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동 도당 굿이란
구리 갈매동 도당굿은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에서 삼월 삼짇날 무렵에 행하는 마을굿으로 격년으로 지내는 갈매 마을의 마을굿이다. '갈매동 산치성 도당굿'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내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굿으로 알려져서 경기도 무형국가유산 제15호[1995년 8월 10일 지정]로 지정되었다. 도당굿은 음력 2월 한 달간 준비를 해서 3월 초순에 지낸다. 1995년 국가유산 지정 당시 '갈매동 도당굿 보존회'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1998년 9월 11일 조순자(趙順子)와 허용업(許龍業)이 각각 무녀 당주(巫女 堂主)와 잽이 당주로서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갈매동 도당 굿의 연원 및 변천
구리 갈매동 도당굿은 관련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역사를 알긴 어렵지만 다행스럽게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도당굿 관련 문서와 당집의 상량문(上樑文)이 자료로 남아 있다. 도당굿 제의 관련 문서는 현재 「무진 삼월 초오일 산치성 절차」와 「단기 4193년 3월 치성 축문기입 산치성 절차」 두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 전자의 연대는 1928년으로 추정되며, 후자의 연대는 1960년이다. 당집 상량문은 '용 소화 십년 을해 시월 이십오일 입주 상량 귀(龍 昭和拾年乙亥拾月二十五日 立柱 上樑 龜)'로 되어 있어서 1935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만 본다면 구리 갈매동 도당굿의 역사는 1920년대 후반 이전으로 끌어 올릴 수 없다. 그러나 대개의 마을 제의가 마을과 같이 시작된 것처럼 갈매동 도당굿 역시 갈매동에 마을이 형성될 때 함께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그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주민들은 갈매동이 동구릉 뒤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도당굿의 역사를 500년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여러 차례 단절된 위기도 있었으나 갈매동 도당굿은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1996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200여 가구가 갈매동 도당굿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2009년 7월에 전수관이 완공되면서부터 도당굿은 갈매동 도당굿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구리 갈매동 도당굿은 마을의 안녕함과 풍요를 비는 마을굿으로, 제당은 마을 뒤편 도당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모시는 신은 검암산 산신인데, 마을 뒤쪽에 당집이 있다.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2칸짜리 목조 기와집으로 붉은색을 칠한 대문이 굿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다. 당집 상량문 기록으로 보아 당집은 1935년에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도당산 중턱에 산신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당집은 없고 나무가 당을 대신한다. 도당집에는 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가 모셔져 있다.
갈매동 도당 굿의 절차
구리 갈매동 도당굿은 2월 초하루에 화주 셋을 뽑고 굿을 치르는 데 필요한 경비를 정한다. 삼화주는 각각 도가, 시주, 화주라고 부르는데, 도가가 중심이 되어 제물 장보기, 손님 대접과 음식 준비, 일꾼들 식사 준비를 담당한다. 삼화주는 도당굿 기간은 물론 그해 1년간 근신한다. 상가 출입이 금지되고 마을을 떠나 멀리 다니지도 못하다. 삼화주와 함께 당주와 숙수도 1년간 근신한다. 음력 2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 도당굿을 전담하는 무당이 마을로 찾아와 대내림을 통해 삼화주를 뽑는다.
무당과 당주 부부, 숙수 부부, 대잡이, 주님들이 당나무에 모여 오전 10시경에 신을 받아 마을 집집을 다니다가 첫 번째 대내리는 집이 도가, 두 번째 집이 시주, 세 번째 집이 화주가 된다. 도가가 정해지면 도가 집에 모여 회비[경비]를 결정한다. 2월 한달간은 제사 준비를 한다. 주민들은 2월 1일, 11일, 21일에 모여 제사 준비[산일]를 한다. 제장에 난 잡풀과 잡목을 베고 주변을 청소하고, 횃불과 솜방망이 제작, 굿청으로 사용할 비닐하우스 짓기, 제물 준비를 위한 양수기 설치, 당집에 보관하는 그릇 닦기 등이 주된 업무이다.
양수기의 설치는 도당굿의 모든 제물을 굿청에서 직접 요리하므로 여기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산일을 할 때마다 도가 집에서는 화주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꾼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산일을 하는 일꾼들도 한 달간은 금기를 하는데,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고 나물과 김, 두부, 북어만을 먹을 수 있다. 3월 초하루 새벽 4시가 되면 도당굿을 지낼 날짜를 잡고 본격적인 준비를 한다.
