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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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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우미내마을은 지도상으로는 아천동으로 되어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교문 1동으로 되어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4년에 양주군 구지면 지역을 구지면의 이문동과 배교리 전부, 인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교문리라 하고, 아차울과 우미천리 전부, 토막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아천리라는 지명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4월 1일 법률 제3169호로 양주군 구리읍이 남양주군 구리읍으로 분리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교문리가 구리시 교문동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3일 구리시 교문동이 지금의 교문1동과 교문2동으로 분리되었다. 법정동으로는 교문동이고, 교문2동은 행정동이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에서 구리시 승격에 따라 아천리와 교문리가 합쳐져 행정동 교문동이 되었으나, 1995년 3월 13일 교문동 일부와 아천동 전 지역이 교문1동으로, 그 외의 지역은 교문2동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우미내마을의 입구에서 마을의 명칭 기원을 알 수 있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그 비석에는 “우미내마을은 마을 주위의 산이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소나무가 잘 자라고 베어내도 움이 잘 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또한 우미내 계곡이 소의 꼬리처럼 가느다란 모양을 하고 있어 한편 우미천(牛尾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2년에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우미천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라고 쓰여 있다. 우미내에는 지금까지 마을에서 모시는 공동체 신앙으로서 <서낭당>이 존재하고 있으며, 여기에 <장자못>설화까지 결부되어 있어 전형적인 서낭신앙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 제명

서낭제

2) 당명 및 형태

서낭당이라 하며, 우미내마을 입구에서 검문소를 바로 지나 구리시에서 워커힐 쪽으로 가는 비냥고개(혹은 서낭고개라고도 부른다)를 넘어가는 도로 오른쪽 녹지에 조그만 당집이 있다. 서낭당 위로는 금줄이 처져 있고 금줄 사이사이에는 지전(紙錢)이 꽂혀 있다. 당집 위 부분에는 적색 · 백색 · 녹색 · 황색 깃발이 꽂혀 있는데, 황색 깃발은 깃대가 꺾여 있었다. 검정색 깃발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깃발 색깔로 보아 오방색(五方色) 깃발을 모두 갖추어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격 및 신체

상반신만 있는 여자의 흉상(胸像)으로, 본래 있던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에 의하여 한강에 버려졌으며, 현재의 것은 10여 년 전에 새로 만들어 모신 것이다. 현재 당집을 짓고 그 안에 석상을 모셔 두었다. 여자의 흉상은 이곳에 있는 장자못의 설화에 나오는 부자집 며느리의 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4) 제일

마을 ‘대동고사’는 매년 음력 10월 초사흘 안에 벌어진다. 혹 마을에서 초상이 나거나 부정이 생길 경우에는 한 달을 연기해서 음력 11월에 한다. 날짜를 정하는 것은 음력 섣달 그믐께쯤 일책 잡아둔다.

5) 제주

제일 5일 전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주(祭主)를 정하고, 제주를 중심으로 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도와주면서 대동고사를 드린다. 지금은 보통 마을 통장이 제주를 겸하고 있다. 보통 대동고사는 마을 토박이들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는데, 제주를 비롯하여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한사람만은 참여가 허가되지 않는다. 일단 제주로 선정되면 개고기를 먹지 않으며, 상갓집에 도가지 않는다. 제일 전에 출산이 예정된 여자는 마을밖에 나가서 출산을 해야 한다. 현재에는 대동고사의 전통이 많이 약화되었으나, 금기만은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다.

6) 제비

각자 정성껏 낸다. 적게는 5,000원에서 10,000원 정도를 내며, 외지인들도 참여하고 있으나, 동네에 살더라도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일체 참여하지 않는다.

7) 제차

옛 장영자 별장 앞 오른쪽 산비탈에 있는 도당나무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서낭당으로 옮겨서 서낭제가 치러진다. 축(祝)은 따로 읽지 않고, 먼저 대동 소지를 올리고 그 다음에 집집마다 개인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보통 제주 집에 모여서 올렸던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일에 대하여 논의를 한다.
이때 제주를 비롯하여 서낭제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부정한사람은 스스로 불참한다.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우미내마을 입구에서 검문소를 바로 지나 구리시에서 워커힐 쪽으로 가는 도로 오른쪽 녹지에 조그만 당집이 있다. 이 고개는 예전부터 ‘비냥고개’ 혹은 ‘서낭고개’라 불렀다. 서낭당 위로는 금줄이 처져 있고 금줄 사이사이에는 지전(紙錢)이 꽂혀 있다. 당집 위 부분에는 적색 · 백색 · 녹색 · 황색 깃발이 꽂혀 있는데, 황색 깃발은 깃대가 꺾여 있었다. 검정색 깃발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깃발 색깔로 보아 오방색(五方色) 깃발을 모두 갖추어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낭당은 우미내마을에서 모셔지는 서낭님을 모셔놓은 곳이다. 마을 노인회장인 이종서씨는 이 서낭당에 모셔지는 서낭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종서 : 이 서낭당이 지금 이제 저희 동네 수호신이시자 서낭님이신데, 그게 연도는 말이예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생각할 때 거의 고구려 말엽이 아니겠냐 이런 생각이 갑니다. 우리 선대 선대 때부터 쪽 이어내려 왔으니까요. 그저 추정으로 그렇게 생각이 갑니다. 그런데 육이오 당시에는 말이에요, 이 동네 피난을 대략 서울 분들이 이 동네 많이 와 계셨어요. 그런데 그 때 관료 출신들이 대략 이리 피난을 오셨었어요. 뭐 순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그래가지고 그 분들이 여기서 9 · 28 수복 이후에 아주 이 동네가 깨끗하고 무사하게 피난을 했다고 해서 그 분들이 해마다 성금을 바치고 했었어요. 이 동네 치성 때문, 그리고 그 단장을 해 드리고, 그 서낭신에 대해서 아주 그 당시만 해드래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이 무속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나 이 분들한테 뭐 물어 보잖아요. 그러면 어느 서낭신한데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데, 다 이 서낭님이래요. 그래 지금도 저렇게 됐는데요. 늘 찾아 오셔서 약주 부어 놓고 정성들이고 과일 같은 거 늘 나가면 있어요.

이렇게 오래되고 영험이 대단하다고 믿어지는 서낭님을 모신 서낭당은, 원래 구리시에서워커힐 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비냥고개 혹은 서낭고개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칠 때면 반드시 돌을 던져 서낭에게 인사드리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게 된 것은 원래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로 도로가 뚫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종서 : 그래서 그 서낭님을 당시에는 참, 원래 위치가 여기가 아닌데…. 요 아래 이렇게 오시다 보면은 참, 고개가 있어요. 고위 산 쪽으로 아주 각을 정교하게 잘 짓고 모셨었습니다.조사자 : 현재 위치보다 더 아래쪽에 모셨었나요?이종서 : 예. 요 광장동 쪽으로. 그러니까 광장동이 아니지, 내려가는 길 쪽으로, 구리시인데. 그래서 참. 동네에서 매년 음력 초삼일 안으로 날을 잡아가지고요, 인제 그 동네에서 제주를 정합니다. 매년.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해서 동네에서 쌀도 내고 돈도 내시고 해서, 그 제수 용품이라든지 이런 것을 차려서 매년 그 무병장수를 빌고 동네 발전을 빌었었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육이오 사변 이후에 도로 내는 관계로다가 그게 싹 없어졌었습니다. 원래 있던 자리가 길로 들어가고.

이 서낭당에 모셔진 서낭신에게는 인근의 장자못과 연관된 유래담이 전한다. 이 유래담은구리시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이야기이다. 제보자 이종서 씨가 말하는 서낭신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종서 : 그 서낭신의 유래를 잘 아시겠습니다만은, 옛날 아주 부잣집 며느님이래요. 그래 요 위에 가시면 장자못이라고 있는데, 그 장자못이 옛날에 아주 부자 장자가 살았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분이 잘 사니까 하늘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잘 살피고 오너라 해서, 그 성인이 한분 마음을 살피러 내려왔대요. 그래서 스님이 되어서 바랑을 지고 그 집에 가서 동냥을 하는 거죠. 그랬더니 주인어른이 마음이 나빴으니까 그러겠죠. 중이 오니까 소 외양간으로 데리고 가 가지고. 소똥을 한 삽 파서 바랑에다 넣어 줬다. 그래서 인제 그 분은 마음을 살피러 왔으니까 ‘아하 이 사람이 장자로 살지만 참 마음이 이렇게 나쁘구나’ 이런 생각을 했겠죠. 그러고 그 분이 여기 이만큼 오셨대요. 여기 이만큼. 이 동네로 오셔서 고기가 원래 이만큼 비탈이예요. 그래 내려오시다가, 이렇게 강에 내려가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그게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하나의 전설이니까 그렇겠습니다만은 그 며느리가 여기 그 우물로 쌀을 씻으러 왔대요. 아침을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그래서 그 성인이 ‘이 집 남의 식군데, 이 사람 마음은 어떤지 한번 봐야 되겠다’하고 내려가서, 쌀 씻는데 내려가서 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죠. ‘내가 집에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그런데 며느님이 ‘그러시냐’고 그러고 그 바랑을 보니까 그 소똥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빨아서, 그 강 연안이니까. 자기가 쌀 씻은 것을 정성껏 공양을 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남의 집, 이 분은 그 남의 집사람인데 마음이 착하고 갸륵하구나’ 이렇게 해서 데리고 ‘나를 따라 가자’고. 그래서 그 분을 우물에서 데리고 나와서 동행을 하는 거죠. 그래 인제 지금 고기쯤 가면 ‘절대로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어떤 일이 있드래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그러셨대요. 그런데 인제 별안간에 번개를 허고 천둥을 치고 소나기가 내리 쏟아지는데. 자기 시어머니가 불르는 거예요. 얘아가 아가하고. ‘장독간 덮었느냐’고. 그런데 그 스님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마음이 착하니까. 살리기 위해서 돌아보지를 말라고 그랬는데, 하도 그렇게 불르고 난리니까 돌아봤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거기 목이 떨어졌어요. 목이. 그 양반의 목이 떨어졌답니다. 그 목을 거기다 모셨다는 얘깁니다. 그 스님이 그래도 마음이 그렇게 갸륵했으니, 여기 서낭신이 되서 그저 오면 가는 분들한테 얻어 자시라고, 그래서 그 분을 모신 겁니다.

이 유래담에서도 나타났듯이 원래 서낭당에 모셔진 서낭신의 모습은 착한 며느리의 목 위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낭신체의 형상이 지금의 반신조형물(半身造型物)로 변하게 된 까닭에 대해 이종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종서 : 그래 이제 그런데 그분을 우리가 모셨는데. 그리고 해마다 동네 치성을 드리고 있는데, 육이오 전쟁 이후에 길 내고 이러느라고 그분이 목이 이렇게 떨어져서. 원래 그게 세멘으로 되어 있었어요. 그게 인제 돌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게 막 굴러 내려오고 이랬었어요. 그 길바닥까지. 그래서 그 분을 다시 그 공사 현장에다 이야기를 해 가지고 큰 높은 꼭대기다 그 분만 이렇게 모셨죠. 이렇게 잘 만들어 가지고. 그때 해놓았다 하드래도. 거 뭐 길 다리 내고 이런데 그렇게 잘 모셨드니 안 되서, 비가 와서 또 내려 굴르고 이랬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은 다시 모셔다가 지금 있는 위치에다가 조그많게 그렇게 해서 부끄럽습니만은 그렇게 해서 모셨거든요. 전과같이, 원래 같이 라는 것이 옛날 고대로 복원이 되야 하는데, 여러 가지 변형이 되었거든요. 그 머리 부분도 원래 잘 해서 모셔봤더니, 미군 아이들이 아주 큰 유물로 생각하고 지프차로 싣고 그냥 갔대요. 그냥 오며 가며 보다가. 그래가지고 저희가 여기 한 몇 분이 다시 그 돌 맨드는데 다가 얘기를 해 가지고요. 좀 이렇게 아주 가장 아름다운 여인상으로 이렇게 해서 상반신까지 이렇게 다시 모셨습니다. 지금은 그게 정식 복원을 하자면 지금 그 위치에다가 해야 되는데 그 위치에다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절벽이 돼가지고….조사자 : 도로가 나면서 그렇게 된 거죠?이종서 : 예, 도로 나면서.조사자 : 예전에 서낭신의 모습은 머리뿐이었어요이종서 : 요 머리뿐이었어요.조사자 : 아, 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있는 것이었어요?이종서 : 그렇죠. 그래서 도안을 해서 그것을 잘 이렇게 깨끗하게 아주 잘 맨들었어요. 요 목 부분을 보완을 해서.조사자 : 그러다가 미군들이 그것을?이종서 : 미군애들이 갖고 가 버렸죠.조사자 :처음에 머리만 있다가 목까지 있다가 다음에 없어졌다가 지금과 같이 상반신 형태로 된 거네요?이종서 : 예. 예. 아주 착하고 아름다운 며느리 상으로다가, 여인상이죠.

이 서낭당을 중심으로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시월 초에 마을 공동제의인 ‘대동고사’가 벌어진다. 이에 대해서 제보자 이종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종서 : 그래서 참 동네에서는 매년 음력 초삼일 안으로 날을 잡아 가지고요. 인제 그 동네에서 제주를 정합니다. 매년.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해서 동네에서 쌀도 내고 돈도 내시고 해서, 그 제수용품이라든지 이런 것을 차려서 매년 그 무병장수를 빌고 동네 발전을 빌었었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 ‘대동고사’는 매년 음력 10월 초사흘 안에 벌어진다. 혹 마을에서 초상이 나거나 부정이 생길 경우에는 한 달을 연기해서 11월에 한다고 한다. 생기복덕을 보아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주를 정하고, 제주를 중심으로 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도와주면서 대동고사를 드린다. 보통 대동고사는 마을 토박이들 중심으로 치러지고 있는데, 제주를 비롯하여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만은 참여가 허가되지 않는다. 대동고사는 우선 현 서낭당 위쪽에 있는 도당나무에 가서 먼저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송재 : 이 위에 있어요. 이 위에 있는데, 그게 참나무예요. 옛날에 거기 나무가 큰 게 하나 있었어요. 있었는데, 그게 나무가 인제 작년 저거 하면서 없어졌고, 땅 주인들이 없앴고. 인제 해서 임시적으로 참나무에다가 인제 허는 거죠…. 옛날 장영자 별장 그 쪽에 있어요. 참나무들이. 그쪽 저 원두막 식으로 해 놓은 데, 그 쪽에 그 옆에 바로 있는 거예요. 인제 그건 시월 초하루 인제 고사 지낼 때. 대동고사 지낼 적에 거기다가 인줄을 쳐놔요. 미리 가서, 그때 보시면 확실히 알죠.

옛 장영자 별장 앞 오른쪽 산비탈에 있는 도당나무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서낭당으로 옮겨서 서낭제가 치러진다. 축(祝)은 따로 읽지 않고, 먼저 대동 소지를 올리고 그 다음에 집집마다 개인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가 끝나면 보통 제주 집에 모여서 올렸던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일에 대하여 논의를 한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제보를 해주신 모든 분들이 쇠락해진 서낭당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서낭신의 유래를 말하면서 그 전통의 깊음을 계속 강조하였다. 통장 일을 맡고 있는 이송재 씨는 구체적인 진행 상황을 말하면서 새롭게 만들 성황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사를 하면서 만나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마을 공동제의인 대동고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자신들은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 말했다. 조사자가 만나본 제보자들 중에 가장 젊은 이명무 씨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미내 대동고사의 밝은 미래를 말해준다.

이명무 : 저희는 모르지만. 매년 하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대동고사를 지내잖아요. 대동고사를 지내면은 보통 인제 토백이 분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이걸 제사를 지내요. 제사를 지내면 동네 분들한테 십시일반 모아서 이제 지내면서 거기 가서, 고 위에 장영자 별장 앞에 거기서 한번 지내고조사자 : 장영자 별장 그 나무에서 지내는 거죠?이명무 : 그 밑에요. 그 밑에 인제 거기 좀 고목이 있었는데. 거기 인제 공사하면서 없어졌나 보드라고요. 거기 인제 그 절벽 위에, 절벽에 거기 뭐가 좀 있었어요. 인제 거기서 지내고, 그 다음에 당제 거기서 지내고 그렇죠. 그래서 지내면, 다 지내면 동네 분들, 동네 잔치나 마찬가지죠. 다들 오셔 가지고 했는데. 그 내력이 알고 싶으시죠. 그 내력은 근데 인제 그건 동네 노인 회장 그 분이 잘 아세요. 인제 고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에 좀 우리 어릴 때는 인제 번거롭게 해요. 우리도 그런 거 많이 했거든요. 대부분 뭐 옛날에 우리 집에서 다 했으니까. 인제 많이 했어요. 인제나이가 들어서, 자꾸 알게 모르게 인수인계를 받는 거 같드라구요. 특히나 인제 일년에 대동 차례하면은 동네분들 하여튼 천 원이고 걷어서 음식 준비해 가지고제 지내고, 또 와서 동네 사람들하고 하는데, 요새는 인제 좀 그게. 요 동네도 원주민이 줄고 타 지역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인제 고게 인제 좀 약간 괴리가 생기죠. 인제. 고걸 잘 극복하면은 전통도 계승할 만 한 것 같아요. 계승할 만 한 것 같은데, 인제 얼마만큼 다들 생활에 저거 하니까. 생활에 저거 하다 보니까. 인제참여. 참여율이 예전 같진 않죠. 그리고 이게 누구든지 주도적으로 이걸 끌어가야 되요. 끌어서 하여튼 해야 되는데, 인제 이 동네도 예전에는 토백이분들이 많아서, 구심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동네 내 자체도 끌어가는 사람이 인제 좀 힘이 약하고, 그 다음에 전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 다음에 전체적으로 봐도 타향에서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의미가 좀 많이 줄었죠. 근데 헌데 저희가 나이가 좀 들면서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은 이런 거 계속 해야겠다.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어린 때는 귀찮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 이게 그게 아니구나. 이게 정성인데, 차례 지내듯이.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우미내마을의 대동고사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서낭신이 모셔 있는 당집으로 향하였으나 작년 가을과 달리 주변이 생각 외로 수풀들이 많이 자라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집에는 전신상이 아닌 흉신상이 서 있는 이유를 이전의 조사에서 이미 밝혔으나, 다시 한번 그 이유와 서낭신의 연혁, 전설 등을 마을회관에 가서 그곳 분들에게 여쭤 보기로 하였다. 때마침 노인정에서 몇 분들이 계셔 서낭신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김금순 할머니와 대담을 하였다.

조사자 . 서낭당이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던데요?김금순 : 6?25때 인제 폭격 맞아가지고 (다시)시워논거에요.조사자 ' 6?25때, 폭격당하고 그 다음에 만들어진 거군요? 어. 거기에 할머니들 소원 빌러 가고 그러세요?김금순 : 그럼. 지금 넘어도 글로 소원 빌러 가고 그러잖아.조사자 : 위치가 처음부터는 거기가 아니라고 그러던데요?김금순 : 아니, 본래 거기야.조사자 : 본래 거기에요?김금순 : 어, 본래 거기야.조사자 : 좀 아래쪽이라고 하던데? 도로가 나면서 위치를 옮겼다고 들었었는데요?김금순 : 아니, 본래 거기 산 밑에 있어, 육이오 때는 기와집으로 이렇게 조그마나게 해서 했었어요.조사자 : 그때는 크기는 별다른 건 없었겠네요? 어. 안에 인물은 할머니 같지는 않던데요?김금순 : 그건 장자집 며느리야. 장자집 며느리,조사자 : 그럼 장자못하고 연관이?김금순 : 거기 장자못의 연못이 그 며느님 살던 집터조사자 : 그런데 왜 연못이 됐어요?김금순 : 아, 그 연못이 벌을 받아가지고 연못이 됐어.조사자 : 원래 없었는데 집이 있었는데 그런 거예요?김금순 : 옛날에는 장자가 부자잖아. 그러니까 장자 부자야.조사자 : 아, 그럼 부자라는 의미의 장자요?김금순 : 어. 장자 부자.조사자 : 그럼 왜 며느리를 거기(서낭당)다가 놓게 됐어요?김금순 : 옛날에 신도사가 시주를 하고 다녔잖아요. 그런데 주인 영감님이 어찌나 그렇게 욕심이 많고 그랬는지. 어느 날 도사가 시주를 하러가니까 소 외양간에서 저기 소똥을 삽으로다 한 삽 떠 갖고 줬대잖아. 스님을 시주를 하라고. 아 그래서 이 며느리가 아버님 무슨 일을 하시냐고 스님더러 쏟아버리시고 공양미 받아 가시라고 며느님이 그랬대. 그래서 스님은 떠같고 고맙다고 돌아서는데 며느님이 백미라도 드리려고 쫓아나가니까 스님이 날 쫓아오되 뒬로 돌아다보지 말라고 그러더래. 그 스님이 도사님이 뒬로 돌아다보지 말라고 했는데‥‥거기(서낭당)그림이 있었어. 선녀같은…. 그래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천둥번개가 치고 난리가 나고 그러더래. 그래가지고 장자집 며느리가 무서워가지고 뒤를 돌아다 봤대. 그랬더니 장자네 집이 폭발이 되가지고 그냥 그냥 바다가 됐대. 그래가지고 연못이 그러게 됐어. 옛날에 그래서 놋그릇이 그렇게 많았대. 지금도 파묻혀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놋그릇이 그렇게 많이 싸여있었대.조사자 : 장자집 며느님만 남은 거네요?김금순 : 그 영감님들은 다 그냥 날라가 버리고 장자집 며느리만 남았대.조사자 : 단지 며느리가 착해서 서낭신을 모시기에는 좀 모자르지는 않나요?김금순 : 그런 건 아니고 며느님이 그냥 너무 효성스럽게 도사님한테 시주를 바치고 그래서 집은 파산되고 며느님만 살아남은 거지.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건 없고 장자집 며느리만 화상으로 그려놨었어요. 그래가지고 동네에서나 서낭님을 위하고 인자 해마다 고사지내고 10월초에 하지.조사자 : 제사를 주관하시고 그러시는 분 있나요?김금순 : 주관은 동네에서 주관이지.조사자 : 마을 동장님이 하시는 건 아니고요?김금순 : 그냥 동네에서 고사 잡숫지.조사자 : 관리하시는 분 있으세요?김금순 : 관리는 동네에서 하지.조사자 : 서낭당에 금줄이 있다고 그러던데 금줄은 없어겼나요?김금순 : 금줄은 끊어져 버렸지.조사자 : 다시 안 달아요?김금순 : 다시 안 달아. 금줄은 제사지낼 때나 달지.조사자 : 평상시에는 안 달아요?김금순 : 종이로 있는 건 있어.조사자 : 도당나무에 대해서는 아시나요?김금순 : 몰러. 도당나무에 대해서는‥‥ 저기 뭐야, 서낭당 고사지낼 때 도당고사 지내고 그랬지조사자 : 제사는 그럼 당일 하루만 하고 끝나나요?김금순 : 당일 하루만. 오후에 해.

