직곡리, 봉황동, 내동리, 능내동, 양원리, 입암리, 봉현리, 상리, 중리, 하리, 능곡리) 그리고 노원면의 장기리와 갈매동, 미음면의 수변리와 석도리 각 일부, 진관면의 배양동 일부, 별비면의 퇴계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개편된 구리면에는묵동리(墨洞里), 중하리(中下里), 상봉리(上鳳里), 신내리(新內里), 망우리(忘憂里), 인창리(仁倉里), 사노리(四老里), 교문리(橋門里), 수택리(水澤里), 토평리(土坪里), 아천리(峨川里), 갈매리(葛梅里) 등 12개 마을이 편제되었으며, 면사무소는 교문리에 두었다.

대한민국

일본강점기에 만들어진 구리면의 행정편제는별다른 변화 없이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교문리에 있던 면사무소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어 1952년 4월 이후부터는 망우리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그 후 1955년 8월 10일에 구리면사무소가 인창동의 옛 구리시청 자리에 신축되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구리면의 행정편제는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하여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 등 5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양주군 구리면에는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 등 7개 리만 남았는데 이로써 구리면은 그 지역적 범위가 일제에 의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행 이전의‘구지면’ 정도로 축소되었다.구리면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군 편제에서는 그대로 양주군에 속해 있다가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69호에 의하여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구리읍은 해마다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을 거듭하여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해 남양주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었다.

위치와 면적

서쪽으로는 아차산을 경계로 서울시 노원/중랑/광진구와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왕숙천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마주 보고 있고, 북쪽 역시 남양주시와 접해 있다. 남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그 너머에 서울시 강동구가 있고 양옆으로 서울시 송파구와 하남시가 있다.

경·위도상의 위치를 보면 우선 남북으로는 북위 37˚ 33′ 10″에서 37˚ 39′ 50″에 걸쳐 있고, 동서로는 동경 127˚ 06′ 05″에서 127˚ 10′ 25″에 이르고 있다. 총면적은 33.3㎢이다.이 같은 면적을 갖게 된 것은 1995년 12월 이후의 일이다. 이전의 면적 추이를 보면, 구지면에서 구리면으로 되면서 현 서울지역과 남양주시 일부 지역이 포함된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다시 서울지역이 분리돼 1963년 개편이 면적에서 큰 변화를 보인 시기였다.

구리시 지도

구리시 지도

지형

광주산맥은 태백산맥의 금강산 부근에서 시작하여 서울까지 이어지는 산맥으로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뻗어있다. 광주산맥은 북동부에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으나, 서쪽으로 갈수록 북한산(836m)ㆍ도봉산(710m)ㆍ관악산(629m) 등 낮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고, 한강을 넘어가면 산세는 더욱 낮아진다. 즉, 서울과 서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차산 및 동구릉이 있는 구릉산등 구리시의 산지는 광주산맥 서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산지에 속해 있다.

구리시를 통과하거나 시에 접해 흐르는 주요 하천은 한강과 왕숙천이다. 한강을 제외하고 구리지역을 통해 흐르는 하천은 왕숙천ㆍ교문천 등 중천(中川) 2개, 백교천ㆍ우미천 등 소천(小川) 2개 그리고 13개의 세천(細川)을 포함하여 모두 17개로 총연장은 23㎞이다 구리시를 대표하는 하천인 왕숙천은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신입리에서 발원하여 광주산맥 서 측에 있는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남류하다가 토평동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왕숙천은 풍양천ㆍ왕숙ㆍ왕탄ㆍ왕산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리시에는 1개의 자연호수와 3개의 인공호수가 있었으나, 이 중 인공저수지는 이문안(안골)저수지, 백교저수지만이 남아 있다.

구리시 지형

기온

최근 1997년에서 2007년까지 약 10여 년간의 구리시의 연평균기온은 12.5℃이다. 같은 기간 전국 평균은 13.5℃이며, 경기도 평균은 11.7℃로 전국보다는 약간 낮고 경기지역보다는 높은 편이다. 연중 제일 추운 달은 1월로서 평균 -4.3℃이며, 제일 더운 달은 8월로 30.5℃이다. 즉 연교차가 35℃로 1984~1992년간 연교차보다 5℃ 정도 증가하였다.

강수량

구리지역은 경기도 북동부에 위치한 데다가 한강 중상류지역의 지형성 강우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경기도의 평균강수량보다 높은 다우 지역이다. 최근 10년간의 평균강수량도 전국 평균인 1,180mm와 경기도 평균 1,250mm보다 높은 1,426mm이다. 강수량의 계절적인 분포는 최근 10년간 장마철을 포함하여 7ㆍ8ㆍ9월 3개월 동안의 강수량이 전체의 약 60%로 넘게 나타나 비가 오는 집중도의 차이가 월별로 상당히 큰 편이다. 지난 10년 동안과 다르게 2007년부터는 9월 장마가 나타나고 길어지는 현상을 보이며,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가을장마의 빈도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연중날씨

구리시에서 한 달 중 맑은 날을 볼 수 있는 날은 평균 약 17여 일 정도이다. 물론 이는 평균치로서 여름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달은 이 평균 일수에 미치지 못한다.

태극기

태극기에 담긴 뜻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태극기의 내력

세계 각국이 국기(國旗)를 제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국가가 발전하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인식 때 게양된 국기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최근 발굴된 자료인 미국 해군부 항해국이 제작한 ‘해상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실려 있는 이른바 ‘Ensign(선박의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 기가 조인식 때 사용된 태극기(太極旗)의 원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1882년 9월 박영효(朴泳孝)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 겸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으로 가던 중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를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그달 25일부터 사용하였다. 10월 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고종은 다음 해인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국기를 정식으로 공포할 당시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42년 6월 29일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국기통일양식」 (國旗統一樣式)을 제정·공포하였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 (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하여 그해 10월 15일에 오늘날의 「국기 제작법」을 확정·발표하였고,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이 제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해 온 것은 태극기가 지닌 이러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