날짜는 주로 초하루부터 초사흘 사이에 잡히는 게 일반적인데, 2000년에는 초이튿로 날을 잡았다. 날을 정하면 숙수와 도가는 장보기를 한다. 제수는 소머리와 족(足) 둘, 닭 세 마리[수탉], 과일, 도라지, 더덕, 미나리, 후추, 꿀, 배, 대추, 밤, 산자 등이다. 제수품은 모두 굿청으로 옮겨 요리한다. 일꾼들과 무당들이 밥을 먹을 때만 도가 집에 모일 뿐 고기를 삶고 떡을 하고 부침개를 굽는 등 도당굿과 관련한 모든 일이 굿청에서 이루어진다.
3월 초하루 무당도 마을에 도착한다. 도당굿은 주민들이 제관이 되어 지내는 산신제와 무당이 주관하는 도당굿으로 구별되는데, 주민들이 주관해서 산제를 지내면 무당이 나서서 굿판을 연다. 산신제는 밤 10시경에 지낸다. 산제가 시작되면 모든 참관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갈매동 도당굿을 보기 위해 외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산신제를 볼 수 있으나 제를 지낼 때는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다. 횃불로 주위를 밝히고 창호지를 작게 잘라 입에 물고 제물을 진설하고 산신제를 지낸다. 제물을 차릴 때도 서로 손짓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뿐이다. 진설이 끝나면 화주 가운데 한 명이 제관이 되어 산제를 지낸다. 축문을 읽고 마지막으로 소지를 올리면 산신제는 끝이 난다.
음복은 제사를 지낸 굿청에서 주민들과 함께 한다. 과거에는 제물을 집집으로 똑같이 나눠 보냈다. 음복을 끝으로 산제가 모두 끝나면 무당이 앞서고 횃불을 든 주민들이 뒤를 따라 서낭 맞이를 한다. 서낭 맞이는 신내동과 갈매동의 경계 지점인 '새오개 고개'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굿청으로 모시고 와서 마을 당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좌정시킨다. 도당굿에서 모시는 신이 모두 넷이지만 새오개 고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차적인 신이고 마을 당집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신이다. 서낭 맞이로 신을 굿청에 모셔두고 무당은 마을에 있는 집집을 다니며 유가(遊街)를 돈다. 각 집에서는 술이나 떡을 준비하고 쌀이나 돈을 무당에게 제공한다. 유가를 돈 뒤 굿청에서 본 굿을 시작한다. 굿이 진행되면서 거리가 바뀔 때마다 굿상을 계속 바꾸게 되므로 떡시루 등 모든 제물이 매번 교체된다. 굿상에는 떡과 고기, 후추와 꿀을 한 접시씩 담아 올린다. 조라(술)는 정종이다.
유가가 끝이 나면 다음날 본 굿이 시작된다. 본 굿은 마을에 설치된 굿당에서 진행되는데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온다. 본 굿은 무당이 주도한다. 굿은 초부정-가망청배-조상 거리-신할머니-별상-대감놀이-제석거리-호구거리- 바라-계면떡-군웅 거리-걸립-당굿-뒷전 순으로 진행된다.
축문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조선 경기 우도 남면 노원 갈매동
거민 삼화주 모씨든 감소고우
금암산 산신지령복이 위증사악 영진일방
권이위복 도제중생 유아하민 감불경황
간세용형 서갈미성 지신지령 양여재
개몽음사 갱미O우 백실영지 만륙래구
뇌이강녕 노소득락 안차세풍 호O비옥
육축번식 우마줄장 질고지앙 영위소제
O연길진 근공박구 복유 존신 서흠격사
상향
부대 행사란?
구리 갈매동 도당굿의 제의가 끝나면 모두 모여 음복을 한다.
그리고 도가 집에 모여 제의 과정에 사용된 경비를 결산하는 회의를 진행한다.
현황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갈매동 도당굿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다만 예전에 비해 전승력이나 신앙적 측면이 약화되었다.
대잡이를 앞세우고 만신과 산이 일행이 집집마다 축원하던 유가 행사가 예전에 비해 축소되었다. 예전에는 며칠을 꼬박 돌아다닐 정도로 행사 규모가 컸는데 근래에는 하루 정도에 그친다.
참고문헌
『갈매동 도당굿』(갈매동 도당굿 학술 종합 조사단, 경기도 구리시,1996)
『경기 민속지』-2 신앙 편(경기도 박물관,1999)
『경기도 세시 풍속』(국립 문화재 연구소, 2001)
『한국 세시 풍속 사전』(국립 민속 박물관, 2007)
『한국 민속 신앙 사전』-무속 신앙 편(국립 민속 박물관, 2010)
지식연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구리 갈매동 도당굿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집필자서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