물론 전설이란 것은 이 사람 이야기 좀 다르고 저 사람 이야기 좀 다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인터뷰를 하신 할머니의 이야기는 처음 조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장자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도 더 나온다. 그 이야기도 또 다르다. 그리고 대동고사의 비중도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자료집의 조사는 뭔가를 너무 부풀려 놓은 듯한 인상이 조사를 해 갈수록 더 하였다. 도당나무에 대해서는 확실한 위치를 찾지를 못하여 헤매였지만, 결국 장영자씨의 별장 구석에서 발견을 하였다.

마을회관에서 녹취를 마치고 동네 슈퍼를 들렀다가, 차양막 아래서 서낭당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우연히 물어 보게 되었는데, 슈퍼 주인인 김기용 할머니께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김기용 : 서낭당 현재 위치가 거기가 그 자리가 아니에요. 서울 쪽으로 있었지. 도로가 깍기니까 구리 쪽으로 좀 온 거지,조사자 : 육이오때 도둑맞아서 새로 만든 거라면서요?김기용 : 그 지금 그게 아니라 옛날에 하얗게 만들었어요. 석회로. 왜 학생들 만드는 거 있죠. 석회로, 만들어 갖다 왔는데 미군이 그걸 집어던져버렸어.조사자 : 도둑맞은 게 아니었어요?김기용 : 아니지 미군들은 종교적이잖아. 기독교인들이 많잖아요. 우상숭배니까 버려버린 거지. 인제 다시 동네에서 만든 거지. 70년대에 도로를 만들면서 하나 해달라고 그랬지. 시에서 해준 거지.조사자 : (고사를)동네 사람들이 다 와서 지내요?김기용 : 아니, 몇 사람만 와서 지내지.조사자 : 별로 그렇게 거창한 잔치는 아니네요?김기용 : 그래, 별로 거창한 잔치는 아니야. 일년에 한번씩은 하지.조사자 : 원래 그림이 있었다고 하던대요?김기용 : 그게 당이었잖아. 서낭당. 옛날이 집이었었으니까.조사자 : 더 컸다는 말입니까?김기용 : 어. 지금은 임시로 해논거야.조사자 : 길 넓히느라 당을 헐어버렸어요?김기용 : 그럼 헐어버렸지. 옮겨온 게 아니고 당을 헐어버리고 그것만 갖다 논거지.조사자 : 예산 내려오면 그렇게 당을 만드신다는 거예요?김기용 : 그렇지. 옛날엔 집이 지어 있어 가지고 그 안에다 붙여 놓고 그랬지.조사자 : 크기는 얼마나 돼요?김기용 : 조그맣지. 한 1평 정도 밖에 안 될 거야.조사자 : 그림은 어떻게 됐어요?김기용 : 타 없어졌지. 근데 이게 개인 땅이니까는 (당을 지을지는) 모르지.조사자 : 그럼 어디다가 짓는다는 거예요?김기용 : 그거 뭐 어떻게 하겠지. 자리가 그거 밖에 없는데. 줘야 되겠지. 동네 그거 하는데 줘야지.조사자 : 제사가 굉장히 거창하다고 그랬는데. 그렇진 않은가 봐요? 제사는 누가 주관해요?김기용 : 제주는 마을 통장이 지내지. 동네에서 마을 어른들이 하는 거지, 뭐. 다 동네 편하라고 하는 거니까.조사자 : 비용은 어떻게?김기용 : 비용은 다 걷어요. 각자가.조사자 : 얼마나 걷어요?김기용 : 한 집에 2,000원도 내고 3,000원도 내고 5,000원도 내고 잘 사는 집은 10,000원도 내고.조사자 : 마을사람들 다 내요?김기용 : 예, 다 걷어요.조사자 : 몇 가구 정도 살아요?김기용 : 50가구 정도. 제사지내는 사람은 대여섯 명 밖에 안돼조사자 : 무당오고 하지는 않고요?김기용 : 어.조사자 : 많은 사람이 올만한 크기는 아니더라구요?김기용 : 소줄이라고 하지. 소줄낸다고 하잖아. 돈낸 사람들만 적어가서 소줄로 주는 거야. 그것만 하는 거야.

다시 장자못을 보기 위하여 이동하였다가, 장자못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이선비 아주머니를 만나서 장자못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사자 : 연못의 유래 좀 말씀해주세요. 없던 연못이 생긴 건가요?이선비 : 없던 연못이 새로 생긴 거지. 그러니께 옛날에 큰 부자집에 중이 시주를 하러 온 거야.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쌀을 퍼주고 시주를 한거야. 그런데 시아버지가 보고 야단이 난거야. 그래서 시아버지가 바가지에 있는 쌀을 버리고 다시 바가지에 소똥을 하나 담아서 중을 줬어. 그러니까 중이 며느리보고 지금 자기를 따라오라고 그런 거야. 그러면서 며느리가 중을 따라가고. 중이 며느리한테 아무리 천둥번개를 쳐도 집을 쳐다보지 말라고 그런 거야.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그랬는데 막 천둥번개가 치니까 자기 시아버지가 걱정스러워 가지고 뒤를 돌아본 거야. 그래가지고 벼락이 떨어진 거야. 여기는 벼락이 쳐서 집에 연못이 생겼다는 거고. 그 며느리는 여기 우미내 가다보면 여자 목만 이렇게 한 서낭이 있어. 거기쯤 가다가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치니까 뒤를 돌아본 거야. 그래가지고 그 여자의 목이 달아났다는거야. 그래가지고 그 여자를 거기다 모시는 거야. 지금도 우미내 동네에서는 일년에 10월 몇일인가 어쨌든 제사를 매일 드려. 동네 사람들 쌀을 조금씩 다 걷어가지고.조사자 : 지도상으로는 이쪽에 장자마을이라고 있는 거 같던데?이선비 : 장자마을 있지. 장자마을이 지금 저기 태평지구 아파트 단지. 아파트 이름이 장자마을이라는 집이 있어.조사자 : 장자못에 얽힌 말이 다르던데?이선비 : 그럼 다 다르지. 이를테면 할머니가 알려주는 이야기랑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이야기랑 다 다른 거야.조사자 : 지금 장자못은 어딨어요?이선비 : 지금 장자못 살리기를 하는 거야. 구리시에서, 옛날에는 굉장히 좋았어. 낚시질을 하고 그랬어.조사자 : 마을 다 떠나버리고 그런데 물이 왜 이렇게 썩었어요?이선비 : 그 이후로 위로 아파트 단지가 생긴 거야. 태평지구말고 1단지 생기면서 그런 거야. 또 사람들이 늘고 그러니까. 그리고 폐수 때문에 이게 망가진 거야. 오염이 되서.조사자 : 개천이 연못에서 내려오는 물이에요?이선비 : 어. 이게 다 연못에서 나오는 물이지. 지금 공사하고 다시 공원을 만든다고. 살릴려고 하는 거지. 지금 드러운 흙 다 퍼내느냐고 공사하고 있어. 지금 물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 제보자

  • 이종서 (아천동 우미내마을, 1933년 생, 남)
  • 이송재 (아천동 우미내마을, 1948년 생, 남)
  • 최상곤 (아천동 우미내마을, 1924년 생, 남)
  • 이명무 (아천동 우미내마을, 1965년 생, 남)
  • 김금순 (아천동 우미내마을, 1932년 생, 여)
  • 김기용 (아천동 우미내마을, 1941년 생, 여)
  • 이선비 (아천동 우미내마을, 1950년 생, 여)

□ 조사일자 : 2000년 8월 27일, 2000년 9월 9일, 2001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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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교문동 한다리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986년 시 승격과 함께 교문리와 아천리를 합하여 교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95년 3월13일자로 교문1 2동으로 분리되었고, 면적은 6.7㎢로 시 전체의 22%에 해당한다. 교문1동의 총 가구수는 6,838가구로 전체 인구는 18,111명이며 행정구역은 29통 162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 기관으로는 구리시청, 세무서, 소방서, 시립도서관 등 9개소의 관공서와 학교 3개소, 금융기관 6개소, 우체국 1개소, 병?의원 9개소, 약국 8개소, 중소기업체 72개소, 노인정 12개소, 유아원 1개소, 교회 19개소, 사찰 11개소가 있다. 개발제한구역이 3.6㎢에 달하며,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2.7㎢가 지정되어 있고, 동사무소는 교문동 262-4번지에 있다. 교문1동의 역대 동장은 유동근, 마석인, 유소선이고 분동 이후 교문1동의 동장은 유소선이 맡고 있다. 교문2동은 1995년 3월 13일부터 업무를 시작했으며, 전체 7,747가구에 인구는 23,399명이다. 총면적은 1.1㎢로 시 전체의 4%에 해당하며, 이 중 개발제한구역이 0.6㎢이다. 행정구역은 21통 169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공무원 수는 17명이다 관련 기관으로는 관공서 1개소, 학교 2개소, 금융기관 4개소 등이 있으며, 기타 다수의 병원 의원과 기업체가 소재하고 있다. 동사무소는 교문동 799-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대 동장은 신재석에 이어 1995년3월 13일 이래로 전용락이 맡고 있다.

한다리라는 지명은 아치울 북쪽에 있는 마을. 아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두 줄기의 산자락쪽 기슭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동쪽 기슭에도 몇 채의 집이 있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는 ‘한교’, 규장각에 있는 고문서에는 ‘일교’,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는 ‘백교’라 표기되어 있다. 1956년에 발간된 『경녕군파 선원 이씨세보』에 있는 지도에는 ‘백교’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을 한자말인 한, 대, 일자 등으로 대신 쓴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곳의 원 지명은 한다리인데, 일제시대에 발음이 ‘흰다리’로 바뀌고, 그 말이 다시 한자인 ‘백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한다리가 옳은 지명이라고 한다.

1) 제명

한다리 대동고사

2) 당명 및 형태

진대(진태 혹은 진주)할머니와 진대(진태 혹은 진주)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한다리마을 입구의 향나무가 바로 신체이다. 할머니 향나무만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새로 심은 향나무로 할아버지, 할머니 향나무라 부르고 있다.

3) 신격 및 신체

본래는 진대할아버지 향나무가 바깥에, 안쪽으로 진대할머니 향나무가 있었으나, 한국전쟁과 도로 공사 등으로 전부 사라지고, 현재의 신체인 향나무는 다시 사다 심은 것이다.

4) 제일

음력 10월 초하루 밤 11시경

5) 제주

예전에는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선출하였으나, 현재는 통장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일단 제주로 선출되면 아주 엄격하게 부정을 조심하며 금기를 지키고 있다. 제일을 며칠 앞두고 동네 방송으로 비린 것을 먹지 말라는 등의 금기사항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제사 당일에는 소나 개를 잡는 일 등 피[血]를 보는 일은 절대 삼가며 부정 타는 일이 없도록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조심한다.

6) 제비

미리 거두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지낸 다음 날 거두는 방식을 취한다.

7) 제물

제물은 비교적 간단하여 삼색실과, 떡, 북어 정도만 준비한다.

8) 제차

당일 제물을 준비하여 밤에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이 당으로 가져간다. 제물을 진설하고 집안제사를 행하는 방식대로 절하기와 술잔 올리기를 하고 소지를 한다. 소지는 <도중소리>라 부르며 3장을 올리는데 참석자들은 1장씩 올린다. 음복은 마을로 돌아와서 한다. 현재의 대동고사라는 명칭은 굿이 분화된 이후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마을 굿이 분화되면서 대동고사라는 축소된 형식으로 잔존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전에는 소[牛]를 잡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큰 굿이 벌어겼다는 것을 제보자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02.교문동 한다리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한다리마을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진대할머니’라 부르는 향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마을 오른쪽 길로 잠깐만 들어서면 ‘진대할아버지’라 부르는 향나무가 또 하나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향나무들을 왜 ‘진대할머니’, ‘진대할아버지’라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현재 통장일을 보고 있는 강득성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득성 : 진대 할아버지, 할머니래는 거는 뭐 옛날 대로다, 대대로다 내려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그러는 거지 뭐. 옛날에 진주할머니, 할아버지 그런 식으로. 이름이지….

원래의 ‘진대할머니’와 ‘진대할아버지’ 나무는 아름드리 향나무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과 도로건설 등으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자, 이를 대신할 나무를 새롭게 심어놓은 것이다.

강득성 : 그 전엔 저기 밖에 도로 나기 전에, 그전에 그냥 이렇게 아름드리나무가 있었지. 근데 인제 그거를….조사자 : 그게 무슨 나무였어요?강득성 : 그때도 향나무였지. 근데 옮길 수가 없으니까, 그걸 인제 그때 당시는 팔아버렸지. 고목으로다 팔고 다시 저 밖에 있었던 건 아주 그냥 못쓰게 됐었고, 자기네들이 골동품으로다 사 가져간다. 그래서 헐값에 팔았지. 그때 당시, 그러고 인제 새 나무를 심어 놓고 동네 전혀 없앨 수는 없고 그러니까 인제 할머니 할아버지 향나무를 하나씩 사다가 지금 심은 거지.조사자 : 그게 몇 년도쯤 되나요?강득성 : 그것이 한 68년도? 68년도….정성훈 : 그 나무가 무척 컸었는데 육이오 사변 때는 죄 망가졌거든요. 그래 가지고 요 나중에 또 대신 심어 놓은 거예요.

‘치성낭구’라고도 부르는 이 나무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 밤에 마을공동제의를 올리는데 이를 '대동고사 라고 부른다.

정성훈 : 여기 여긴 동네 여 이 낭구가 향나무, 치성낭구지. 치성낭구라고 일년 이믄 꼭 지낸다고.강득성 : 요새는 시월 일일날 그냥 음력으로 시월 초하루 날 그냥 그 시루떡 하나, 시루떡하나 그냥 해놓고 그러구 그냥 열시, 열두시 되기 전에 그냥 한번 지내고 말아.

‘대동고사’를 앞두고 마을에서는 부정을 막기 위해 조심한다. 통장이 마을방송을 통하여 부정을 막기 위한 주의를 주는데, 진대할아버지나무 곁에서 만난 김선주씨는 이에 대해

김선주 : 대동고사로 시월 초하루면 대동고사만 지내는 거여.조사자 : 올해도 그러면 지내겠네요?김선주 : 그럼 시월, 음력 시월 초하루 날 그러믄 저 구월 그믐날 그때 한 사흘 앞두고 이제 동네에서 방송을 한다고, 뭐 비린 거 그런 거 먹지 말고 부정하게 하지 말라고, 거 방송을 하고 그러고 나서, 초하루 날 저기 뭐냐 떡 해갖고 뭐 인제 고사 지내지. 고사 지내.

현재 ‘대동고사’ 실무를 맡고 있는 통장 강득성 씨 역시 다음과 같이 부정을 막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금기를 말한다.

강득성 : 대동고사 지내는 날은 이제 뭐 개도 안 잡고, 소도 안 잡고, 뭐 일절 피를 안 보고, 부정 타면 또 안 지내고, 동네 부정이 타믄, 뭐 초상이 났대거나 무신 그럴 경우에는 안 지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만 지내지. 부정타면은 안 지내지.

부정을 피하고 ‘대동고사’ 날이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진대할머니’와 ‘진대할아버지’에게로 간다. 제물을 진설하고 집안 제사를 지내는 방식대로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리고 난 후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서 제주는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준 마을 지킴이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다가올 한 해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고 기원한다.

강득성 : 동네 그저 일년 동안 무사히 그저 잘 보호해 줬다고, 인사드리고. 어 다음에 내년에도 그렇게 인제 동네 분들 다 몸 건강하게 편안히 좀 보호해달라고 뭐 그런 정도지 뭐 또다른거 별거 없어.정성훈 :제사 지내는 사람이 인제 그 축원을 하죠. 어 대동제, 치성낭구에 정성을 들이니 이 동네 무관하게 해달라고 그거에요. 뭐, 나도 요 몇 번 지냈어요. 그렇게.
02.교문동 한다리마을 대동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한다리마을에는 그 입구에 향나무 2그루, 좀 떨어진 곳에 한 그루의 향나무가 있다. 이것은 한다리마을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고사를 지냈는데 그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그 향나무이다. 향나무는 2그루를 진태할머니나무, 나머지 1그루를 진태할아버지나무라고 한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한다리마을을 찾았을 때 통장님댁으로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통장님은 출타중이셨고, 그 사모님과 동네분 몇이 계셨다.
거기서 만날 김명숙 할머니와 조진원 할아버지를 통하여 대동고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조진원 : 음력 10월 초하루 동지 전에 지내는데 고사를 주관하시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작년에 돌아가셨어. 이름은 잘 모르고 그냥 정씨 할머니라 그랬어.조사자 : 향나무가 제사 지내기엔 너무 작지 많아요?김명숙 : 원래는 컸는데 도로 공사한다고 베어 버렸지. 그래서 새로 심은 거야 나무 이름은 진태할아버지, 할머니나무라 그래. (조사자 주 : 진대할아버지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현지주민의 말로는 진태할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조진원 : 한 20년에 좀 넘었을거여. 제사도 저 향나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사를 지내는데 각 집마다 창호지를 준비해서 소지를 올려. 제사를 주관하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론 통장이 제사를 지내.조사자 : 대동고사 지낼 때 특별히 올리는 음식이 있으세요?조진원 : 그냥 삼색 과일이랑 술이랑 포 정도를 올리지 특별히 다른 건 없어. 제사는 밤 12시 이전에 제사를 시작하며 1시간 정도 계속하지,조사자 : 제사는 왜 지내세요?조진원 : 그냥 마을 잘 되라고 비는 거여. 뭐 다른 제사들 똑같지 뭐. 별거 없어.조사자 : 할아버지, 마을 이름을 왜 한다리라고 불러요?조진원 : 마을 유래는 마을 입구에 유래비가 있으니까 그거 보면 될거여.조사자 : 마을에 내려오는 무슨 전설이라도 있으세요?조진원 : 별거 없어.조사자 :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김명숙 :원래 마을 입구에 다리가 있었는데 흰색 다리에서 흰 다리 마을이라 불렸어 그 흰다리란 말이 힌다리, 한다리가 된 거여. 지금은 그 다리위로 복개 공사를 해서 다리는 복개 도로 밑에 있거든. 원래는 좁았는데 내시들이 죽으면 이 마을 뒷산에 묻혔어. 그 장례 행렬이 들어올려고 다리를 확장했어. 그 후로 왜놈들이 확장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복개공사를 한거여. (조사자 주 : 실제로 뒷산 이름이 내시산이었고 내시촌이라 불렸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무덤은 없어지고, 산 이름만 남았다.)조사자 : 혹시 마을에 빈대절터라고 있지 않아요?조진원 : 아‥‥있지. 저 산(시루봉을 가리키며)에 가면 있는데. 왜 빈대절이냐면(조사자주 : 빈대절터의 위치에 대해서 마을 주민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절에 하도빈대가 많아서 그 절 스님들이 빈대 때문에 열 받은 거야. 그래서 절에다 불지르고 떠나버렸어. 빈대절이란 명칭도 그 때문에 붙었어. 그리고 거기에 가면 어마어마한 돌탑이 있는데 3층탑 높이만 할거여. 꼭 봐.

돌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탑을 찾으러 가서, 거기에 마을 사람들이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나 탑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조사자 : 할머니 이 탑은 누가 만들었나요?보 살 : (조사자 주 . 보살이라고 표기한 것은 상함을 안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몰라조사자 : 아시는 대로만 말씀해 주세요.보 살 ; 이 돌탑은 우리 영감이 40년 동안 매일 쌓은 거여. 영감이 산을 좋아해서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여기 시루봉 아래 탑자리가 남북한의 딱 중간 지점인 거여. 그래서 그 자리에 탑을 쌓기 시작했는데 40년 동안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지. 이젠 내가쌓고 있어.조사자 : 왜 관룡탑이라 이름 붙였나요?보 살 : 영감이 저 앞 시루봉을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넘어가더란 거여. 그래서 관룡탑이라 지었어.

그 탑을 쌓으신 할아버지 성함은 김봉학 할아버지이고 이미 작고하셨다. 그리고 빈대절터는 밭으로 변했고, 보살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빈대절이 아니라 화관암이라 했다. 돌탑은 자체로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작은 암자와 같은 곳이었다.

□ 제보자

  • 김선주(교문동 한다리마을, 1941년 생, 여)
  • 강득성(교문동 한다리마을, 1945년 생, 남)
  • 정성훈(교문동 한다리마을, 1909년 생, 남)
  • 김명숙(교문동 한다리마을, 1931년 생, 여)
  • 조진원(교문동 한다리마을, 1938년 생, 남)
  • 보살 할머니

□ 조사일자 : 2000년 9월 23일, 2001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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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조선시대에는 양주군 구지면에 속한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 때 구지면 평촌리?토막리?수택리의 일부와 미음면 수변리?석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토막리의 ‘토’와 평촌리의 ‘평’을 따서 ‘토평리’라 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조례 86호에 의하여 현재의 토평동으로 바뀌었다. 벌말은 마을 앞의 들판이 넓다 하여 생긴 말로, 평촌 혹은 민벌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개발제한에 묶여 있어서 아직까지는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제명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우물고사

2)당명 및 형태

당명은 도당이며, 예전에는 이웃 마을에서 무당을 불러와 행하는 도당굿 형태였다고 한다. 매년 시월 초에 벌어지던 도당굿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부터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마을제의는 소머리와 술을 올리고 간단하게 치성을 드리는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3)신격 및 신체

토평동 벌말 경로당 옆, 축대를 쌓아 높이 올린 ‘돈대’라고 불리는 곳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두 그루를 각각 ‘도당낭구’, ‘서낭낭구’라 부르고 있다.

4)제일

우물고사는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의 복중에 한다. 도당굿은 음력 10월 초하루 새벽 1시경에 행하지만, 제일 날짜를 정하는 것은 예전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날짜를 정한다.

5)제주

예전에는 깨끗한 사람으로 당주를 뽑고 매우 엄격하게 금기를 지키면서 준비를 하고 치성을 치러 냈다고 하지만, 지금은 마을 통장이 이를 주관한다.

6)제비

마을 토박이 중심으로 성의껏 낸다.

7)제물

우물고사에는 소머리와 술을 사용하며, 도당굿에는 삼색 실과 ? 떡? 술을 올리고 간단하게치성을 드리는 형태이다.

8)제차

우물고사는 제일날 밤 12시경에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제물을 진설하고 삼배한 후 술과 소지를 올리고, 제사가 끝나면 모두 음복한다. 도당굿은 예전에는 무당을 불러 제법 성대하게 치렀으나, 지금은 마을 토박이 중심으로 소머리를 고아서 제물로 쓰고, 만신인 이매화 씨가 간단한 비손을 드리는 형태로 소박하게 올리고 있다.

03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토평동 벌말 경로당 옆에는 축대를 쌓아 높이 올린 ‘돈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치성을 드리는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두 그루를 각각 ‘도당낭구’, ‘서낭낭구’라고 일컬으며 위한다. 벌말 도당할아버지가 몸에 지폈다는 만신 이매화씨는 이 나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매화 : 이 도당낭구래는거는, 이제 말하자면 산으로 치믄 산신할아버지고, 이제 말하자면 이쪽 서낭은, 이 길 서낭이라는 게 있어. 우리네가 이렇게 풀으면은, 말하자면 오고 가는 사람 차 가지고 뎅기고 왜 자꾸 근데 올라가고 그러다가도 돌멩이들 싸놓지? 그게 옛날부터 서낭이야, 그게 돌 쌓아놓는게. 지금은 절 밑에 가면 돌들을 이렇게 싸놓고 그러지? 그런 게 아냐. 이 고개에 넘어 가는데 낭구, 서낭낭구라 해가지고, 인제 그거는 낭구, 서낭에는 청색 무색을 좋아해. 오색을. 그리고 인제원 도당나무는 산신, 높은 분이고, 말하자은 이건 제자야. 여기 동네 지켜주는. 그래서 서남, 군웅 그렇게 인제 불르지. 그러니까 서낭에는 아래고, 이제 말하자면 도당은 원 조종, 산할아버지, 산으로 치믄 산할아버지고. 그러니까 인제 서낭이라는 거는 마을 지켜주는 거. 지나가는 차를 보고 지나가면 이렇게 받들어 주는 거, 보조병, 말하자면 학교에도 선생이 교장이 있고 그렇지, 응? 반반이 선생이 있듯이, 그게 있는 거야. 게니까는 그건 보조하는 서낭이야, 서낭님.

제보자 김낙원 씨에 의하면, 원래 마을에서 모시는 도당나무와 서낭나무는 마을 아래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수가 나서 다 떠내려 가버려서 새롭게 현재의 장소에 다시 모시게 된 것이라 한다.

김낙원 : 이게 우리 어렸을 적에 요만한 거였으니깐 적어도 칠팔십 년, 팔십 년 됐잖아요. 저게 더, 위에 서낭낭구가 저게 더 오래됐어요, 이거 보다. 저거는 우리 어렸을 때, 이만했는데 한 삼십년 더 빨라요. 더 일찍 심은 거라고 저쪽에다.조사자 : 거의 백 년이 넘었겠네요?김낙원 : 백 년이 넘었고, 요거는, 그래도 딴 데서 옮겨 왔으니까, 이것도 거의 다 한 구십년 되지 않았나? 그렇게 돼요…. 옛날에 저쪽에 있었는데, 다 떠나가고 없어요, 저 뭐야, 큰 장마가 져서 그냥 다 떠나갔어요, 없어졌어요.조사자 : 옛날 나무들은?김낙원 : 다 없어줬어요. 이제 그걸 갖다가, 혼을 갖다가 이리 모셔왔죠. 옛날에 이거 대단히 위했다고. 우리 어렸을 때에, 큰 한, 병자년에 장마가 져 가지고 여기가 다 떠나가다시피 했어요. 그 왜냐하면 가외는 다 물이 들고, 요기만 안 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그땐 여기가 얕아 가지고 돋갔죠. 을축년이면 아는지 몰라. 을축년에 더 큰 장마가 져서, 을축년엔 여기 집 한 채, 두 채 밖에 없고 다 떠내려갔어, 싹.

마을 사람들은 이 도당나무와 서낭나무에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와 음력 10월 초하루 깊은 밤중에 치성을 드린다.

김낙원 : 그러니까 일년에 두 번씩 칠월 초하루 날, 그리고 또 뭐야, 초하루 날 지내고, 이게 시월 초하루 날 지내고 두 번 지내요.조사자 : 칠월 초하루 날은 그때는 서낭나무에다가 지내는 거예요?김낙원 : 음력이죠, 음력. 그때는 두 군데에 다 지내요. 밤중에, 밤 열두 시 넘어, 조용할 때에, 그러니까 칠월 초하루 날 새벽, 그러니까 새벽이 아니라, 새벽이 한시지, 새벽 열두시 넘어서 이것도(도당나무) 지내고, 이것 먼저 지내고 난 다음에 저거(서낭나무) 지내요.

치성은 현재 소머리를 고아서 제물로 쓰고, 만신인 이매화 씨가 간단한 비손을 드리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깨끗한 사람으로 당주를 뽑고 매우 엄격하게 금기를 지키면서 준비를 하고 치성을 치러 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당주를 뽑았던 방식이 아주 독특해서 주목된다.

김낙원 : 바가지 알어? 박을 짜개지 않고 두는 것이 된박이야. 거 된박을 오래 두면 속이 바짝 말라 가지고 이렇게 파내면, 박이 되는 거야. 속이 텅 비었다구. 에 거기다가 인제 콩에다 이제 온, 깨끗한 분들 성함만 써요, 성함. 성함만 써 가지고 거기다 넣어 가지고 휘이 저어 가지고 퇴어 나오는 사람, 축원해 가지고 퇴어 나오는 사람이 당주가 되는 거여. 당주가 되가지고 떡집 되고, 또 한번 퇴어 나오는 집은 밥집이 되고.이연순 : 두 번째는 밥집.김낙원 : 그래 가지고 인제 그 굿헐 때 그 사람들이 다 깨끗한 몸으로 다 준비하는 거지.이연순 : 인줄 메고, 상주 안 들어오고, 뭐 아주 뭐든지 가리고 그렇게 했죠.김낙원 : 대단했지.이연순 : 그래야 인제 그 동네가 대동이 다 편안하고 정성 덕을 입고 다 그렇게 했죠. 우리도 그렇게 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의의 형태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인근의 무당들을 불러와서 하는 도당굿형태였다고 한다.

김낙원 : 옛날에는 음력 시월 달에 동네에서 죄 쌀 걷고 뭐 걷고 그래 가지고 굿이 크게 벌어졌어요. 여기가 굿 크게 했었다고, 도당굿이라고. 이틀씩이나 했지, 이틀씩.조사자 : 예? 외부에서 무당들 불러와서?김낙원 : 어, 그렇죠. 무당들이연순 : 사흘씩 했는데요.김낙원 : 무당들 불러 와 가지고 아주 크게 했죠, 옛날엔.

이 마을에는 도당할아버지 신이 내렸다고 하는 만신 이매화 씨가 살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마을 공동제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당할아버지 신이 내린 경위와 예전 이 마을에서 벌어졌던 도당굿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매화 : …그렇게 고생하고 그랬는데, 보따리 장사 댕기다가, 별안간에 이렇게 몸이 아프고 막 지미가 끼고 꼬챙이 같이 말르는거야. 게드니 어느 날 갑자기, 괜히 인제 내가 괜히 별안간에 미쳐갔고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일흔 아홉에 돌아갔는데, 그지 그냥 보따리이고 나서 점심도 굶고 그런다고 애들도 어렵지만은줄 것도 안 주고 굶기는 거야. “어멈은 굶고 있는데, 무슨 느히는 밥을 먹느냐, 점심을” 해갔고 해서 이렇게 이렇게 댕기다 보니까는 그냥 내가 괜히 별안간에 미쳐갔고 그러니까. ‘아휴 우리 며느리가 돈에 환장해서 미쳤나 보다’ 허니까 노인네들이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 증세가 이상하니깐, 암만해도 살살 빌어보라고 허니까. 노인네가 일흔 아홉이나 잡수어 갖고 며느리한데 왜 그러시냐고 인제 빌고 그러믄, 내가 막 반말로 찍찍 허면서, ‘왜 사람을 몰라보고 저기 허느냐’고 그러구 ‘너희 집이 며느리가 불쌍해서 내가 살릴라고 도당제…’, 옛날에는 여기가 크게 청량리?동대문?중앙시장, 시장이 거기 밖에 없지. 그런데 인제 그 사람들이 다 와서 시월 초하루날이믄 이제 도당굿을 해, 대동굿을. 대동에서 걷어 가지고 낭구에다가, 돈대래는데, 거기에다가, 돈대가 지금, 여기 동네가 생겼지만, 여 동네 아래 지금 생긴데 언덕을 거기가 도당터였었거든. 그러니까 낭구가 없고, 그냥 이렇게 신식이 되니까 그냥, 피난민들이 오래갔다 얻다가 할 데가 없으니까 거기다가 그냥 땅들이 죄 이렇게 해갔고 집을 지어라 이래 갖고, 낭구를 죄 베어내고 이제 이러니까 동네가 뒤집히고 그러니까 돈대로 모신 거야. 말하자면 거기서 위해든 낭구를, 그래 갖고 이제 일년에 한번씩 굿을 허는데, 것도 지금 세상이 이래지니까 뭘 허우, 허기는. 동네분들이 뭐 노인데들이 참 본토집만 살았지, 여기는 세도 안들었어요, 사람들이. 세도 안놨어, 동네가, 어렵게 살아도. 헌데 지금은 돈 때문에 방들을 들여갖고 세를 놓고 그래서, 셋방살이가 더 많어 그러니까 교인도 생기고, 여기는 교래면 대경질색이야. 대동에서 이렇게 위했던 저거니까. 그리고 날 받아 놓으면, 그냥 딴 집이 떡도 못해 먹고, 죽도 못 쑤어 먹어. 팥도 못쌈고. 게니까 이제 날이 지내야 해먹지. 그렇게 엄했다고. 그런데 이제 점점 그냥 이 사람들이 방들을 들여갔고, 타동 사람들을 이제 주니까, 거 교인들도 이제 오고 뭐, 이제 별별 사람이 각국에서 뫼여드니까, 콩길대 모냥 저거 허니까 그냥 고만 둬 버렸어, 굿을 안허고. 그러니까 이제 내가 미쳐갔고 막 그러니까. ‘왜 이렇게 대동 일동에서 이렇게 굿을 안하느냐. 게다 너희가 안하면 내가 동네서 어른모시고 있으니까, 내가 그 양반 모시겠다, 산신할아버지를’ 이제 도당할아버지지 이제 이렇게 당산이야, 저 시골로 치면. 낭구에 인제 이렇게 모신 할아버지. 그 인제 일 년에 한 번씩 그냥 굿을 허믄, 왕십리 중앙시장 있잖어, 청량리, 또 동대문, 아주 그 시장패들이 다 와서 사흘을 굿을 허니까, 만신들이 각국에서 오고, 피리, 깡갱이, 뭐 삼잽이 앉히고, 동네 호가를 돌아요 이제, 사흘을 두고, 그전에 낭구대를 내려 가지고, 사면 팔방을 댕기면서, 이렇게 동네를 입싸고 이제 이렇게 허니깐. 그 사람들이 사흘 나흘 장사하는 사람들이 와서 부주를 하고, 사흘 나흘을 그냥 그 굿하는 데서 구경을 하고 이랬어.

이렇게 매년 시월 초에 벌어지던 도당굿은 지금으로부터 26년 전부터 완전히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마을제의는 소머리와 술을 올리고는 간단하게 치성을 드리는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이매화 씨는 깊은 아쉬움과 섭섭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마을 공동제의의 현재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매화 : 시월 초하루 날하고 칠월 초하루 날하고 했는데, 근데 그걸 없앴다니까, 그냥 아주. 그리고 인제 이장이 시월 초하루 날하고 칠월 초하루 날은 소머리 하나씩 닥 사다가 하믄, 날더러 오라고 해서, 인제 남구에 가서 비손허지. 그 대신에 내가 할아버지 대접하느라고, 벌어주셨으니까 그냥 일 년에 한 번씩 시월 달이면 이제 따로 굿을 해, 집에서 내가 그냥. 동네서 안허니까. 그러니까 대동이 편안하잖어. 그러니까 지난번에 통장이 왔길래, 내가 그랬지. 타국 사람인데, 통장을 뽑았대나. 이 국에 끓는지 밥에 끓는지 몰르지, 벌어먹고 댕기느라고. 그런데 와갔고, 낭구를 지붕에 가려서 잘른다고 그래. ‘그 낭구가 얼마나 엄한데 아무케나 그렇게 잘르겠냐’고. 그러면서 내가 딴 데는 뎅기믄 보호 낭구라고 왜 다 해봤잖아, 철망으로 해서. 여기는 인자 얼마나 엄한덴데, 낭구 밑에…. 그러니까 인제 본토집 사람들만 몇몇이 이제 여기 믿어서 통장이 예수쟁이래도 용서 없어. 칠월 초하루하고 시월 초하루는 소머리 사다가 과서, 바쳐야 돼. 한 시에, 밤 한시. 말하자면, 초하루 날, 그믐날 이제 해 가지고, 이렇게 짓고 들어앉아 해마다 허니까 동네도 편안하고, 그니까 그거지 뭐, 대동 일동 그저 나 살아서는 편안하게 그저 해 달라는 게 인제 저기지 뭐. 그찮어, 어차피 내가 이렇게 돼 같고,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은 사람인가, 도당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내가 있으니까, 그냥, 그저 대동 일동 섭섭하고 괘씸해도 다 벌 풀어서 그저 다 제치시고 봐 주십소서, 그거지 뭐.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그냥 고사를 지내도 내가 독단히 하지, 난 동네 가지고 가서 쌀가지고 와라, 초 사라 그런것도 없어. 똥구녁이 찢어지게, 어려서 젠장 밥 굶을 때도 그런 소리 안 했는데, 뭐 허러 그런 거 해. 안 허믄 그만이고, 그잖어 헐래면 내 정성껏 내가 허는 거지. 뭐 그걸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안해 그런 거.
03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조사자 : 저희가 도당나무와 치성나무에 대해 조사하려고 하는데요.이성실 : 저 움마이라는데 거기 있었는데 그게 인제 축년 장마에 떠내려갔어, 나무가 파여서 떠내려가고 있다가 거기도 또 떠내려가고 없어져 가지고 이쪽으로 옮겼다가 나무도 또 죽고 그래서 이게 옮긴 거야.조사자 : 이게 원래 아니었는데 도당나무가 된 겁니까?이성실 : 그렇지, 도당나무가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그 언제부터 그게 했는지 모르지.조사자 : 그럼 마을이 언제쯤 어떤 분이 처음 이 마을을….이성실 : 그게 모르지 뭐. 그게 … 우리 할아버지가 … 이 할아버지가 19대 할아버진데1479년도 생이야. 요 미음 동산에 모였다가 화장답혀가지고 있다가.조사자 : 성함이 그럼?이성실 : 중원, 이자 중자 원자. 이건 족보이름이고 자가 이중원. 요건 이예 이자, 오얏리자. 이 할아버지적부터 여기서 산 거야. 벌말서. 1479년 생이시거든. 여기서 나셨는지, 이게 저 송산서 아마 나셔가지고 이리로 오셨을꺼야. 이 할아버지가 저 의정부 있거던? 이 할아버지 아드님이 이정건인데, 이 양반이 인제, 이 양반은 의정부시에 살고. 선조가, 거기서 사시다가 이쪽으로 오셔갖고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이쪽에 묻히셨나봐.조사자 : 이 마을에는 대부분이 그럼 벽진 이씨분들께서 주로 사시는….이성실 : 여기는 벽진 이씨하고 … 경주 김씨, 두 성이 많았지. 우리 벽진 이씨는, 벽진 이씨도 그렇게 경주 김씨도 그렇고 많이 저 신해천, 저 건배로 많이 가셨지. 우린 건배로 갔다가 다시 갔다가 우리가 이리 분가했지. 우리 아버지가 오형제 분인데 우리만 이리 나온거야. 예전에 여기 동네가 싹 떠내갔어, (을)축년에. (을)축년이, 1925년. 1925년에 큰 … 그리가지고 싹 지나갔어. 그래서 벌말로 이사간거야. 세집은 안 떴지. 여 집하고 그 집은 안 떠나갔지. 뭐 안 떠나가, 싹 떠나갔지. 그건 육이오 때 안 탄거지 싹 떠나갔지. 돈대가, 여기 돈대가 마차 갖다 놓고 거기서 울아버지가 그때 … 어휴, 언제 한번 살아보나 이러셨대요. 다 죽었다 그랬는데, 뭐.조사자 : 어르신 주민등록번호랑 연락처 있으시면….이성실 : 37년 12월 23일….조사자 : 저희가 자료집 만들면 어르신 성함하고 올라가거든요.이성실 : 구리시 토평동 563-1번지.조사자 : 전화번호는요?이성실 : 오륙삼에 이칠삼륙. 공삼일.조사자 : 여기 이 주변에 민간신앙하고 관련된 나무라든가 놀이라든가 있으면.이성실 : 나무가 요기 있지, 아까 저 내가 얘기했잖아. 저구 있다가 떠내려가서 또 이쪽으로 옮겼다가 또 떠내려가서 그 나무가 죽었어요. 그래가지고 이쪽으로 또 옮긴 거지.조사자 : 그럼 나무 말고 이 지방에서 구체적으로 민속은.이성실 : 없지. 옛날엔 대동굿을 도당굿이라 해서 크게 했어요, 대동굿. 도당굿이라고 그래.조사자 : 그 굿을 어떻게 했는지 조금만 설명해 주실 수….이성실 : 그러니까 인제 음력으로 구월 이십오일날, 이제 동네 어른들이 모여가지고 날을받아. 구월 이십오일날, 굿날을 받는다고. 그게 어찌 하냐 하면, 시월초승에, 시월일일서부터 이제 날짜를 아마 십일까지 쓰는지 며칠 쓰나봐 써서 된박에다 넣요. 콩에다 날짜 써서. 그게 흔들면 튀어나와. 그게 이거 날짜거든. 그래서 날을 받아. 그리고 이십오일날, 당주, 하주, 당주는 음식 차리는 집이고, 하주는 밥허고 뭐 이런거 하는 집이 하주야. 당주, 하주. 그건 또 인제 누구네가 부정하지 않고 이런거저런거 해 가지고 콩에다 써 넣어. 그래가지고 흔들어 가지고 나오면 받는다고. 인제 굿을 어떻게 하냐 하면, 만약에 초하룻날 굿이라면은 시월 초하룻날 굿이라면은, 인제 이십오일날 날을 받게 되면 절대 인제 이 새 같은 거 쥐 같은 거 이런거 통 못 잡아요. 못 잡고, 또 부부간에도 같이 자지도 않고, 이렇게 인제 저거한다고. 일일날이면은, 일일날 굿이면은 인제 그믐날, 그믐날 저녁에 부정친다고 그래, 부정. 부정치고 나서 일일날서부터 낮에서부터 밤새도록 하지. 그렇고 하고.조사자 : 그럼 하룻 동안만 딱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이성실 : 그러니까 일일날 저녁에 전날 부정쳤다가 일일날서부터 엔징 굿하고 밤새도록 하고 그 다음날 그만이지.조사자 : 그럼 굿하실 때 무당, 그 무당집은 이제 이쪽에 없고요?이성실 :지금은 없고 이제 다시 옛날에는 저기 있었어요. 수누피라고. 신대촌, 원수댁. 거기서 했어. 그 양반 지금 살아 있지.조사자 : 어디로 가면 저희가 찾아뵐 수 있는지….이성실 : 그 무당? 수택일동. 수택이동인지 여튼 원수택이야 원수택 수택리. 수택린데 수택리가 삼부당이거든 그 … 수택이동이 될런지 수택일동이 될런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원수택이라 그래. 거기가면 있어요. 그게 그 옛날에 그 양반을 부를 때 상복이처라고 불렀거든, 이 양반은 상복이란 양반은 돌아가셨고, 남자고 이 양반이 큰무당이에요. 연세도 많지. (조사자주: 수누피마을 무당에 관한 내용인 듯 함). 굿에 대해서 잘아는 분은 또 여기 동네에 무당이 있어.조사자 : 저희가 찾아뵐 수 있을까요?이성실 : 그럼, 집은 내 가르쳐줄께. 이 굿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쌀이고 뭐 죄 거둬와. 거둬가지고 도당나무 있고 거기다가 멍석 한구석에 춰 걷어다가 치고 해가지고…. 대동 아주 유명해. 아주 유명해서 우리 쪼꾸매서부터 무척 기다렸구. 기다렸다가 장사꾼 오면 사다가 친척들 나눠 주고 기다리고 무척 좋아했거든, 그럼 저 고기 대해서 아는 분 … 지금 있는지 모르겠어. 굿하는 거 그런거 그 양반한테 물어보면 죄 잘 안다구. 지금은 저 그게 없어지고 초하루, 칠월 초하루 또 시월 초하루, 다 음력으로 여기 손모리 갖다 놓고 … 여기 시월 일일, 칠월 일일날. 음력이니까인 제 칠월 초하루면은 유월 삼십일날 새벽에 지내요. 옛날에 여기 장서도 하튼이 동네 한 동네 가지고, 광나루 뚝섬 다 덤벼도 못당했다 이거야.조사자 : 여기가 원래 광나루보다도 큰….이성실 : 아니 크진 않지만 사람이 쎄지 사람이 쎄고 그래서 뚝섬 이쪽도 못 당하고 그랬단 말이야.

노인정을 나와 1분 쯤 거리에 무당이라는 이매화 씨의 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증언을 채록하였다.

이매화 : 옛날에는 대동일동이 아주 한 삼백호가 살았거던? 이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 남 셋방을 안줬어요. 전부 아주 본바닥 사람들만 살았지. 그리니까 한 삼백호 살았는데, 시월 상달이면은 초하룻날, 날을 구월 스물닷새날 날을 받아가지고 초하루부터는 사람을 안들여. 타관에 나갔던 사람은 들어와서 못잤고 들어온 사람은 나가지 못하고. 또 그 안에는 치성날을 받아두면 초 열흘날에 나요, 날짜가. 그러면은 그 안에는 팥도 못 삶아먹고 콩도 못 볶아 먹고 떡도 못해 먹고, 먹고 싶어도. 허기 전에는, 대동굿 허기 전에는. 그렇게 엄하게 그냥 해가지고 만약 그렇게 해먹었다면 큰일이 나갖구, 난리가 나. 동네가 뒤집히고 막. 번동 사람만 사니까 철저하게 지켰지. 그게 인제 그냥 스무 닷새날 날 받으면 초열흘, 시월 초 열흘 안에나, 날짜가 사흘날이나 닷새날이나 이래면 청량리시장 중앙시장, 옛날에는 지금 이렇게 저으니까 그렇지 중앙시장이 아주 쳤어. 왕십리, 중앙시장, 청량리시장 밖에 치는 데가 없어. 동대문시장은 치지도 않고. 그럼 거기서, 여기서 야채 하는 거를 이 대동에서 농사짓는 걸 다 청량리시장으로 가고, 챙이, 저 … 감자?옥수수?수수 이렇게, 좁쌀 이렇게 해니까. 그래갖고 그리 가니까는 시장에, 중앙시장에 다 당직을 해놓고, 시장 상인이, 말하자면 사장이 동네 몇 집씩 이렇게 잡아놓고 했거든. 그렇게 잡아놓고 했는데, 그게 점점 시국이 되니까는 점점 타관 사람이 들어 오고 한 사람 두 사람 들어오니까 동네 사람은 또 그냥 안 좋아갔고 나가서 살게 되잖아, 자식들이. 차가니까. 자식들이 자래니까, 교회를 갖고 그러니까 집에서 야단을 치고 나가살고 그러니까 그게 망가진거야. 그래서 굿을 안해. 그뒤로부터. 한 15년 됐어. 15년 됐는데, 그 전에는 굿을 하믄 거기 상인들이, 다 사흘 나흘을 해요, 여기서, 굿을. 사흘 나흘을 낭구 밑에다가 도당나무 밑에다가 그냥, 천막을 치고 인제 이렇게 해서 사흘 나흘을 한대면 피리 깡깽이 불고 그냥 만신놀이 한 연화군이 와서 동네에서 있는 집들은 인절미고 해서 거기다 바치는 거야. 다 그 사람들 다 멕여 그러니까 사흘 굿할 동안에 동네에서 번갈아가며 인절미 뭐 … 지금이니까 그렇지 그때는 인절미가 최고 떡이야. 좁쌀로 조만 심을 때니까, 여기는 좁곶이거든. 지금 쌀곶이 아니야. 지금이니까 쌀밥먹지. 옛날에는수수 좁쌀?보리?밀 이런 거밖에 못하니까. 게까 그냥 그 좁쌀로, 차좁쌀이래면 몰라, 총각들은. 파르소롬한 찰좁쌀이 있어. 그 떡을 해서 이만한 한 집에 하나씩 해 나가는거야,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그래고 그 굿으로 하면은 날 받아서 밥해주는 당주집은 상제도 못 들어와. 아무도 못 드나들어. 그 집 식구 아주 정결하게 비린 것도 안 먹고. 그렇게 철저하게 해가지고 사흘을 굿을 하믄 인제 마지막가는 날, 이틀 저녁에는 밤새도록 거기서 굿을 하고, 사흘날은 동네 호가를 돌아요. 그 무당이 옷을 입고 신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압장을 쓰고 배를 내려갖고, 저아랫녁에 지금 하더라, 그런거, 배 내려갖고 집집마다 들어가고 싶은 자리만 가시는 거야, 그 산할아버지가. 그런데 그런데를 들어가면 그냥 쌀 말고 이렇게 놓고 마당에다 멍석 피고, 집이나 이렇게 하고 사냐? 옛날 오막살이에? 마당마당 멍석을 피고 쌀을 하나씩 갖다 붓고 돈 놓고 인제 절을 하는 거야. 그럼 마을신이 한바탕씩 뛰고, 공순 주지. 그럼 그렇게 잘되고, 그렇커고 살았는데. 한 15년서부터는 없어. 사흘 저녁은 상인들이 와서 부주금을 해서 걸면은 새끼줄에다 해서 어마어마하게 걸어. 그러니까 그 상인, 사장들이 오는거야. 그러니까 주안시장 청량리시장 사장 노릇하던 사람은 다 늙어서 죽었어. 내가 그때 처녀였는데 내가 지금육십 일곱이 됐는데. 내가 처녀 였었는데, 열다섯살.조사자 : 그럼 마을 신은 어떤 분을 모셨죠?이매화 : 산, 낭구. 도당나무에 산신할아버진데, 글 몰라 웬만한 사람들은. 나무에 뭐가 있냐 그러지만은 옛날에는 이 동네가 굿할 때가 되면 안하면은, 저쪽 아래가 지금 집이 하나도 없었어. 나무가 착착하게 들어서면 범이 그냥 눈이 번쩍번쩍 허면서 비치고 사람 눈에 띄는거야. 무섬을 주고. 안하질 못하고 꼭 시월, 구월 스물 닷새날 날 받아가지고. 날 받는 날서부터 시월달까지 꼼짝못해, 굿하기 전에는. 이렇게나간 사람도 안들어오고 들어갔던 사람도 나가지 않고 콩도 못 볶아 먹고 팥죽도 못 쒀먹고 떡도 못 해먹고. 그렇게 해갔고 위해던 걸, 하나 둘 세월이 되니까 나가서 살잖냐. 저 그 아까 맏으들이. 교회 댕기고 뭐하니까 흐지브지 어떻게 망가지고 그냥 이래다보니까 동네에서 이제 관심이 없지. 노인네들 돌아갔지, 그렇게 위해던 양반들이 죄 돌아갔잖아, 세월이 갔으니까. 내가 처녀 땐데, 옌장 난 여기서 나고 여기서 자란 사람이야. 처녀 땐데 지금 옌장 육십일곱이 됐는데, 칠십줄에 들었는데. 다 돌아갔는데 지금 왔던 양반들, 골돌애해 하고 칠십줄, 지금 칠십줄. 그러니까 마딱하게 하니까, 아주 허술한거야, 마땅찮고. 그래다 나는 여기서 자라나가고 전라도서 여기 와서 사시는 댁으로 시집을 간거야. 그래갖고 내가 내렸어, 서른여덟살에. 할아버질 모신 거야. 오막살이 집에서 방 한칸 방 두칸 이런데서 모시고, 이렇게 하는데 거기서부터 내가 그냥 우리 할아버지 외아들인데, 칠 남매, 팔 남매 난 거야. 그래갖고서는, 연년생으로 낳아 가지고 잘 길르고, 그러니까 막내가 지금 서른 다섯 살인데 여섯 살 먹어서 내가 할아버질 모셨어. 여섯 살 먹어서 할아버질 모시고는, 그 여섯 살 막내, 고거 낳고 부터는 그냥 흐지브지 안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냥, 할아버지 그냥 여기 산할아버지 꿍얼 꾀어갔고는, 거기서 산신이 와가지고 꿍을 꾀서, 그걸 모셔놓고는, 대동굿을 안해. 안해도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내가 그 대신 시골 출신이면 양, 어렵게 살면서도 칠 남매 데리고 할아버지한테 고사하는 거야, 인제. 할아버질 대우러, 혼자. 대동 윗동도 피난하게 해주시고 다 집안 편안하고 자손들도 잘 자라게 해주고 … 어쨋든 이 번말이야, 여기가. 옛날 번말. 근데 이 번말집 여 편안하게 해달라고 오늘날까지 이제 한게 하다 보니까 내가 잔골 꽤 들여서 그런지 내가 진짜 저, 저기서는 진짜 이름 났어, 구리시에서는. 내가 사람 죽으면은 큰 굿 보담두 사람 죽으면 그 잔거지라는게 있거던, 여기 들어와서 온 푸는거. 그건 치고 하는게 아니고 그게 인제 고리짝금고 옛날부터 하는데 고걸 인제 내가 알아가지고는 그냥 굿하는건 뭐 어쩌다 한 번씩 하는거 예수쟁이천진데 허냐? 덴가 고걸로 인제 이름이 나서, 만원씩 받고 오천원씩 받고 이렇게 집집마다 해주다 보니까 이만원 삼만원 이렇게 되가지고 지끔 세올이 서른 여덟살에 할아버지 모셔갔고 지금 예순일곱이니까 몇 해겠니. 이십 몇 년이 됐지, 고럼. 그래니까 소문이 나니까 각 골에서 나서 안가는데 없어, 전국을. 진짜, 아닌게 아니라. 삼천원짜리가 지금은 돈 오륙백 뭐 그런거 우습지 월, 그땟 돈 만원만 하냐? 그래갔고 허는데, 이 애들이 지금 전부 젊은 애들 뿐이고, 인제 저렇게 나가 살고, 또 길러서 나가 살고 딴 데 나가서 물이 들으니깐, 교회엘 미쳐갔고 죄 흐지브지하는거야. 그치만 번동 사람, 지금 왔던 양반이 이제 요요 몇 집은 번토진이야, 이렇게 원주 요렇게 해가지고 요렇게 쪼끔 안에, 교회 절대로 안 믿지. 교회 댕기는 사람도 안 두고. 내 볼 때 여 근방, 이 가외서 인제 그냥 떠 들어온 것들이 그냥 어떻게 해갔고 밀려 왔어, 저 중량곁 뚝방에 물가가지고 어느 핸가는 다 했는데 그사람들이 이리 셋방 얻어가왔고, 흐지브지 어떻게 집을 사갔고 들은 사람도 있고, 타관 것들이 많아요. 그래 본토진 사람은 몇 안되.조사자 : 여기 원래 사시던 분들은 본관이….이매화 : 이씨하고 김씨. 벽진 이씨하고 김해 김씨가. 요에 김서방이 많아. 이서방은 요기구리시 수택동이란데 있거던? 우리 벽진 이씨는 수택동 원적이야. 거기가 많어. 그러니까, 벽진 이씨야, 벽진 이씨. 그렇거고 해서, 우리 애들은 지금 절대로 교회안하지 교회 안하고 절대로 우리애들은 안댕겨, 우리 집안들은, 고런데 지금 요런 집들도 안댕겨, 여기 밑는 사람은. 그런데 일년에 한 번씩 인제 안함으로써 고걸 알아갔고, 내가 이렇게 모시고 비나이다 하니까는, 시월 초하루, 칠월 초하루, 이렇게 소머리만 사가지고, 여기는 머리만 받지 게기도 또 돼지머리 그런거 안해, 소머리 큰 거 사다가 과놓고 인제 치성을 드리는 거야. 그러면 고거 치성하고, 초하루날부터 내가 가서 비선하고 빈하는 거거던. 게가 인제 그냥, 동네에선 그냥 요기 믿지만 알지, 교인들이 와가지고 가진짓 다 해도 못해, 엄히 여기 번토징인데 어딜 저기 해. 그렇지만 교회가 그렇게 들어시고 그러니까, 그 뭐 남을 말릴 수있냐, 우리네가 그냥 그런 집은 그렇거 살고 이런집은 이렇거 살다고. 우리 몇집들은 밑고 사는거야, 그냥. 난 처음에 여 도당할아버지를, 도당이라고 그래, 산할아버지를 갔다. 도당할아버지가 인제 처음부터 내려서 영한 소리 하고 그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니까는, 지금 인제 이렇거 하고 사는 거지, 뭐. 그런대로 저런대로 그냥, 교인은 교인인가보다 그러고, 떠도는 사람은 그래도, 번토중에서 겸했던 사람은 나보믄 반대 안해, 환영하지. 본시 아주 그렇고, 여기서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나서 여기서 자라가지고 내가 시집이라고 저 전라도 사람한테로 가가지구, 전라도서 이사온 집으로 시집을 가갔고, 팔 남매를 낳는데 하나 잊어버리고 칠 남매 다 길렸어, 내가. 오막살이 집에서. 그러면서 이렇게 할아버지 모시고그냥 방한 칸에다 글씨로 써서 이렇게 모시고, 이렇게 했거든. 그런게 이제 지금은 잘 모르주 있어서 3층까지 짓고 칠남매들 다 자라서 동서남북에 가서 다 살구, 딸들이 다 시집가서 자가용 몰구, 다 잘 살아. 내가 무신 저기해서 그런 게 아니라, 모 할아버지가 도와줘서 살지. 그러니까, 우리 막내 시누가 교인이야, 저 대구서 집사야. 근데 애들 보면은 느희들은 왜 엄마 뜻을 딸냐고, 하느님 믿으라고 그림 코방구도 안뀌고 그래. 그까짓거 댕기지도 안거던. 막내시누가 안댕겨, 지금. 그럼, 할아버지가 밥 맥여주시고 가리키고, 다 국민학교도 참 … 그냥 … 몇 년살인데 다섯이 한 번에 들어갔는데 그, 보통 어려운게 아냐. 그런데두 고생 무척했어. 방 한칸 두 칸에서 시어머니하고 시누하고 한방서 이렇게 해서 제, 할아버지모시고, 만날 할아버지가, 산기도를 가면은, 3층빌딩, 그때는 빌딩 없었어, 말끝마다 3층빌딩 짓게 해주고, 금시발복 시켜주마 그러셨어. 거짓말 요만큼도 안한거야. 그래갖고 해서 내가 월로 이 오막살이집에서 칠 남매 해가지고 어떻게 금시발복하고 뭘해, 안그래? 삼층빌딩을 어떻게 지어, 그랬더니 그게 아니고 몇해 벌어갔고, 집이 그냥 슬래터집, 그거 치고 슬래터 집, 창고 마냥 지었다가 또 인제그거 헐고 밑에 보니까 또 그냥 집이 언찮다, 뭐 이런 집에서 어떻게 일을 하느냐, 인나놈들이 오면 그랬잖냐. 그러니까 집 보고는 오지 말라고, 당신네 덕볼라 그런거니까, 오지 말라고. 그냥 이래가면서 해도, 기분이 그게 아니지. 그래서 십원씩십원씩 벌어도 딸 넷이 그냥, 진짜 막내만 고등학교 나왔지 중학교도 못 갔어, 공장에 댕기고. 그전에는 엄마가 이렇게 되니까. 지금, 참, 배불른 사람들이야 이 학생들. 왜그러냐면은 국민학교도 못가고 배지 못해도 지금 딸 넷이 동서남북에 시집가도, 칠 남매 맏이 팔 남매 맏이라 가서 다 시부모 모시고 잘 살고, 자가용 몰고 잘 살어. 저희 저 뜻대로. 그러니까는 그냥, 아들들은 그냥 이렇게 하는대로 다사는거 아니야, 보니깐. 그니까 집을, 할아버지 모시고 나서 네번째 진거야, 이게 진짜 3층 지었잖냐. 지하, 이거, 이렇게 삼층에다 모셔봤으니까 원 풀었지, 또 이제 금 그 … 알맞뜨에서 저기 앞에서, 하나쓰기 여러 식구 칠 남매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하면서도 얼마나 내가 알뜰하게 했냐, 옷하나 안 사 입고, 우리가 하는 적에는, 할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술 한 잔 안 먹고 담배 하나 안 먹거든. 그니까 그렇게 막, 아주, 농협에서 저축상도 탔어. 그렇게까지 했어. 그게 무신 많이 해서가 아니라 매일 같이 모 단돈 십원이라도 저축을 했어, 그렇게 해갔고 삼층빌딩 짓고 삼층에다 모셨지, 아들들 다 아파트 하나씩 사가지고 갔지. 그만하면 진짜 돈 벌었지. 금 그 내논게 칠백팔십만원 받았어. 해놨다가, 다 내놨어. 난 괜히 이런 사람 이렇게 끼고 댕기면 더 저거하니까 우리 내가 먼저 해야한다 그리고, 싹하고 가짜 반지 껴도 나는 좋은거 그건 줄 알거든, 진짠 줄 알거든. 게까 가짜 끼고 그냥, 싹 내놨어. 그니 금시발복 시켰다, 온대로 한대로 다 했어, 오늘날까지. 그니까 인제는. … 지금은 에이, 불러도 그렇고 없는 사람 없는대로 있는 사람 있는대로 하면섬, 그저 두 늙은이, 그냥, 시집장가 보내고 손주 열네마린데, 뭘. 남매씩. 그럼, 열넷인데 뭘. 아 그것도 공부 잘해. 잘 되면 그만이고 모, 돈이야 죽을 때 가져가냐. 그니까는 난 인약데, 이렇게 놀다가도 나가고, 그냥, 참, 여기서 만날 노는거 같은데 어뜨케 혼자 벌어서. 아들들이 이케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거 다 가르켜서 다 저기하고, 그래도 고등학교 아들들 다 나왔구, 대학교만 못가르켰지. 그땐 뭐 대학교가 어디 저기야, 지금 인제 그냥 둘째 아들이, 큰아들이 마흔 여섯, 둘째 서른 여덟, 막내 아들이 서른 다섯, 막내야 그게. 그런데 뭘 무신 대학교가 어디야. 에휴 난 지금 데모하고 막 그럴 때 보면은 그냥 진짜 배부르다덜 그랬다, 투정하고…조사자 : 혹시 집에 도당 따로 모시는….이매화 : 따로가 아니고 절안에 그냥 다 같은, 저 부처님도 모시고 신령님도 모시고 저 위에 이층에 있어, 게 봇당이 있어. 한데다가.조사자 : 저희가 좀 볼 수가….이매화 : 왜 보면 안되, 보면 안되는 게 없지. 사진 찍어도 괜찮아. 모르는 소리야. 저런데 절에 가면 못 찍게 하고 그러는데, 못 찍는다고 무신 명기가 나가나. 그건 아무 상관 없어. 인제 고런것이 접 때도 한 번 젊은 사람이 왔다 갔어. 근데 난, 에휴 … 그런거 어찌고 저찌고 하길래 그런거 난 안한다고. 우린 여기 이동네서 난, 자라나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진실하게 동네만 지키면 된다고 이러고 말았는데, 뭐 어쩌고 저쩌고하고 갔다고.조사자 : 어르신 한자 성함하고….이매화 : 난 모르지, 난 이름 멋지게 좋지. 이매화야, 이매화. 벽진 이씨 이매화.조사자 : 생년월일을 저희가 알 수 있을까요?이매화 : 십일월 일일. 동짓달 초하루. 음력. 그러니까 예순 일곱이래니까. 삼십 오륙년 됐나?조사자 : 저희가 나중에 다시 이 집 찾아와서 여쭤봐도….이매화 : 그야 상관없지, 여태까지 그렇게 해 갔는데 그렇게 해갔고 오늘날까지 나가는 거야. 그런데 인제 거기 도당나무가 인제 위로 이 아래 있었는데, 거기다가 집들 짓기 땜에 자꾸자꾸 올렸으니 위에다 놨는데, 사람들이 그냥 그들 밑이니까 모 여기다 받지, 그늘 밑이니까 똥구녁을 들이대고 쭈구 안잖니, 가슴사게. 게까 나는 당신들이 동네 낭구가 아니면은 내 맘대로 하는데 돈이 있어서가 아니고 없던지 있던지 대동굿을 해서라도 허잖아, 그런데 하찮은델 가도 고거 낭구는 이렇게 해서다 저기를 해놔서 못 들어가게 해놓는데, 여기는 그냥 하물며 대동에서 그만큼 덕을 보고 위해는 나문데 이렇게 둔다고 내가, 통장보고 뭐라고 그랬어. 지금 그 사람하고 같이 통장하고 한 동에서. 그래갖고 내가 뭐라 그랬더니 시청에서 해준데서 그것만 바래고 있는거래잖아. 지금 게서 내가 딴 거 필요 없다, 거기 보호만 해다오. 난, 여러 사람 그늘에 똥구녁 들이대고 안지, 술덜 그냥 그늘이 지니까 아무나 올라가서 먹지, 막 그냥 거기 올라앉아 가지고. 치성드리는 자리에 그래서 쓰겠어? 깨끗하게 정결하게, 해기 위해서 내가 동네에서 찾기 안하면은 내가 한다, 내 돈 들여서, 빚을 내서라도 한다 그랬지. 그랬더니 한다 그랬었단 말이야, 근데지금 오시잖아, 시청에서 해준다 그랬어.

(자리를 2층으로 옮김.)

이매화 : 옷이 다달라. 열두걸이야, 열두걸이. 굿이 열두걸이라, 처음에 입는게 이 옷이야.치성 내려준 이 옷을 입고 하는거야. 불사옷, 산신옷, 장군옷, 신장옷, 대감옷, 창구옷, 응…. 그 다음에는 인제 홍천굿 놀고 성주 놀고 장구 놀고 그러는인제 이러는 거니까 네 열두걸이지. 옷은 다 뒤바꿔 내놔. 홍천리옷, 남천리옷 장군동, 뭐 작별장군동 요런 집이 가면은 지금 우리는 옛날에 고대로 모신대로, 고대로 갔다가 한거지, 지금 새로 모시는 사람들은 우람해. 별거 다, 창이고 칼이고 이런데 해 놓고. 우리 내는 옛날적보다 간단하게 작두장군이야. 이렇게 저기하면 작두 칼질 쓰는거야. 올라서고, 그러는 것이 다 달라. 저 작두 우선 여기가 잠구고하냐 옛날에다 싸머두고. 이런 표시는 할아버지도, 궁중에서 입는 옷.

□ 제보자

  • 김낙원 (토평동 벌말, 1931년 생, 남)
  • 이연순 (토평동 벌말, 1934년 생, 남)
  • 이매화 (토평동 벌말, 1935년 생, 여)
  • 이성실 (토평동 벌말, 1931년 생,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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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수택동 수늪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수택동(水澤洞)은 이름에서 보이듯이 ‘늪’과 관련이 깊은 마을로, ‘늪말’, ‘수늪’이라 부를 정도로 앞 들판에 늪이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1914년 미금면의 수변리(水邊里) 일부와 이장리, 평촌리의 일부가 병합되어 ‘수택리’란 이름으로 구리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구리읍, 1980년에 남양주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86년, 현재의 구리시로 승격되면서 수택동이 되었다. 수택동 안에는 수늪(원수택)마을과, 크고 검은 바위가 많다하여 이름이 붙여진 검배마을,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던 이촌말 등이 있었다.

1) 제명

도당굿

2) 당명 및 형태

산신당이라는 당집이 있으며, 당집 안에는 산할아버지, 산할머니 등을 그린 그림이 있다.

3) 신격 및 신체

산할아버지, 산할머니, 조상할아버지, 조상할머니, 군웅할아버지, 군웅할머니 등

4) 제일

음력 10월 초하루 밤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마을 공동으로 당고사를 지내며, 평소에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 촛불을 켜고 술을 한잔 올리는 제의가 지속되고 있다.

5) 제주

특별히 제관을 선출하지 않고 인창동에 사는 무당과 당집을 관리하는 서성복씨를 중심으로 제의가 이루어진다.

6) 제비

예전에는 집집마다 추렴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공동경비에서 사용한다.

7) 제물

산치성 때에는 숫소머리, 소족, 삼색실과(밤 ? 대추 ? 곶감), 사과, 산자, 무나물, 두부, 북어 등을 올린다.

8) 제차

본래는 5~6명의 무당이 사흘 동안 굿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특별한 제차는 없고, 마을사람 중 부정이 없고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서 소원을 빌며 절을 한다. 제사가 끝나면 바로 당집에 모인 사람들끼리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고 끝낸다.

04.수택동 수늪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수택동 수늪마을의 공동제의 장소는 산신당이라 불리는 당집이다. 현재 수늪 경로당과 수누피 어린이집이 있는 건물 오른쪽 한켠에 현대식 건물로 별관처럼 지어져 있다. 당안에는산할아버지, 산할머니 등을 그린 그림이 있다. 당집은 원래 지금 위치에서 왼쪽에 자리하고있었으나 도로가 나면서 두 세 차례 옮겨지다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원래 당집을 독립적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경로당을 크게 지으면서 경로당 한켠에 당집을 마련한 것이라 한다. 당집에서는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 날 당을 맡아서 관리하는 서성복 씨와 인창동에 사는 무당이 아침 일찍 당집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술을 한 잔 올리는 제의가 지금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에 마을 공동으로 당고사를 지낸다. 당집에서 벌어지는 제의에 대해서 제보자 강호명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호명 : 위하는 것은 시월 초하루 날 하고, 매월 초하루 보름으로다, 매월 초하루 음력, 음력 초하루 보름으로 와서 식전에 일찍 와서 잔이나 한 잔 부어 놓는 거야, 촛불 켜놓고, 전체가 모여서 쇠대가리 갖다가 놓고, 어제 쇠대가리 하나 놓고 잔 부을 사람 봉투 하나씩 놓고 잔 붓고, 나를 위해서 인제 하는 사람들이지, 이제.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 밤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벌어지는 산치성 때에는 소머리와소족, 삼색실과(밤?대추?곶감), 사과, 산자, 무나물, 두부, 북어 등을 제물로 올린다. 예전에 도당굿을 할 때에는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올렸으며, 제의 경비도 집집마다 거두었으나 지금은 마을 공동경비에서 사용한다.
제의 주관은 특별히 제관이나 당주를 뽑지 않고, 관리자 서성복씨와 무당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들이 원하면 가서 절을 한다. 그리고 제의 당일 당집에 모인 사람들끼리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고 끝을 낸다.

□ 제보자 : 강호명(수택동 수늪마을, 1930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27일

□ 참고문헌 : 구리시 구리문화원, 『구리시지』상, 1996년, 672~673쪽, 7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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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수택동 검배마을 서낭나무 고사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 제명

서낭나무고사

2) 당명 및 형태

본래는 향나무를 서낭나무로 모셨으나, 20여 년 전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길이 나면서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3) 제일

매년 음력 10월 그믐

1차 증언채록

이전에 조사된 「갈매동 도당굿」(『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도당굿 학술종합조사보고서』, 1996, 45쪽)에는 검배마을의 서낭나무고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수택동 검배마을에서는 서당나무를 모셔 음력 10월 그믐에 서낭시루를 올렸다고 하였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나무를 베어버렸다가 젊은이들이 죽는 등 어지러워지자 다시 부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개인적인 치성을 올리는 장소로 변하였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검배마을의 서낭나무고사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이미 서낭나무는 사라졌고 서낭나무고사에 대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분도 만날 수 없었다. 길가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과 인근 가게 주인들의 제보를 종합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황골면옥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선 자리에 향나무가 있었다. 이 향나무를 마을에서는 서낭나무로 모셨다. 해마다 음력 정월과 시월 상달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걸고 고사를 드렸다. 마을 사람들 중 개인적인 바람이 있는 사람들이 이 서낭나무 앞에서 치성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약 23년 전에 길이 나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면서 이 나무는 없어졌다.

□ 제보자 : 김은기(수택동 검배마을, 73세,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27일

□ 참고문헌 : 구리시?구리문화원, 『구리시지』상, 1996년, 673쪽.

06 수택동 이촌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 제명

산치성, 동네치성

2) 당명 및 형태

도당굿.
도당할머니, 도당할아버지 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3) 신격 및 신체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4) 제일

매년 10월 초 저녁 9시경. 미리 9월 그믐날에 도당나무와 우물에 금줄을 치고 부정을 방지하며, 제가 치러지는 3일 동안은 우물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5) 제주

마을의 원로들이 제주, 대주 등이 되어 제의를 주관하였다. 제주가 부정한 상태로 제의에 참여하면 그 집에 화재가 발생한다고 한다. 동네에서는 실제로 부정이 있었음에도 제의에 참여했다가 불이 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을 정도로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6) 제비

마을 공동으로 추렴하였으며, 보통 돈과 쌀을 거두었다.

7) 제물

술, 떡

8) 제차

이촌마을의 공동제의는 원래 수늪 마을과 함께 지냈으나, 이촌마을의 이성남이라는 사람이 신이 들려서 이 마을에 당집(현재 일화제약 정문 근처)을 짓고 난 후 마을제의도 독립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이후 당집을 맡았던 이성남씨가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70년대 새마을 사업과 도로 건설 등으로 인하여 당집?도당나무?우물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이촌마을산치성의 맥은 어느 날 갑자기 신을 접하게 된 이 마을의 홍복순 씨를 매개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집?도당나무?우물 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자, 마을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홍복순 씨 집돌부처 앞에서 제의를 올리는 것으로 이촌마을 산치성의 명맥을 이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제의 비용을 모으고 홍복순 씨가 이를 맡아서 제의를 지내온 것이다.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이어져 오던 이촌마을 산치성은 1999년 홍복순씨 마저 돌아가시게 되면서, 이제 그 명맥이 끊어져 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제의는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술을 삼배 올린 후,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소지를 올리고, 우물에 우물제를 올린다. 제의가 끝나면 모두 당산나무 주변에 모여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음복을 한다.

06 수택동 이촌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수택동 이촌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시월 초에 날을 잡고 마을 공동제의를 치러왔다. 조사를 위해 찾아간 수택1동 경로당에서 만난 제보자 이학원 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촌마을 공동체 제의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학원 : 수누피 거기가 원수택이고 여기는 이촌, 거기는 도당굿이라고 옛날에는 그것도 허고 도당굿도 허고 그랬거든. 도당굿도 허구 그랬어, 원수택은. 우리는 저 이촌마을이라고 분리가 되어 가지고, 여기는 이촌마을로 우리도 그전에 굿을 허고 또 그러다가, 당을 지어서 또 옛날에 뭐야 저 무슨 터주 주저린가 허고 도당할머니할아버지 그 나무를 다 위해 놓고 이렇게 지내고 그랬어. 일년에 시월 달이면은. 시월 달에는 말하자면 부락에서 이렇게 치성고사를 드리고 그랬다고. 다 없어졌어, 이젠 다 옛날 얘기지

‘산치성’ 또는 ‘동네치성’이라 불리던 이촌마을의 공동제의는 원래 수늪 마을과 함께 지내왔었다. 그러다가 이촌마을에 사는 이성남이라는 사람이 신이 들려서 이 마을에 당집(현재일화제약 정문 근처)을 짓고 난 후 마을제의도 독립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매년 음력 시월 초에 날을 잡고 당집 근처의 도당나무에서 도당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하는 제의가 이루어졌다. 마을 원로들이 제관, 제주, 대주 등이 되어 제를 주관하였다. 제에 쓰이는 제수는 마을 공동으로 추렴을 했는데, 보통 쌀과 돈을 걷었다. 구월 그믐날이 되면 도당나무와 우물에 금줄을 치고 부정을 방지한다. 제가 치러지는 사흘 간은 우물 사용을 금했는데 각 가정에서는 미리 물을 모아 두었다가 이 기간에 썼다.
마을에서 모셔지는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의 영험함은 부정한 몸으로 제의에 참석한 제관집에 대한 화재로 나타났었다. 집안에 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의에 참석했다가 집에 불이 났던 일이 여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부정한 행위에 대한 도깨비장난이라 여겼다.

제의는 저녁 9시경부터 시작되어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께 술을 세 차례 올린 뒤, 참여한 사람들이 소지를 올리고 난 후 우물에서 우물제를 올린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 주변에 모여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 자리는 그 해 농사 및 마을 대소사에 대한 얘기들을 주고받는 마을 공동논의의 장이었다.
당집을 맡았던 이성남 씨가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70년대 새마을 사업과 도로 건설 등으로 인하여 당집?도당나무?우물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촌마을 산치성의 맥은 희미하게나마 홍복순 씨를 매개로 이어졌다. 홍복순 씨는 마을에서 술집을 하던 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을 접하게 되어 이성남 씨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집, 도당나무, 우물 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자, 마을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홍복순 씨 집 돌부처 앞에서 제의를 올리는 것으로 이촌마을 산치성의 명맥을 이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제의 비용을 모으고 홍복순 씨가 이를 맡아서 제의를 지내온 것이다.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이어져 오던 이촌마을 산치성은 작년 홍복순 씨 마저 돌아가시게 되면서, 이제 그 명맥이 끊어져 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마을 토박이들이 홍복순 씨를 매개로 하여 산치성을 지내던 당집 터(수택동 379-12번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 제보자 : 이학수(수택동 이촌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30일

□ 참고문헌 : 한철수, 「구리시의 세시풍습 : 구리시 수택동 이촌마을」, 『구리문화』제3호, 1995년.

06 수택동 이촌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신대촌 마을 노인정을 찾아가 노인회장님과 인터뷰를 하였다.

조사자 : 마을의 형성년도와 민간신앙 등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는데, 노인분들이 많이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구전되는 부분도 상관없으니 알고 계시는 대로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이윤재 : 마이크 있으면 곤란한데…. 일단 여기 수택1동만 해도 10군덴데. (노인정의)전화번호 어떻게 아셨어요?조사자 : 저기 나와 있어 가지고요…. (노인정 연락망을 바라보며‥‥)이윤재 : 그랬구만. 흐음, 이 동네도 그렇지만 여기 예전에는 수택리라고 그랬죠? 수택리. 이 동네가 3개 부락이 있었어요. 3개 부락이 있었는데 저기 수늪인데, 수늪을 원수택이라고 그랬고 여기가 검은배인데 검은배라고 그래요. 검은배인데 근데 검배 검배 그러지, 검은배라 하는데 여기는 신대촌이라고 그러고 이촌리라고 있지? 이촌리는 그 당시에 열 집 열 다섯 집 그 정도 밖에 없었어요. 현재 구리시장 뒷동넨데. 그래가지구 인제 (전주)이씨가 많아서 이촌이라고 했지. 근데 이 원수택 즉 수늪은 그러고 원수택, 신대촌, 이촌, 이것이 일정시대에 만들어진거라고…. 원래는 원수택을 수누피, 원수택을 검은배, 이촌을 옛날에 이촌이라고 했지. 원수택은 동네 생긴지가 오래됐죠. 그래서 우리도 몰라요, 우리도… 우리 선조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들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오래됐고 여기는 인제 그 당시는 옛날에는 요짝으로 이제 능선이 이렇게 되어있었고(손가락으로 능선을 그리며) 저짝으로는 이렇게 돼있었고 왕숙천으로 되어 있었고, 여기는 동네가 없었고 을축년 옛날 을축년을 아는지 몰라요? 을측년이 아마 천구백 한 이십년 정도 되었을 거예요. 을축년이라 그래가지고 저쪽 건너마을 토평리라고 벌말이라 그랬었거든요? 거기에서 살던 분들이 을축년에 홍수가 나서 물이 많아가지고 다 떠내려가는데 거기서 이제 건너와서 새 터를 잡고 그래서 이제 그것이 바로 인제 새 신자 터 대자 응? 그래서 여기가 그 당시 신대촌으로 맨들은 거지? 원수택 수택은 마찬가지로 으뜸 원자 근자 이렇게 마을 이름을 붙였던거지 그래서 여기 생긴지는 지금 현재 한 육십칠팔년전 얘기지 그쵸? 한 70년전 얘기네, 78년. 그 전 얘기고 인제 그렇게 물이 가는 바람에 건너와서 여기다가 터를 잡아가지고 인제 집들을 짓고 사니까 그래서 그 당시는 요기는 요쪽에 옛날 이씨가 사니까 그 당시 동네 이름이 검은 바위이고 여기는 새검배라고 했었다고. 근데 이것이 동네가 새로 생겼다고 해서 인제 그렇게 됐었는데 또 여기동네 유래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거 뭐 없어요? 인제 그렇게 생겼다는거 밖에 뭐…. 그리고 인제 아이구, 그것이 시방 많이 없어졌어요. 저기 저 원수택 저 앞으로 가보면 수누피 앞에 큰 장자못이라고 있어요. 그거 아는지 모르겠어, 장자못이라고…. 시방 저기 금호아파트 짓는데 거기 큰 장자못이 있는데 거기 장자못이 있었고, 고기에 인제 꽃정늪, 인제 연못인지 또 거기 가막늪이 있었고, 또 거기 올라보면 빨래늪이 있었고, 다우뿌리늪 있었고, 인제 늪이 큰 게 6개나 있었는데 저기 장자늪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다 메꿔져 버렸지. 그것이 늪이 생긴 유래가…. 우리가 들은 얘기지, 보지는 못했으니까. 이런 것도 하나의 전설이라 그러죠? 옛날에 그 장자늪이라는 데가 아주 장자 부자가 살았대요. 참 아주 큰 부자였는데 참 아주 구두쇠랍니다. 구두쇠인데 이제 하두 구두쇠니까 생선장사가 지나가도 생선 한 마리 안 사먹더래요. 생선장사가 담너머로 생선 한 마리를 던졌데요. 그런데 밥도둑놈이 들어왔다고 도로 던지더래요. 그런 정도의 구두쇠였는데 하루는 그 보통차림으로 중이, 즉 스님이지? 그것이 또 알고보면 도산데 중이 와서 이제 그 이렇게 염불을 하면서 인제 그 시주를 해달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이때 마침 그 마굿간이라고 알아? 마굿간 소 키우는데. 소 똥을치다가 그 꽹과리에다가 소똥을 한 바가지 팍 퍼주었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인제 이 도사가 잠자코 받아가지고 나왔대요. 나오는데 마당 끝에 우물이 있었대. 우물이 있었는데 인제 그 집에 며느리가 저녁 그때 해가 질 무렵이 되니까 저녁쌀 씻으러 나와서 물을 퍼가지고 바가지물 퍼서 인제 쌀을 씻다보니까 안됐더래요. 인제 그래가지구 인제 그 며느리 말이 “스님 그걸 절 주세요.” 인제 그 스님이 주니까 그걸 받아가지구 버리고 깨끗하게 잘 닦아가지고 내가 오늘 저녁 한 끼 안먹으면 되죠, 그러고 자기가 먹을 쌀을 거기다가 담아서 주더래요. 인제 하니까 이 인제 그것이 말하자면 그때말로 도사인데 그걸 받아가지고 가면서 내 뒤를 따르라 그러더래요. 내 뒤를 따르라고…. 자꾸 그렇게 되니까 그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라가는데 시방 현재 아차산 있지? 장자늪이 벌판에 있는데 아차산 쪽으로 인제 가가지고 광장동쪽 있지? 인제 시방 광장동 옛날에는 광나루라고 했어 광나루쪽으로 가는데 지금은 4차선이 큰 걸로 났지만 옛날에는 겨우 사람이 다닐만한 길이었어. 여기는 강이 있고 저기에는 산이 있어서 거기까지 갔는데 이렇게 시방 지금처럼 말짱한 하늘이 그냥 번개 천둥이 일고 소내기가 퍼붓더래요. 이상하게도 도사가 걸어가는 데는 햇빛이 났대요. 전기를 밖에 비추듯이 불빛이 도사 지나가는 자리만 이렇게 딱 비추더래요. 그 부인네가 쫓아가다보니까 생각해보니 아휴~비가 오니까 장독대 안 덮었네? 이렇게 뒤를 돌아보니까 뒤돌아보기 전에 그 도사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말라고 그랬다거덩. 근데 장독대를 안 덮었네 하고 뒤를 돌아다보니까 시방 모가지가 삐뚤어져서 그 자리에 돌이 되었다 인제 그 말이지. 그래가지고 거기 우리도 봤어, 거기 시방 우미천이라고 있어. 광장동 가기 전에 검문소 있는 동네 거기서 당이 있었어. 당이 그 쪼그만 집, 옛날말로 당이라고 했지. 당집을 지어가지고 그 몸 화상을 거기다가 세워놓고 뒤돌아봐서 모가지 삐뚤어진 상을 거기다가 해봤다고 하더라구. 그래가지구 그 비가 와가지구 인제거기 홍수가 나가지고는 늪이 생겼다는 거예요. 바우부리 늪, 수늪, 빨래늪, 가마늪. 장자늪, 그렇게…. 그렇게 인제 생겼다는데 그 말이 우리들이 듣고 보고 있는 견지에서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는 볼 수가 있어요. 뭘 볼 수가 있느냐. 꽃장늪 위에 논밭이 무척 많았다고, 논밭이. 여기서 논밭이 무척 많았는데 그것이 인제 그 옛날에는 삽으로 파고 괭이질도 하고 가래질은 서이 하는 걸 가래질이라고 하지. 줄을 잡아서 여기서 여기까지 하는 거. 거기서 인제 기왓장이 나와요. 기왓장이 나왔어요, 봤지? 또 지금은 온돌이 보일러 온돌이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고래를 캐고는 구들장을 파가지고 방을 불을 때가지고 방이 더웠었잖아. 또 고래 방고래를 켜가지고 구들장을 놓으면 여기 굄을 괴거든. 돌로 그러면 인제 다 통하라고 더운 게 그러면 그 돌이 시커매져요. 그러면 조막만해져요. 그것이 새까맣게 그슬린다고 근데 그런 돌로 나온다고. 그걸 내가 봤어, 또 주춧돌도 나오는 걸 봤고. 독 깨진 거, 항아리 깨진 거, 기왓장 거기 있던 건 확실한데 거기는 동네 거기 잘사는 집이 황토마을이라고 했었지. 이제 그것이 인제 전해져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리고 인제 여기는 이 동네는 별다른 게 없었고 이촌마을도 뭐 거기인제 흔히 인제 옛날로 치면 서울로 갈려면 거기를 거쳐서 가니까 여기서 가도 그 동네를 거쳐서 가고 저기서 가도 그 동네를 거쳐서 가고 인제 그리 거쳐서 가니까 이촌마을, 그 넘어가면 시방 뭐야 그 일화제약이라고 아는지 몰라. 일화제약이라고 큰 회사 있었어, 옛날에 거기가 학교 자리에요. 일본사람이 거기다가 터를 상당히 넓게 잡았지. 넓게 잡아가지고 학교를 짓고, 일정 시대에 학교를 짓고 운영을 하고. 마당도 있었고 인제 그랬는데, 그때는 그 학교의 이름이 성동상과 학교야. 성동상과 학굔데, 일정시대에 여기는 남북이 다 합쳐져 있었을 적에 하여튼 각도에서 십삼도에서 거기 학생들이 안 온데가 없더라고. 다 왔어, 함경북도서부터 저 제주도까지. 거기 학교 다 와가지고 이 근방은 학생들 하숙집이 많았지. 그렇게 큰 학교였었는데 해방이 돼가지고 일본놈이 쫓겨가는 바람에 버리고 갔는데 이제 그 당시에 그 후에 조양중학교로 바뀌었지. 조양중학교로 바뀌어가지고, 인제 서울이랑 가까워서 그런지 학생들이 많지 않아가지고 흐지부지 없어져버렸어. 그런데 인제 그거 벌써 일화제약이 무슨 뭐 누구라 그러더라? 일화제약이 들어오고 새로 생겨가지고 학교가 없어져 버렸지.조사자 : 거기 나무도 하나 있었다고 하던데….이윤재 : 어… 나무 있었지, 요 밑에. 저 서낭나무가 상당히 큰 게 있었지 그때 아람이 아마 이렇게 해서 나 앉아야 될 거야. 이 정도 됐다구, 그렇게 둘레가 컸다구. 서낭나무가 무척 거기다가 무신 머들 저… 지금은 그런 풍습이 많이 없어졌었지만, 가져가서 고사지내고 그런거 있잖아, 가을에… 거기다가 갖다놓고 절도 하고 그랬지. 근데 시방은 인제 여기 도시계획이 되는 바람에 인제 나무도 베어버리고, 없어지고 아주 뿌리째 캐버리고 거기다가 집을 지어봤어요.조사자 : 중요한 나무였나봐요?이윤재 : 그것이 아주 중요한 나무였지. 아주 상당히 컸으니까 컸지 나무 있단 말은 어디서 들었어요?조사자 : 여기 조사하다 보니까 중요한 나무 같아서이윤재 : 없어, 뭐 들을 얘기?조사자 : 수누피 마을과 이촌마을하고 산치성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지요.이윤재 : 그런데 인제 그것은 여기서는 인제 그 수누피지, 수누피 그서 인제 그 도당제라고, 도당제. 일년에 한번씩 도당굿하고… 미신적으로, 미신적으로 무당이 도당굿을 하고 하면은 인제 그, 그 동네에서 인제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무신 뭐 해가지고 도당신이 인제 올해는 이집으로 가고, 또 내년에는 저 집으로 가고 또 작년에는 우리가 했고… 뭐 그런게 있었지. 그래가지고 그런 게 인제 다 해서 치렀는데 거기도 큰 고목이 있었다고. 아주 큰 고목이 있었는데 거기다 그것이 저런 말이 있죠. 가지가 썩어서 떨어지잖아? 나뭇가지가 인제? 떨어지면 아무나 주워서 때면 탈이 난대요. 탈이 나는데, 그거 맡은 집에서는 인제 갖다 때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 걸 치성음식 맡은 사람은 갖다 때도 괜찮다는 말이 있어요 근데 다른 거는 없어.조사자 : 이 마을 전체가 생긴지 70년 정도 된 건가요?이윤재 : 이 동네? 이 동네 생긴지는 그렇지 한 70 한 78년 됐지. 가만히 있어봐, 을축년이 시방 올해가 신사년이지? 에… 신사년이니까 지난 60갑자 아냐? 그러니까 두루 여섯해하고 육십허구…. 고것을 확실히 알려면 저기 연배가 있을건데… 가만히 있어봐(책을 펼치시며) 맞어! 1925년이야. 이 해에 물이 크게 났대요. 그리고 고 다음에 병자년에도 병자물이라고 또 크게 났대요… 맞어, 25년이야!조사자 : 그러면 여기는 주요 성씨가, 집성촌이 발달하지 못한 건가요? 그러니까 어떤 성씨가 특별히 많았다거나… 그런 게 없었나요?이윤재 : 여기에는 이씨가 많았지, 아니, 아니 여기는 인제 우리 파본데 벽진 이씨가 많았지. 벽진 이씨가 토평에서 살다가 여기로 많이 건너왔지.조사자 : 우리 아까 여기 찍었잖아. 건배마을 서낭나무 있었던 자리… 거기가 아닌 것 같은데이윤재 : 아, 서낭나무는 요 밑에….조사자 : 아, 잘못 찍었구나….이윤재 : 서낭나무는 요 밑에 있었다구, 위치?조사자 : 자리를 제가 알아서 사진을 찍어가야 되거든요.이윤재 : 거기가 인제 집이 생겼거든.조사자 : 거기가 집 지어진 데라도 상관없거든요. 예전에 있었던 자리를 알려주세요.이윤재 : 내가 알려줄테니까 나가지.(일동 나감)

□ 제보자 : 이윤재(구리시 신대촌 노인회장, 1930년 10월 19일 생)

□ 조사일자 : 수택1동 494-19

□ 참고문헌 : 031-563-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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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인창동 궁말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인창동은 본래 양주군 구지면이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구지면의 동창리와 인장리의 일부가 합쳐져 인창리가 되어 구리면에 소속되었다. 그 후 1973년 구리읍에 소속되었다가 1980년 4월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에 속하였다가 1986년 구리시 인창동이 되었다.

1) 제명

산치성, 산제사

2) 당명 및 형태

당집. 그러나 이곳의 당집은 신을 모셔놓은 장소가 아니라 산치성에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제사에 쓰일 음식을 1차로 준비하는 곳이다.

3) 신격 및 신체

궁말에는 산치성을 치르는 장소가 세 군데에 있다. 또한 세 군데에 올리는 제물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아 신격도 각각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4) 제일

매년 음력 10월 초(초 1일, 2일, 3일 사이)

5) 제주

산치성의 제반 준비는 각 통장들이 담당하고, 제관 1명을 따로 선출하여 치성을 주관토록 한다.

6) 제비

궁말과 함께 이웃한 양짓말, 응달말, 베틀고개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산치성에 참여한다. 따라서 제비도 4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갹출하는데, 1999년의 경우 각 호당 7,000원씩 냈다.

7) 제물

이 마을에는 산치성을 지내는 곳이 3군데인데, 각각의 제물이 서로 다르다. 그 제물은 산치성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다.

  1. ① 떡, 과일, 두부, 나물, 산자, 밥
  2. ② 떡, 북어 3마리, 산적
  3. ③ 떡, 소머리, 우족
8) 제차

제의의 시작은 음식 익히는 장소에 가서 터주가리를 만들고 치성에 쓰일 음식을 익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음식이 익으면 첫 번째 치성을 드리는 장소에 가서 정해진 제물을 올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소에서도 같이 한다. 세 곳의 산치성을 전부 마치면 치성에 쓰였던 제물을 떡 한 쪽, 과일 한 개 등을 모두 같이 나눈다.

07 인창동 궁말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인창동 궁말 ‘산치성’에 대해서는 그 동안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자 역시 이곳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인근 수택동 이촌마을을 조사하던 중에 제보자 이학원 씨로부터 인창동 궁말의 산치성에 대해 간략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이를 실마리로 하여 궁말의 산치성을 조사하게 되었다. 궁말에서 만날 제보자는 십여 년 동안 산치성 제물 준비를 맡아서 해온 김종원, 이옥선 부부와 현재 통장을 맡고 있는 한영식 씨였다. 이들의 제보를 중심으로 궁말 산치성에 대해 기술해 보기로 한다.
궁말에서는 매년 음력 시월 초에 마을 공동제의인 산치성을 드린다. 제의 명칭과 날짜에 대해서 제보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옥선 : 여기는 옛날부터 제사예요. 여기는 제사라고 해요. 산제사라고 해요.김종원 : 옛날부터 산제사.조사자 : 산치성? 산제사라고 불렀어요?김종원 : 산치성이라고 불르고 그랬어.이옥선 : 산치성날 받았다구 그러구. 언제든지 음력 시월 초하루서 초이틀 초사흘 요 사이에 지내요, 언제든지, 그래가지고 인제, 고 사이에 기우를 해야 되니까. 딴은 우리는 음식을 만질 사람이니깐, 기우를 하니까, 뭐 비린 거 이런 걸 될 수 있으면 안먹지, 그냥, 한 보름 한 보름 안 먹고, 암만 시대가 그래도 가릴 건 가린다고, 안먹죠. 옛날엔 나가서 자지도 못했대요, 산치성되믄, 날 받아 놓으믄.조사자 : 외지 사람 못 오게 하고요?이옥선 : 응, 그랬대요, 여기도.

언제부터 이러한 산치성을 지내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여기고 있다.

김종원 : 언제 지냈는지 모르니까, 선대조 할아버지들이 여지껏 지내던 거니까. 거이 얼마나 됐는지 몰라요. 몇 백년 됐는지.이옥선 : 몇 백년이 된지는 모르고, 우리가 지금, 내가 맡아 가지고 한 지가 십 년이 넘었나 봐요.김종원 : 십년이 뭐, 그 저, 내가 아는 데 오래서부터 거 지냈으니까 몰르지 뭐 얼마큼 오래 된 거는.

그런데 산치성은 궁말 사람들만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옥선 : 지금도 사 동네가, 지금, 이 철뚝으로, 철뚝이 갈렸으니까 저 밑에 동네하고, 부락은 원래 그 동네하고 여기하고는 한 동넨데, 굴 바깥까지 경로당 있는데, 그러니까 그 동네까지 따로 허니까, 다섯 동네가 돼요, 오 동네,조사자 : 다섯 동네라면 어디어디 어디죠? 여기 궁말….이옥선 : 양짓말, 베틀고개, 응달말, 그게 네 동넨데, 지금 여기 철뚝이 놔져서, 거기도 궁말인데, 그 우리가 통장이 다르니까 다섯 동네가 되는 거죠.김종원 : 지금도 네 동네에서 지내는데, 사람 숫자가 늘지를 않아요. 그 전에 살던 사람만지내고 새로 온 사람들은 안 허고.이옥선 : 새로 와서도 이해하는 사람은 허고. 몇 되? 그러는 사람이 … 안하는 사람은 허든 사람도 안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이처럼 인근의 양짓말, 응달말, 베틀고개 사람들까지 함께 산치성에 참여한다. ‘산치성장부’에 따르면, 1999년의 경우 네 개 마을 6개 통에서 총 127명이 참여하여 제의 비용을 함께 부담했다. 네 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갹출하여 산치성을 지내는 것이다. 제보자들에 따르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현재의 인창초등학교 옆에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집은 다른 지역의 당집처럼 신을 모셔 놓은 장소가 아니라, 산치성에 쓰이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이자, 제사에 쓰일 음식들을 1차로 준비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김종원 : 여기는 그 전엔 요기 지금 인제, 철도 날, 지하철 나는 고 밑에 고기 큰 느티나무가 두 개가 있었어요.조사자 : 아, 저기 전봇대 있는데요.김종원 : 네, 근데 인제 다 죽고 없어졌지만, 거기 고 밑, 바로 그 느티나무 밑에다가 집을 하나 쪼금 당을 지어 가지고 인제 거기서 뭘 채리는 저거는 거기다가 놔두고 지냈는데 … 느티나무 밑에 인제 당이 있었다고.이옥선 : 거기서 음식 맨드는 집이 있었어요.김종원 : 인제 그게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느티나무까지 다 죽어 버렸어.조사자 : 당집이 있었을 때, 그림 같은 것이 있었어요?이옥선 : 아니 그런 건 없었지. 그런 건 없고, 이제, 집. 그게 그 그릇, 유물들 쓰느라고. 뭐 시루같은 거, 그 전에는 다 집에서 했잖아요. 그릇 같은 거 그런 거 두느냐고 그게 있었고 … 사람들이 그게 거기서들 떡방아 빻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인제 익히고 그러는 건, 산에 올라가서 다 익히고….

산치성을 지내는 장소는 인창초등학교 뒤쪽에 동구릉산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에 있다. 산치성은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에서 지낸다. 그리고 짚주저리 만들어 놓고 음식을 익히는 장소가 따로 있다.

김종원 : 근데 지내는 거는.이옥선 : 산에 올라가서 지내.김종원 : 저 위에 가서 죄 걷어가지고, 한푼 씩. 이제 거기다 얼마씩 걷어 가지고 거기 지내고, 고걸 지내고 나서, 또 다시 죄 떡이고 뭐고 노놔서 인제 다 돌라주고…이옥선 : 그래 갖고 인제, 인제, 인제 제일 정갈하고 깨끗한 집을 골라서, 그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인제 산에 올라가서 지냈죠. 지금 굴….김종원 : 저 굴 뚫는 고 옆에, 고기서 지냈는데.이옥선 : 산에 올라가서 지내고 그러다가는 … 지금도 거기서 지내는데.김종원 : 거기 세 군데 지내거든,조사자 : 세 군데요?김종원 : 세 군데 지내는 데는, 그 전에는 인제, 지금은, 지금도 주저릴 맨들지. 그 전에는 인제 그 짚으로 까는거까지 죄 맨들어 가지고 올라가서 지내고.조사자 : 짚주저리요?이옥선 : 터주 주저리 맨들어서조사자 : 맨들어서 갖고 가서는요?이옥선 : 지금도 그거는 허는데, 허믄 내려오면 금방 없애겠죠, 애들이(웃음).

이렇게 짚주저리를 만들어서 놓고 음식을 익히는 곳과 산치성을 드리는 세 장소의 위치를 대략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산치성 드리는 장소 ]

  1. 1 : 첫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2. 2 : 두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3. 3 : 세 번째 산치성을 드리는 곳
  4. 4 : 짚주저리를 만들어 놓고 음식을 익히는 곳

이렇게 세 곳에 걸쳐 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그 각각의 장소에 깃들여 있는 신격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는 세 군데에 올려지는 제물이 각각 변별된다는 점에서도 입증이 된다. 그런데 제보자들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피력하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신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영식 : 고기 인제 지내는 데가 따로 따로 세 군데가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인제 떡은 이제 시루가 공동으로 다 올라가고, 떡 한 시루씩은. 그러구 인제 소족 놓고 지내는 자리가 다르고, 북어하고 두부하고 놓고 지내는 데가 달르고, 또 머리 놓고 지내는데가 달르고, 그래 세 군데에 놓고 지내요. 그 유래는 몰라요. 어떻게 돼서 그러는지, 나도(웃음).김종원 : 지내는 데가, 세 군데 지내는 데가 따로 있다고, 자리가.조사자 : 산에요? 어떻게, 왜 세 군데예요?김종원 : 몰라 우리도.이옥선 : 나도 모르는데, 뭐 산신. 얘기가김종원 : 소머리 갖다가 지내는 데 있고, 떡만 갖다 지내는 데 있고, 북어하고 과일만 갖다놓고 떡하고 지내는 데가 있고 그렇거든.이옥선 : 저기, 산적도 쓰니까. 산적은 세 군데를 다 쓰고, 그러는데, 알기는, 그 전에 저 사무장님이 말씀하시기는 이쪽 끝에 마지막에 족허고, 소머리허고 다 올라가는데는, 북어 넷까지 다 올라가는 데는 마부라고 그러십니다, 마부라고.조사자 : 마부요?이옥선 : 마부라고 그러시고, 마부니까 여긴 다 놔야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현재 통장 일을 맡고 한영식 씨에게는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산치성 제반 예산이 기록된 「산치성장부」가 있다. 이 속에는 ‘치성제물 배열순서’라 해서 치성을 드리는 세 군데에 각각 올려지는 제물을 기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쳐 치성 제물들의 항목을 조금씩 바꾼 흔적이 보이는 이 기록 중에서 맨 나중에 기록되어 있는 제물 배열순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숫자는 산치성을 올리는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① 떡, 과일, 두부, 나물, 산자, 밥
  2. ② 떡, 북어 3마리, 산적
  3. ③ 떡, 소머리, 우족

현재의 산치성은 네 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준비하고 있다. 1999년의 경우 각 호당 7,000원씩을 갹출했다. 산치성에 대한 제반 준비는 각 통장들이 맡아 하고 있으며, 김종원 이옥선 씨 부부가 음식을 준비하고, 제과 한 명이 선정되어 치성을 주관한다.

조사자 : 산치성을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이예요?김종원 : 하나지, 절하는 사람은 하나다. 두루마기 입고, 두건은 안하고.이옥선 : 우리가, 한 십년 째 내가 다 하고 그랬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두루마기, 한복 두루마기 입고 그러구 가서 축문 읽고….

산치성은 우선 음식을 익히는 장소에 가서 한 쪽에 터줏가리를 만들어 놓고 치성에 쓰일 음식들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날에는 음식을 익힐 때에 사용되는 물은 인근의 당우물에서만 길어왔다고 한다. 현재 이 우물은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인창동 615-6번지 집 앞에 남아 있다.
음식이 다 익혀지면, 첫 번째 치성을 드리는 곳에 가서 정해진 제물을 올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이어서 두 번째 치성 장소와 세 번째 치성 장소에 가서도 같은 방법으로 치성을 드린다. 마을에는 산치성 때 읽는 축문이 전하고 있는데, 현재 한영식 통장이 보관하고 있는 산치성 축문 견본은 다음과 같다.

[ 산치성 축문 ]
祝文
維歲次庚午(年)十月朔初一日 丙戌 幼學 ○○○(제주명)
敢昭告于
土地之神 今爲山神之位 仁倉洞中人民
官災口說三災八難 牛馬鷄犬家畜一切
無害有德祝願 神其保祐 無後難
謹以淸酌脯醯 視薦于神
尙響

세 장소에서의 산치성을 모두 마치면, 치성에 쓰였던 제물들을 꼭 같이 나눈다.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떡 한 쪽, 과일 한 쪽 등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영식 :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그 제물 같은 거 이런 거 준비하는 과정만 하고요, 이제 여기 그 전에 원주민들로 해 가지고 그 해에 물가를 대충봐 가지고, 인제 떡하고, 북어하고, 소족하고, 소머리하고, 두부 몇 하고 거 지내는 게 몇 가지 있어요. 그걸 인제 공동으로 저거하믄, 그 걸 지낸 다음에 그걸 똑같이 다 나누죠. 정성이라 그래가지고 떡도 이렇게 하나씩 맨들어 가지고 나누고, 그리고 이제 밤같은 거, 대추같은 거, 감같은 거, 인제 골고루 이렇게 다 나눠 가지고…. 그것밖엔 없어요. 다른 건….

이렇게 언제부터인지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거행되어 오던 궁말 산치성의 미래는 그리 밝지가 않다. 당집은 이미 사라졌고, 산치성을 지내는 장소 밑으로는 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산치성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오던 ‘사무장’이라 불리던 어른 역시 돌아가셨다. 적극적으로 제보를 해준 제보자 한영식 씨 역시 ‘금년부터 해야 되려나, 저 그 걱정거리예요, 아 저쪽에 그 밑에를 전철 관계로 파 놓아 가지고. 뭐 직접 그 자리는 아닌데, 이렇게 날 받고 이러든 노인네가 돌아가셔 가지고….’라며 궁말 산치성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07 인창동 궁말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조사자 : 궁말에서 산치성 드렸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알아보려구요.김동완 : 아 산치성 지내는 거에 대해서?조사자 : 옛날에 이 옹자 서자 되시는 분이랑, 김 균자 응자 되시는 분이 말씀하신 내용이 있거든요.김동완 : 이거 누가 주최를 해? 황용기가 했었는데 황용기 죽었으니까…. 지금은 엉터리지 엉터리. 산치성을 지내긴 지내는데 옛날같진…. 지성터도 지금 형편 없어. 지성터에 누가 밭일 해처먹던데. 그걸, 산치성 지내는 걸 머할라고?조사자 : 구리시에서 마을의 이것저것을 조사해서 책을 낼거거든요. 이제 완성단계구요. 확인 작업차 왔습니다.김동완 : 아~그럼 옛날에 동구릉을 갔다 왔어야지. 지금은 동구릉 가야 알 수 있어.조사자 : 동구릉은 아까 갔다 왔습니다.김동완 : 동구릉 사무실 있다구. 동구릉 전체.조사자 : 저희는 가능한 한 많은 분들의 증언을 담아가야 하거든요.김동완 : 에 … 거 실은 여기도 이 지성터도 품위가 없어. 여기가 원래 궁말이여 궁말.조사자 : 저희가 저쪽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궁녀가 임금님의 손목을 잡아서 궁말이라고.김동완 : 옛날 궁이 있어가지구 궁말인데. 인제 궁말에서 지성터도 원체 우리 땅인데 개인이 분할헌걸. 말하자면 수백년 동안 산치성 드리던 데라서 그걸 뺐어요. 지성터만 뺐어야 했는데.조사자 : 그분 말씀이 진짜 궁이 있었던 건 아니구요?김동완 : 궁이 진짜 있었지. 궁이 가짜 진짜 있어?조사자 : 그러니까 임금님의 손목을 잡았다가….김동완 : 궁이야 여기 궁이 있었다구 여기 학교가 예전에 궁이었어.

□ 제보자

  • 이학원(수택동 이촌마을, 1917년 생, 남)
  • 김동완(인창동 궁말, 1920년 생, 남)
  • 조일행(인창동 궁말, 1925년 생, 남)
  • 한영식(인창동 궁말, 1945년 생, 남)
  • 김종원(인창동 궁말, 1929년 생, 남)
  • 이옥선(인창동 궁말, 1938년 생, 여)
  • 김동완(인창동 궁말, 1920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30일~2000년 10월 1일, 2001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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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안창동 동창마을 산신제와 부근제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예전에는 왕숙천 바로 강가까지 마을이 있었으나 을축년 수해 후 지금의 자리로 올라와 자리 잡았다. 그 당시에는 개울의 반 정도까지 들어가서도 집들이 있고, 나루터가 있는 큰 마을이었다. 동구릉이 있는 곳이라 생활 환경이 능과 관련된 예가 많으며, 농사는 주로 쌀, 보리를 경작한다.
마을에는 지금도 초상이 나면 쌀이나 돈 1,000원씩을 내는 상포계(喪布契)가 있다. 10여년 전에 구입한 목상여가 노인정에 보관되어 있어 요즘도 가까이에 장지가 있으면 이 상여를 쓴다. 마을에 선소리꾼이 있어 직접 요령을 들고 선소리를 메기면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는다. 이 마을의 경우 예전에는 농악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1) 제명

산신제와 부군제

2) 당명 및 형태

산신당과 부군당, 마을 뒤 동구릉산 꼭대기에 있는 ‘산신바위’는 산신제를 지내오던 곳으로, ‘치성바위’라고도 불린다. 산 아래에 있는 부군당은 원래 청기와도 몇 개 얹어진 기와집 형태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서 현재의 슬레이트지붕에 시멘트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3) 신격 및 신체

산신과 부군당

4) 제일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음력 1월 1일 날 아침 동네 어른들이 날을 받되, 제의 날짜는 정월초닷새를 넘기지 않는다.

5) 제주

육갑으로 생기복덕을 봐서 제의를 주관할 제관들을 뽑는다. 제주를 선출하고 나면 산에 가서 황토흙을 가져다 집 대문 양쪽 옆에다 놓고, 새끼를 꼬아 놓아서 이 집은 산에 올라가는 집임을 알린다. 일체 부정한 일을 삼간다.

6) 제비

각 가구별로 1만원 정도의 비용을 정성껏 갹출한다.

7) 제물

검정 수퇘지, 용떡, 북어, 대구포, 삼색실과, 술을 쓴다. 수퇘지는 직접 산 위에서 잡아 상체는 산신제 제물로, 하체는 부군제 제물로 사용한다. 동창마을 공동제의에 올려지는 제물 중에 특이한 것은 ‘용떡’이다. ‘용떡’은 일종의 시루떡으로, 용의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떡인데, 술병의 형태처럼 만들어 눈썹, 코, 귀까지 붙여서 시루 위에 올려놓는다. 동창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 때문에 용떡을 만든다고 한다.

8) 제차

본래는 산신바위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부군당에서 부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개인 사유지가 되어버려 산신바위까지 올라갈 수가 없어서 산 아래의 부군당에서 산신제와 부군제를 함께 지낸다. 제의가 끝나면 제주들은 제물을 일일이 창호지로 싸서 집집마다 나눠준다.

08 안창동 동창마을 산신제와 부근제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동구릉 주변에 위치한 동창마을에는 마을 공동의 민속 신앙 유적으로 ‘산신바위’와 ‘부군당’이 있다. 마을 뒤 동구릉 산꼭대기에 있는 ‘산신바위’는 산신제를 지내오던 곳인데, ‘치성바위’라고도 불린다. 현재 산 소유자가 철조망을 치고 개를 기르고 있어 접근할 수가 없다. 산 아래에 있는 부군당은 부군제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 청기와도 몇 개 얹어진 기와집 형태였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서 현재의 슬레이트지붕에 시멘트 벽돌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현재 부군당 안에는 호랑이 타고 있는 부군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신할머니, 산신할아버지 등을 그린 그림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군당 역시 ‘봉은 본초 연구원’ 건물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에서 만난 제보자들은 산신제와 부군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춘균 : 매년 그냥 그 음력 정월달에는 산제를 지냅니다. 산제는 이전에는 이거 산에 올라가서 돼지를 짊어지고 가서 거기서 모가지를 따고 잡아 가지고 그러고 했었는데요. 요즘 그게 없어졌어요. 근데 중간에 올라가서 허고 산은 샀기 때문에 에 우리가 거길 못 올라가요. 그래가지고 억울한 애로점도 많고 그래도, 그런데 그게 이 그 동네 그 날 저녁에는 애를 낳거나 뭐 할 적에 들어오지를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애 낳은 사람이 나가야지 밤에 절대 금지했었어요. 그래 산제사, 산제를 지내고 남자들 올라가서 떡방아, 남자들이 그냥 쌀을 쪄서 시루에다 떡을 허고 그러구.이성근 : 그래가지고 인제 돼지 잡고 떡허고 삼색 과일하고 이렇게 가지고 가서 이렇게 지내고, 또 해마다 했어요. 그게 한 오백 년 내리 했다고. 근데 이 땅이 그 전에 문화재관리국 정부 땅 이니까 그냥 우리 동네 밑에 가니까 그냥 가서 지냈는데, 인제 내 땅이니까, 금지구역이니까 들어가지 마시오 그러구 허고. 또 그 밑에서 지내는데 가 있어요.황춘균 : 부군당이라고요.이성근 : 또 당을 지어놨는데 당집 한 이 칸을 지어놨는데 거기서 지냈는데 거기도 제 땅이라고 이렇게 울타리를 해놓고 담을 쌓아 버렸어. 그래서 내가 그걸 내치 사람은 몰라도요 지금, 그 땅임자하고 그 나하고. “여보쇼 거 동네 대동에서 죽 말하자면 거기 치성을 드리는데, 여기는 유교고 당신은”, 지금 천주교거든 그 사람은, “천주굔데 신을 위하긴 마찬가진데 동네를 위해서 저기 좀 문은 냄겨두오, 들어가게” 그러구 얘기를 했다구요. 그런데 거기 제사지낼 때만 잠깐 열어주고 다른 때는 안열어줘.

이렇게 마을 공동제의를 지내는 장소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열의를 가지고 산신제와 부군제를 현재까지 지내오고 있다. 비록 산신제를 지내는 ‘산신바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하지만, 제한적이나마 ‘부군당’에서 산신제와 부군제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이다 제보자들은 마을에서 모셔지는 산신 내외와 부군 내외의 영험이 대단했었다고 말한다. 김현오 씨에 의하면, 옛날에 부군당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말발굽이 떨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치성을 마을에서 소홀히 한 적이 있었던 해가 있었는데, 그 해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고, 농사도 잘 안되고 해서 그 이후로는 치성을 더 잘 드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김무희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김무희 : 한해 정월달에 못하고 이월에 못하고 가을에 했거든. 자꾸 그냥 저 초상이 나고 애기 낳고 그래서. 그래서 그 때 아주 동네가 젊은이들이 많이 않고 그랬지.조사자 : 산치성을 안 지내서 그런 거예요?김무희 : 아니 인제 달을, 시방 제 달에 안하고 자꾸 냉기고 냉기고 그래서 그랬죠. 그래서 그렇게 됐죠.

또한 부군당에 모셔진 산신할아버지, 할머니와 부군할아버지, 할머니 그림을 훼손시킨 사람이 금방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황춘균 : 그 사람 미친병 걸려 가지고 갖다 불사러 놨어. 금방 죽었어. 얼마 못 살고, 몰래 훔쳐 가지고 불사러 가지고 거지되어 죽었어.

동창마을의 산신제와 부군제는 매년 음력 정월에 지내 왔다. 제의 날짜는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음력 일월 일일 날 아침 동네 어른들이 날을 받는 것이다. 보통 제의 날짜는 정월 초닷새를 넘기지 않는다. 이는 초닷새를 넘기면 대개 부정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통 정월 초이틀이나 초삼일 사이에 제의 날짜가 정해진다. 동네에서 산신을 모시고 있는 기자에게 제의 날짜를 받고 이것을 온 마을에 알리면, 세배를 포함한 모든 동네 행사가 중지가 된다. 세배를 받던 동네 어른들은 세배를 받지 않으며, 절을 하던 사람들도 절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이 동네 바깥에 세배를 간 사이에 제의 날짜가 정해지면, 그 사람마저도 제의가 끝날 때까지 못 들어오게 막았다고 한다. 아기를 낳을 때가 된 산모 역시 마을 밖으로 나가서 애를 낳고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제의 날짜가 정해지면, 생기복덕을 봐서 맞는 사람을 골라 제의를 주관할 제관들을 뽑는다. 산에 가서 황토흙을 가져다 집 대문 양족 옆에다 놓고, 새끼를 꼬아 놓아서 이 집은 산에 올라가는 집임을 알린다. 그리고 일체 부정한 일을 삼간다.

이성근 :치성드리는 거예요. 이 저 육갑으로 생기복덕을 가려요, 이 나이 연령으로, 거기 올라갈 사람이….황춘균 : 나이가 거기 해당이 안되면 못 올라가.이성근 : 해당이 안되면 못 올라가고.황춘균 :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못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어요.이성근 : 네 다섯이나 이렇게 일 할 사람을 뽑아요. 그게 정월 초하루 날이면은 날을 보거든요. 그래서 인제 이튿날이던지 사흗날 나면, 거 몇 살 몇 살 먹은 사람이 올해 치성 드리러 가야겠다 하고 뽑아 놓죠, 미리.

마을에는 마을 공동제의 때 사용하는 우물이 있었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이 전혀 넘치지 않는 우물이었다고 한다. ‘창디우물’이라고 불리는 이 우물은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나면서 사라졌다. 예전에는 제의 날짜가 정해진 이 우물을 다 청소하고, 제주는 이 우물에서 목욕재계를 했다. 이 우물에서 쌀을 씻고 우물물로 술도 담갔는데, 물이 워낙 좋아서 하루 저녁만 되어도 술이 되었다고 한다.
제의에 사용되는 제물들은 모두 산신제를 지내는 ‘산신바위’ 근처에서 준비했다고 한다. 직접 제주들이 제물로 올릴 재료들을 짊어지고 올라가서 직접 준비를 한 것이다. 절구까지 가지고 올라가서 떡을 만들었으며, 돼지도 직접 잡았다고 한다. 제의에 제물로 올려지는 돼지는 까만 수퇘지였는데, 직접 산 위에서 잡아서 상체는 산신제 제물로 쓰고, 하체는 부군제 제물로 사용했다.
동창마을 공동제의에 올려지는 제물 중에 특이한 것은 ‘용떡’이다. 용떡은 용의 모양을 흉내내어 만든 떡인데, 술병의 형태처럼 만들어 눈썹, 코, 귀까지 붙여서 시루 위에 올려놓는다. 이 용떡에 대해 황춘균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춘균 : 용떡은 아래 위 다 쓰는 거야. 위에 쓰고 아래 쓰고. 모양을 맨들기가 아주 힘들어. 그냥 저 우리 고려청자기 맨들 듯 손으로 잘 비벼서 맨들어야지, 이게 잘못하면 죽이 되고 잘못하면 흐터 버려져 없어져. 그러니까 힘들어요. 눈은 팥으로 놓고, 고다 위에다가 눈썹은 팥쪼깐 찢어서 놓고. 그러니까 용모양 맨들고 이쁘게 맨글어, 조작을 잘해야 된다고. 그리고 여기 이빨에는 여기다가 팔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를 붙여. 그러니 입이 되지. 눈썹 코 다 맹기는 거지.

이 용떡을 제물로 올리는 이유에 대해 황춘균 씨는 마을 앞에 개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은 물이 없으면 못살기 때문에, 이 개천을 관장하는 산신에게 용떡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라 한다.
제의는 예전에는 ‘산신바위’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산밑으로 내려와 부군당에서 부군제를 지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산신바위’까지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산 아래에 있는 부군당에서 산신제를 함께 지낸다. 현재 마을에는 제의 때 읽는 축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부군제 축문 ]
府君祝

歲次戊寅年乙亥朔正月初三日 丁丑
敢昭告子
府君尊靈地下東倉部落人民一同
安過太平災厄消滅牛馬繁晶
白穀豊等神其保佑謹以淸酎(酌)
庶??恭伸奠獻尙
[ 산신제 축문 ]
山神祝

歲次戊寅年乙亥朔正月初三日 丁丑
敢昭告于
山神尊靈地下集倉部落人民一同
安過太平災厄消滅牛馬繁昌
白穀豊等神其保借謹雌淸耐(酌)
庶??恭伸奠離尙

제의가 끝나고 나면 제주들은 제물로 올렸던 북어 반 쪽, 문어 반 쪽, 곶감 반 쪽까지 나누어서 창호지로 싸서 집집마다 나누어준다. 동창마을 사람들은 비록 예전처럼 산신제와 부군제를 지낼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마을 공동제의를 지낼 것이라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열의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땅 주인과 이야기해서 방안을 강구해 보겠다는 것이다

08 안창동 동창마을 산신제와 부근제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조사자 : 여기 전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안용산 : 여기 인창리구 이 동네는… 여기 동네 이름이 있었나? 양지마을이랑 응달마을이랑. 여긴 마을이 없었어 별다른 이름이 없었어.조사자 : 마을 동제나….안용산 : 저쪽 동구릉 마을 토백이한테 물어보면 다 알어 동구릉 옆에 사니까 다 안다구.조사자 : 최촌마을에 대해서 아시나요?안용산 . 능 위에 있던 동네란 말이야. 능 있기 전에. 근데 능 쓰게 되니까 밀려난거야. 그 내력을 나도 자세히는 모르고 어른들한데 들은 이야기 뿐이니까 이성근씨를 찾아가라구. 그 사람이 잘 알어. 이성근씨가 팔십이 넘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을 찾아서 물으면 다 알거야. 여긴 전국 각지에서 밀려든 사람이라 몰라.조사자 : 인창동에 마을이 몇 개 있고 그런건….안용산 : 인창동에 대해서 궁말 그거밖에 아는게 없어.조사자 : 여기보면 궁말 산치성에 대해 나와 있구요.안용산 : 여기가 왜 궁말이냐 하면 저기 학교 뒤에 임금님 손목한번 만져봤다가 시집못가구 죽은 여자가 있어서 그래서 궁말이거든,조사자 : 재개발하면서 많이 없어졌다구 하던데요.안용산 : 궁말에 역사적 남은건 그거 밖에 없어 그리구 능에 대해선 이성근씨 한테 가서 물어봐.조사자 : 동창마을은 어떻게 해서 동창마을이에요?안용산 : 그건 모르지 인창리 동쪽에 있어서 동창마을이라고 하는지…. 우린 몰라.조사자 : 동구릉 주변에 위치해서 산신제를 부군제 지낸다구 하더라구요?안용산 : 이성근이를 찾아봐. 가서 이성근씨를 찾아.조사자 : 저희가 작년에 조사를 나왔을 때 이미 조사를 했어요.안용산 : 아. 그 사람이 잘 알아,조사자 : 그럼 치성 드린다거나 마을에서 뭐 당집이나 제사지내는 나무 있잖아요?안용산 : 그러게 궁말 거기서 지냈다니까. 여긴 산이었구 여긴 다 논이구 산이었는데이성근 : 생기 복덕을 가려서 거기 올라가는 사람이 제를 올리기 마련이죠.조사자 : 산신제 지내구 부군제 지낸다고….이성근 : 산신제 지내고 내려와서 부군제 지내지. 똑같어.조사자 ' 산신제랑 부군제는 어떻게 지내나요?이성근 : 똑같아. 삼색실과 갖다 놓고 떡 갖다 놓고, 저 뭐 과일 세 가지 밤?대추?곶감?배…. 우에 지내는 거나 아래 지내는 거나 똑같이 돼지대가리 먹고.조사자 : 검은 돼지만요?이성근 : 그건 인제 부정한 사람은 거기 올라가지 못하고 생기가 맞아야 올라간다구. 그래서 날을 여냥 모아가지구 생기를 맞춰서 몇 살 몇 살 먹은 걸 뽑지. 집안이 깨끗해야혀. 만약에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든지 그후 날짜에 경도가 있다든지 그럼 못해. 집안 식구가 다 깨끗해야혀. 그리구 새옹 올린다구. 새옹이라구 이만한 밥그릇에 밥을 해서 올린다구 반찬이라구 없구, 밥만해서 반찬 있는데 과일 있는데 옆에다 놓구 일부 절한다구 일 년 열두 달 삼백 예순날 하루같이 지내라구 동네 사람 모두 편안하게 해달라구 기도를 한다구. 부근에 와서도 그렇게 정성을 드려 일년 열두 달 삼백 예순 날 다 아무일 없게 해달라구 기도를 하지. 열시에나 시작하면 한시쯤이면 끝나 70이면 70집 다 음식을 다 똑같이 분배해줘요.조사자 : 산신바위가 동구릉산 꼭대기에 있죠?이성근 : 고~기 바우가 있지. 넓적한 바우가 엎어지지도 않구 자빠지지도 않구 고기 서 있지.조사자 : 제가 공부한 내용을 보면 영험이 대단했다구요?이성근 : 그건 거짓말이구 지나가던 다리가 붙고 그런 건 거짓말이여, 전설이여(웃음).조사자 : 부근당에 그림 망쳐 놓은 사람 죽었다는 것도요?이성근 : 그것도 거짓말이여.(웃음)조사자 : 그러면 동창마을 이름이 왜 동창 마을인가요?이성근 : 그건 동구릉이 있지? 이 동족으로 마을이 있어서 동창마을이라구 해. 창고가 있었어.조사자 : 식량창고요?이성근 : 여기가 옛날 창고여. 여기서 옛날에 능지기들이 녹을 먹었어. 그리구 병장들도 있었어. 우리나라 망했을 때, 고종때 요 밖에 집을 지어 놓고. 근데 50명 갖구 뭐해 일본은 몇 개 사단을 가지고 왔는데.조사자 : 동창마을에요, 원래 살고 계시던 분 성씨가 어떻게 되세요?이성근 : 염씨가 많았지. 염씨, 양씨. 염씨도 없구 양씨도 이젠 읎어, 양씨가 젤 오래 됐구 그 담에 염씨, 그 담에 김씨, 그 담엔 강씨, 박씨… 많아졌지.조사자 : 저 부근당이 어디 있죠?이성근 : 저기 있지, 빨간 담장 쌓아놓은 데 있는데. 남의 집 안에 있다구. 그 전엔 그 방이 문화재 관리국 땅인데 그게 혁명정부 때 누가 가져갔대요. 5대 부락을 다 박정희정권에 줘버렸대요. 그걸 개인한데 분할 시켜서 팔았다. 지금 땅 주인도 원래 부근당이다 이런 말이 없단 말야. 그래서 몰랐어.조사자 : 작년에 산신제, 부군제 드렸어요?이성근 : 지냈어. 매년 정월 초사흘이면 드린다구. 그땐 시장이 문을 안 열어서 여기서 물건을 사서 지냈어. 그저 좋은거라니까 했지, 말다리가 붙고 그런건 다 거짓말이여.조사자 : 산신제 부군제에 여자들은 못 들어가나요. 남자들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이성근 : 남자들도 아무나 못들어가. 생기를 가려서, 언제 거기 들어가도 된다고 사람을 가려. 여기 이렇게 같이 있어도 못가는 사람은 못가구 가는 사람은 가구. 생기복덕을 가려서 뽑는거야. 그 사람들 올려 보내서 돼지 잡구 떡방아 찧구 횃불을 양쪽에 놓고 제사를 올려. 별거 없어.

□ 제보자

  • 김무희(동창마을, 1917년 생, 여)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강한만(동창마을, 1924년 생, 남)
  • 김현오(동창마을, 60세 가량, 남)
  • 황춘균(동창마을, 1935년 생, 남)
  • 오씨 할머니(동창마을, 1915년 생, 여)
  • 김영배(동창마을, 남, 7통장)
  • 김동수(동창마을, 남, 마을 청년회장)
  • 안용산(삼호아파트 너머 노인정, 70대로 추정,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일~2000년 10월 3일, 2000년 10월 16일, 2001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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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사노동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본래는 양주군 구지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구지면의 사노리, 동창리의 일부와 진관면 배양동 일부, 별비면 퇴계원리 일부를 합쳐 사노리가 되었다. 1980년 남양주군 구리읍 사노리에 편제되었다가 1986년 1월 구리시 사노동이 되었다.

1) 제명

도당굿, 산신제, 산치성, 산제

2) 당명 및 형태

당집, 산치성 터

3) 신격 및 신체

소나무, 산할머니

4) 제일

매년 음력 10월 1일에서 3일까지. 10월 1일 저녁에 제물을 준비하고, 차려서 2일 밤 12시까지 제의를 드리고, 3일에 공동제의를 끝낸다

5) 제주

사노동의 산치성에는 사노동의 안말, 두레물골, 양지편 주민들이 전부 참석한다. 제의를 주도하는 사람은 <영좌>라 부르는 각 마을의 대표들로, 이들이 모여 생기복덕을 가려 제의를 주관할 제주를 선정한다. 제주를 이 마을에서는 <화주>라 부르며, 화주는 제의를 주관하는 <본화주>와 이를 보조하는 <대리화주>가 있다. 화주로 선출되면 그날부터 108일간 개고기는 물론, 일체의 비린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부부관계나 시신을 보거나 만지는 일, 사고 등의 부정한 일을 일체 삼가야 한다. 초겨울임에도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해야 하며(예전에는 왕숙천에서 했다고 한다), 제수 장만을 위해 서울의 시장에 갈 때도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

6) 제비
7) 제물

북어포?대구포?소산적?소?간?소천엽?소콩팥?대추?감?배?밤?시루떡?백설기?우족?소갈비?그을린 소머리와 돼지머리를 준비한다. 진설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한다. 이와 함께 치성을 드리는 동안 잡귀가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당집 밖 오른쪽에 따로 젯상을 차리는 데, 이를 ‘21목’이라 부른다. 떡 한 쪽, 밤과 대추 각각 한 알, 각각 7쪽을 나눈 배 3개, 각각 7쪽으로 나눈 북어 3마리 등을 가로 7줄, 세로 3줄로 배열하여 21목을 만들어 차려 놓는 것이다. 이는 산할머니를 따라온 잡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 한다.

8) 제차

준비한 제물을 차리고, 음력 10월 초이튿날 밤 11시경부터 치성을 시작한다. 축문을 읽은 후 세명의 화주가 절을 하고 화주, 영좌, 통장의 순서로 소지를 올리면서 치성은 끝이 난다. 이를 ‘밤제사’라 부른다. 밤제사가 끝나면 당집에 올라간 사람들은 미리 끓여 둔 탕국을 먹으면서 함께 음복을 한다. 3일 아침에 제사를 파하는 <파제사 (罷祭祀)>를 지내고, 제관과 통장들은 제의에 올렸던 음식을 똑 같이 나누어 집집마다 돌린다. 이날 저녁 다시 화주들이 당집에 올라가 3개의 노구메를 지어 당에 올리는 <노구메정성>을 지내는 것으로 산치성을 마무리한다.

09 사노동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사노동 안말에서 북서쪽으로 20여 분 걸어서 가면 사노당 산치성을 지내는 당집이 나온다. 당집은 마을 외부 사람인 경우에는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조사자는 안말 노인회장인 임정태 씨의 안내를 받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당집까지 갈 수 있었다. 신성시하는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2칸으로 된 당집 안에는 시렁이 있고, 젯상이 두 개, 그 앞으로 향로를 올려 놓은 작은 상 등이 있었다. 모시는 신을 형상화한 그림이나 조형물은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이 당집에서는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초사흘까지 삼일간 마을공동제의가 벌어진다. 시월 초하루날 저녁에 제물을 준비하고 차려서 초이튿날 밤 열두 시까지 제의를 드리고 초사흘날 파제를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마을 공동제의를 ‘산치성’, ‘산제’, ‘산신제’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 공동제의에는 사노동의 여러 마을, 즉 안말, 두레물골, 양지편 사람들이 참여한다. 언제 마을의 경우 해방 직전까지 함께 참여했으나 해방 직전부터 독립적으로 제의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제의를 주도적으로 주관하는 사람들은 영좌라 불리는 마을 대표들이다. 세개 마을에서 영좌들이 주도하여 제를 주관할 제주들을 선정한다. 마을에서 만난 이덕만 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덕만 : 여기 산치성은, 나 와 가지고도, 여기서 내가 오십 삼년을 사는데, 해마다 모시죠. 그게 인제 깨끗한 사람으로다가 세집을 뽑아 가지고, 시방은 또 그렇게도 안 허나봐. 사람사가지고도 그냥들 허나봐. 그런데 그 아주 깨끗한 사람으로다가 세, 삼 화주를 내, 세 사람. 그래가지고 그 화주를 봤거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도 여러번 봤어. 그런데 아주 정갈시러워야돼. 집에서 큰소리도 내지 말아야 되고, 젊은사람들이 또 몸 뭐, 저거를 부정허면 또 그것도 못 허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허지, 나이 젊은 사람들은 허기가 힘들었지, 그랬다고. 시방도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나 거기 올라가지, 좀 이런 상제거나 부정허거나 한 사람은 못 올라가지, 시방도.

이덕만 씨의 제보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제를 주관하는 제주들을 이 마을에서는 화주라 부른다. 그리고 화주는 다시 사흘 동안 제의를 주관하는 본화주와 본화주를 보조하는 대리화주로 나누어진다. 화주로 선출된 사람들은 예전에는 선정된 날부터 108일 동안 개고기는 물론 비린내 나는 음식 일체를 입에 대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부부관계나, 시신, 사고 등 부정한 것들은 화주 자신은 물른이고 그 가족들까지 보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금기가 엄격했기 때문에 화주를 선정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제주들의 조신한 행동은 제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겨울이 다가오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를 하는가 하면, 제수를 장만하러 서울에 있는 시장으로 갈 때는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기까지 한다.

임정태 : 지내는 동안에는 동네 사람이래도 나갔던 사람들은 그냥 나가지 않지, 외부엘. 만약 나갔었다 하면 안 들어오고. 가령 비린거, 치성이라는 것은 비린 것을 안 먹고 지내게 되어 있잖아. 전에는 뭐 저 중량교벌 뭐 치성 제물 같은 거 사러 가잖아. 사러 가면은 저 중량교 다리 밑에 물에 들어가서 벌거벗고 목욕을 해요. 그래갖고 치성드릴 과일을 사 갖고 와서 제를 지내지.이렇게 제주들과 일반적인 마을 사람들까지 조심을 하는 것은, 산치성에서 모셔지는 ‘산할머니’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산할머니의 경외스러운 영검을 믿기 때문이다추기만 : 이 저 산치성 지내는 거 그거는 아주 영검합니다. 정말 영검해요. 그 우리 아버님이 그걸 위배해설랑, 위반해설랑 돌아가셨어요. 그건 분명해요. 왜냐하면은 여기는 시월, 음력 시월 초, 저 구일 날로부터 시월 초삼일까지 기우를 해야 되는데, 우리 아버지가 안 해 가지고 설랑. 옛날에는 우리 아버지가 참 그줘 뭐 팔지도 않고, 허다 못해 채소도 안 팔았다고. 제삿날 사흘 앞두고.임정태 : 그러니까 앞뒤 날, 음력 시월 이일이 치성 날인데 일일이나 삼일이나 앞뒤로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치성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추기만 : 가령 우리 아버지가 그때 말을 길렀대요. 그때 말을 길렀는데, 말을 가서 그때는 채소도 안 팔고 곡식도 안 팔고 하는 판인데, 저 안감내 동대문 신설동 안감내 높은 시장에 가서 장작을 팔고 말까지 팔고 왔어. 그러니 벌이 얼마나 엄하우. 괘씸하지, 아닌게 아니라 장작 판 것 만해도, 내다 팔지를 못하거든 집에 있는 거를. 그러니까 이게 그래요. 옛날에 우리 어렸을 적에 얘기는 치성 날 구월 이십 구입부터 시월 초삼일까지는 오는 사람도 못 오고 가는 사람도 못 가고, 만일 꼭 가게 되면 거기 가서 사흘 지낸 다음에 오고, 또 거기서 온 사람이 일일 날 왔으면 사흘지낸 다음에 가야지, 그 안엔 못 가. 그렇게 돼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것을 무시해 가지고 설랑 말을 팔고 왔단 말이야, 이일 날. 시월 이일 날. 그래가지고 그날로 팔고 오는 날로 이 반신불수가 됐어요. 그래 가지고 마흔 아홉 살에 그렇게 돼가지고 쉬흔 한 살에 돌아갔어요, 삼 년 만에.조사자 : 그때 몇 년도이죠?추기만 : 육이오 전이지, 육이오 전이야. 일정 때 얘기야. 오십 한 살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오십 한 살까지 살 때도 육이오 전이야. 그 후로 우리는 아휴 저 산신령님은, 아 그 산치성 때 말을 팔고 와서 그랬다고, 이렇게 해. 아직 그것을 후회를 하고 잘못을 했다고 그러구.임정태 : 산치성 때는 비린 것을 먹고 산에 못 올라가요.추기만 : 못 올라가요. 조개젓 무슨 뭐 이 생선, 고기 이런 것을 절대 못 먹어요. 사실은 피해를 입어요. 뭐 우리 아버지 뿐이 아니고, 다 피해를 입었다고. 그후에도 박○○이네 아버지가, 저 위에 사는 박○○이네. 그 사람 아버지도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 제사, 산치성, 그 양반이 화주를 잽혔어.임정태 : 화주가 이제 그 제주, 제주지.추기만 : 제주지. 그 동네에서 채택이 되서 했는데, 그 사이에 부정이 있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했는데, 벌을 받아 가지고 이제, 돌아갔어요, 그 양반도.조사자 : 뭐 사고로 돌아가셨나요?추기만 : 그냥 돌아갔어요. 아무 이상 없이 돌아 간거야.임정태 : 그러니까 미신이 있다고도 볼 수 없고, 없다고도 볼 수 없고….추기만 : 그런데 우리가 지킬 것 지키고. 뭐 지켰다고 해서 무슨 큰 손해보는 거 없으믄 이렇게 허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난 그대로 칠십, 나이가 일흔 두 살인데, 그대로 그냥 좋은게 좋지 그러구서 허는 거야. 우리 여기 산신은 정말 영검해요, 정말 엄해요. 그것만은 틀림없어요. 벌을 받아요. 꼭 벌을 받아요. 난 미신 이런 것은 상관없어요, 난 상관없어요, 꼭 벌을 받드라고.

본격적인 산치성은 시월 초하루 날 당집 제상에 제수용품을 정리하고 조라술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 뒤쪽에 있는 소나무 곁에 주저리를 틀어서 쌀과 엿기름 등을 넣은 조라술을 담가 제주로 쓴다. 이렇게 조라술을 만드는 것은 역시 모셔지는 신이 ‘산할머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월 초이튿날이 되면 제의에 올려질 숫소와 수퇘지를 삶고, 제상에 올릴 여러 제물들을 준비한다. 제상에 올려지는 제물들은 북어?대구포?소 산적?소간?소 천엽?소 콩팥?대추?감?배?밤 등이며, 제상 앞에는 시루떡?백설기 등을 놓는다. 그리고 제상 오른쪽에는 우족?우갈비, 검게 그을린 소머리와 돼지머리 등이 차려진다. 제물 차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21목’이라 불리는 것이다. 치성을 드리는 동안 잡귀가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당집 밖 오른쪽에 따로 제상을 차리는 데, 이를 ‘21목’이라 부른다. 떡 한 쪽, 밤과 대추 각각 한 알, 각각 7쪽을 나눈 배 3개, 각각 7쪽으로 나눈 북어 3마리 등을 가로 7줄, 세로 3줄로 배열하여 21목을 만들어 차려놓는 것이다. 이는 산할머니를 따라온 잡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틀간에 거처 온 정성으로 조심스럽게 마련된 제물들을 놓고, 음력 시월 초이튿날 밤 11시경에 치성이 시작된다. 치성 절차는 축을 읽은 후에 세 명의 화주가 절을 하고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지는 세 명의 화주, 영좌, 통장 등의 순으로 올린다. 이렇게 지내는 것을 ‘밤제사’라고 부른다.
이 밤제사가 끝나면, 당에 올라간 사람들은 미리 끓여놓은 탕국을 먹으면서 함께 음복을 한다. 시월 초사흘 날 아침이 되면 파제사(罷祭祀)를 지내고, 화주, 영좌, 통장 등은 제의에 올렸던 제물을 똑같이 나누어 집집마다 돌린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 다시 화주들이 당에 을라가 3개의 노구메를 지어 당에 올리는 ‘노구메 정성’을 지내고는 산치성을 마무리한다.

□ 제보자

  • 임정태(사노동 안말, 1930년 생, 남)
  • 추기만(사노동 안말, 1929년 생, 남)
  • 이덕만(사노동 안말, 1933년 생, 여)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3일~10월 4일

□ 참고문헌 : 한철수, 「사노동 산신제」, 『구리문화』 2호,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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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언재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 제명

산치성, 산제

2) 당명 및 형태

산할머니

3) 신격 및 신체

마을 뒷산의 바위

4) 제일

음력 10월 3일 밤 11시에서 12시 사이

5) 제주

언재마을 안에서 부정이 없고 정갈한 두 집을 선택하여 제의를 주관하게 한다. 이때 두 집의 여자들은 월경이 없어야 하고, 제의 지내기까지 비린내 나는 것을 먹어도 안된다.

6) 제비

동네 공동경비. 한 해 평균 20만원에서 3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7) 제물

밥, 밤, 대추

8) 제차

산치성을 지내는 산 위에 올라가 밥을 짓고 제물을 진설한 후 시작된다. 마을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각 집의 세대주 이름을 적은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의 평안, 각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제의가 끝나면 제의에 사용했던 제물을 마을 사람들이 전부 함께 나눠 먹는다.

10 언재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언재마을 산치성 증언채록

사노동 안말에서 산치성을 조사하다가 이웃에 있는 언제마을의 경우 독립적으로 산치성을 지낸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 제보를 근거로 하여 언재마을 경로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경로당에 계신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산치성을 지낸다는 것을 인정을 했지만, 그 장소를 좀처럼 알려주지 않았다. ‘거기 마음대로 못 올러가, 못 올러가. 거기서 낭구 하나 못 꺾어’라며 산치성의 대체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장소마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조사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겨우 어르신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난 후에야 마을 산치성 실무일을 맡아보고 있는 통장 함경환 씨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통장 함경환 씨가 알려준 산치성 장소는 마을 뒷산 정상에 있는 바위였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산할머니’라고 부르면서 모시고 있다. 최근에 불이 나서 주변의 나무가 온통 검게 그을려 있었고, 바위 둘레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함경환 : 그래 가지고 철조망도 없었어요. 이렇게 돌 있었고 없었는데 그게 그거 헌지가 한오 년, 오 년 됐지. 거기 올라가 가지고 오줌도 마음대로 못 누게 허고, 거 제지를 많이 했지,

이 산할머니를 위하는 마을 공동의 제의는 이웃 사노동 안말, 두레물골, 양지말 공동의 산치성 바로 다음에 벌어진다.

함경환 : 우리가 초 사흘날 지내거든, 살일날, 음력 시월 삼일날. 시월 삼일 날 우리가 지낸다고.

원래 언재마을도 사노동의 다른 마을과 함께 산치성을 지냈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웃의 안말, 두레물골, 양지말 등과 함께 공동으로 산치성을 지내오다가, 해방되기 바로 직전부터 따로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제보자 함경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경환 : 거기서(조사자 주 :사노동 산치성 지내는 당집) 한데 지냈었는데, 여기 사노리가 네 동네거든 동네가. 네 동네가 한데 어울려 가지고 같이 다 비용을 같이 들여 가지고 지냈었거든. 그런데 여기가 인제 우리도 산을 등지고 있으니까, 우리도 뒤에 할머니산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지내야 된다. 그래 가지고 노인네들이 그래가지고 지내게 된 거지.조사자 : 그게 한 몇 년전부터 그렇게 지내게 된거죠?함경환:이게 우리 어려서부터 계속 지냈으니까뭐, 오육십 년 이상봐야지. 별다른 건, 우리도 자세한 건 몰라 여태까지 노인네들이 해와오셨던 거니까.

언재마을의 공동제의는 ‘산치성’ 또는 ‘산제’라 불리는데, 부정이 없고 정갈한 두 집을 뽑아 제의를 주관하게 한다.

함경환 : 여자가 우선 새벽, 두 가족이 지내는 데, 여자가 부정이 있어도 안 되고, 그러니까 멘스 같은 거 허면 안 되고, 그거 지내기 전에 보름, 보통 보름 전에서부터 이런 비린내 나는 거 절대 먹지 말아야 되고, 그런 부정 안 낀 사람이 지내지. 우리가 여기서 저거 허는 건. 보름전에 이제 동네 사람들 알려 가지고, 지낼 수 있는, 내정성이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허는 거니까, 그걸 인제 부정 있는 사람 제해놓고, 두 집을 정해가지고, 보름 전서부터 좌우간 비린 거 손 안 대고, 그런 사람들이 지내지.

산치성에 올려지는 제물들은 다른 곳에 비해 간단하다. 밥?밤?대추 등만을 올리고 따로 소나 돼지를 잡거나 하지는 않는다.

함경환 : 음식은 인제 떡하고, 밥, 안제 거기 올라가서 밥허고조사자 : 노구메 짓는 거?함경환 : 그렇지. 그래 가지고 지내는 거지. 밤, 대추, 고런 거 간단하게.조사자 : 뭐 돼지머리나 그런 건 안올리고요?함경환 : 응. 안올리고. 할머니니까. 저기서(조사자 주 안말에서) 인제 소 잡고 그러거든. 그래 우리는 그런 걸 안 허고, 인제 밥만 거기서 정성껏 해 가지고, 동네가 인제 예를 들어서 오십 호다 해믄, 다 그 그냥 불을 데린다고, 오십 호. 동네 전체를 위해서 허는 거니까. 그래 가지고 인제 내 정성도 있지만 동네를 위해서 거 인제 두가족이 올라가서, 초저녁 벌써 올라가 가지고 그냥 거기 약수물 터도 있거든.조사자 : 약수물이 있어요?함경환 : 약수물이 있는데, 지금 거기 우수가 들어가고 그래 가지고 관리들을 잘 못해 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물 떠 가지고 거기서 밥 지어서 그러구 올리거든. 그거 뭐 별다른 건 없어. 큰 산에서, 안말 거기서 하니까, 고 다음날 우리가 이 동네에서….

산치성은 음력 시원 초사흠 밤 열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에 지낸다. 예전에는 열두 시 넘어서 꼭 했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좀 앞당겨 졌다고 한다. 산치성을 지내는 산할머니 바위에는 제의를 지낼 두 집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부정이 없는 정갈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함경환 : 다른 사람도 올라가는데, 이제 부정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따라 올라가지. 올라가서 허는데, 근데 두 가족이 인제 제 지내는 거는 두 가족이 허지.

산치성은 산 위에서 밥을 짓고 제물을 차려 놓은 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제의는 마을토박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각 집의 세대주 이름을 적은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의 평안, 각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함경환 : 인제 그 전에는 집집마다 해가지고, 고 거를 죄 일일이 고 다음날, 제 지내고 나오잖아. 그런걸 다 일일이 다 노놔 드렸다고. 떡도 많이 해 가지고 집집마다 다 노놔드렸어. 근데 지금은 그렇게 허지 않고, 동네 자금이 있으니까, 동네 자금으로 다 해가지고, 그냥 인제 지내고 내려오면은 노인정으로 인제 지내고 내려온다. 그래 인제 거기서들 모여있는 분들, 그 분들이 거기서 인제 잡숫고 그러는 거지. 그래 그날은 산제 지나는 날은, 노인정으로 동네분들이 많이 모이지.

함경환 씨에 의하면 현재 마을 제의를 치르는데 드는 비용은 대략 이삼십 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이 비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현재의 제의는 아주 간단하게 치러지고 있다. 함경환씨는 마을 산치성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던 영좌 어른도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있고, 마을 사람들도 예전만큼 산치성에 열성적이지 않다는 게, 언재마을 산치성의 현재 상황이라고 한다.

함경환 : 내가 이 일을 본지가 삼 년, 삼 년 됐는데, 그러게 그 전 모양 열성으로 할라고 들지를 않아요. 그러니 일 보는 사람들이 좀 애로가 많지. 협조들을 많이 해야 되는데‥

□ 제보자

  • 언재마을 경로당 할아버지, 할머니들
  • 함경환(사노동 언재마을, 1948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4일

10 언재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사노동 안말 산치성 증언채록
박현익 : 박씨의 원 처음에야 물론 같은 거 아니겠수? 밀양. 근데 인제 열루 아마 어떤 분이 영월로 가서 저거 해가지구 모르니까여 영월이라구 해가지구 시방 영월 박씨예요, 여기는.조사자 : 영월 박씨세요? 그러면 할아버님 부모님도 여기신가요?박현익 : 아 그럼, 다 돌아가셨는데 여기서 아예 태생들이라구 이 동네 시조부터.조사자 : 그럼 토박이시군요. 혹시 지금 하시는 일은?박현익 : 나는 나는 무직이지 뭐. 놀지 뭐 나이가 있으니까.조사자 : 농사 지으셨어요?박현익 : 아유 ~ 농사짓죠.조사자 : 사노동이란 마을이 지금 구리시에 사노동이 속해 있는거잖아요.박현익 : 그렇죠 구리시죠.조사자 : 사노동에 마을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정착하게 됐는지 이 사노동이란 마을이맨처음 누가 들어와서 어떤 분이….박현익 : 구리시 전체로는 잘 모르지. 사노리 얘기만 저어 하는 거지? 사노리…. 여기가 사노리야. 구리시 사노동. 늙을 노자 넉사자. 원은 동구동인데, 시방 동구동으로 되어 있어요 여어가. 시에서는 근데 이제 여기가 크니까 사노동이라고도 그러고 사노리라고도 하는데 ….추기만 : 그거는 지금 얘기고 옛날 조상들은 옛날을 물어 보는거니까.조사자 : 맨 처음에 사노리였다는 거예요?박현익 : 그치 사노리.추기만 : 처음에 사노리야 사노리.조사자 : 그럼, 사노리라고 한 게 네 명의 노인이라고 한거잖아요. 그 얘기 좀 해주세요.박현익 : 그래서요, 안말, 건너말, 양지말, 언제말 이래서 사노린데 사 자가 들어가잖우? 네 동네에 노인 하나씩이 살았다 이거야 그래서 사노리야 노자가 들어가는데, 이제 이 동네는 박씨, 또 저 건너말, 건너말 여기는 차씨, 또 양지편엔 주씨, 건너 마을 있어요 여기가 네 동네거든 언제말은 엄씨, 이렇게 살아가지고 네 동네에 사성이 살아가지고 그래서 사노리라고 이름하는 거야조사자 : 그분들의 특징이라든가, 왜 그 노인분들로 했어요?추기만 : 그분들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봤을 적에 이 동구릉 건원릉 저 지금 태조대왕 이성계. 그분이 장사 그땐 인산이라 그랬는데, 장사지낼 적에 그 분들이 기술자로 오셨대요.조사자 : 아 그 네 분이요?추기만 : 동구릉 전체에 왔다가 이 사노리로 정착을 한거야 네 분들이.박현익 : 근데 다른 성은 몰라도 우리 박씨는 이 저 인조, 그 때에 이 양반이 무관이였었거든. 그래서 그 앞에서 일을 하다가 결국 인제 부상, 그치 그 내용은 없어 부상을 당한 건지 몸이 아픈 건지 몰라도 돌아가시게 되니까 여기다 했어요. 선산, 그 산이있거던. 그래서 그 양반이 우리 박씨는 그런거고 다른 집안은 어떻게 되서 여기정착하게 됐는지 그건 나도 몰라.추기만 : 기술자로도 오고 장구로도 오고 뭐 그렇게.조사자 : 장구, 기술자, 뭐 이런식… 일로 오다가 여기에 정착하게 된거군요.박현익 : 사노리라고 할 때는 일정시대지? 일정시대하고 그때 리로 있을 때 면으로 있을때 사노리 무신리 무신리 그때 인제 언제말이라는건 그때 리안에 부락이 또 떨어져 있이니까, 그 안에서 이름을 진거지. 이제 뭐 언제말, 무시 양지말, 여긴 응달말이라니까 응달이지지 않았우? 저쪽은 인제 양지니까 양지말, 그래갔고 이제 짓기 쉽게 그 분들이 지어놓은 거지.조사자 : 안말이잘아요 이 안말이란 이름은 박씨분이 왜 안말이라고 했는지?추기만 : 안동네.조사자 : 아 이게 사노동에서 안쪽으로 있어서 안말…. 그럼 건너말은?추기만 : 건너말은 저쪽 건너 동네, 그냥 부르기 쉽게 고유명칭이야 그건.박현익 : 옛날 노인들이 지은 거지.조사자 : 그럼 언제말은요?추기만 : 언제말은 해가 넘어가는 쪽을 보고 있다고 해서 언제마을.조사자 : 언제라는 뜻을 저희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 언제라는 뜻이요.박현익 : 우리도 확실히는 내말을 몰라 왜 언제라고 지었는지.추기만 : 행정적으로 부르는 건 언제말이 아니야. 지금도 여기 토백이들이 많이 살어.박현익 : 여기 교회가 들어와두 본토백이들은 하나 교회 믿는 사람 없어, 절에는 댕길망정 교회 있어두.조사자 : 교회가 들어온지 얼마나 됐어요?박현익 : 들어온지가 한 90년? 다른 데서 온 사람이나 거길 댕기지 본토백이들은 안댕겨요.조사자 : 그러면 인조 때 얘기하시는거 보니까 역사적으로 이 마을이 생긴게 사노리라고 불렸던 그 때가 어느 정도?추기만 : 350년 전이야.조사자 : 350년?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하세요?추기만 : 그분들이 그 역사가 남아 있었는데 없어졌대니까. 그 네 노인네들이 들어와서 이동네를 개척한지가 350년 됐다‥‥조사자 : 그러면 350년전 네 분의 할아버님들을 기리기 위해서 비를 세워논 거라든가 뭐 그런 건 있어요?추기만 : 그거는 개인적으로.조사자 : 조상이잖아요? 박씨분 여기 그 안말의 조상이, 그러면 그런 게 제사 지내고 그래요?추기만 : 암. 그렇지.조사자 : 여기 맨 처음 정착하신 분의 이름은?박현익 : 박득룡이예요.조사자 : 박덕룡이예요?박현익 : 득룡이예요 득룡.조사자 : 이 선조님한테 제사를 별도로 지내요?박현익 : 별도로 그런 건 지내지 않아요.조사자 : 그럼 추씨는 선조님이 누군지 아세요?추기만 : 우리 추씨?조사자 : 양지말에 자리잡았던….추기만 : 주씨?박현익 : 지금 몰라, 다른 동네는 몰라.추기만 : 여기 나만갑이 묘지도 있어 나만갑.조사자 : 이분은 어떤 분인데요?추기만 : 나웅배 씨 조상이야. 나웅배. 저 저거 재무부장관 하던. 아주 저것도 잘 해놨어요. 비두 세워놓고 저 조상이 가보니까.박현익 : 작년인가 국보로 안있다가 한삼년 됐나봐, 국보로 지정해가지구 새로 고처놨다구.조사자 : 무슨 마을에 있어요?박현익 : 저 건너말.조사자 : 나만갑 선조님 무슨 별도로 하신 일이 있는 건 아니지요?추기만 : 정승판서야 그 양반이,조사자 : 여기 마을 네 개가 있는데, 지형적으로 뭐 특색이나, 어떤 뭐 양지마을은 햇빛이잘 들어서 양지말이라 그러셨잖아요. 지형이 뭐 용의 모양이다, 토끼 모양이다 이런 모양이 있나요? 이 마을에?박현익 : 글쎄, 그런거는 … 별다른 뭐 저걸 모르겠는데. 무신 모냥으로 해가지고 이름짓고 뭐뭐 … 그냥 옛날 사람들이니까 여 응달말이니까 여 응달말이라고, 안말이라고 이 안에 있다고 해서 안말이라고, 건너말 저 양지말 짓지. 무신 어디 뭐 땅 혈기를 봐가지고 이름을 짓는다거나 뭐 그런 거까지는…. 그런 거 아마 짓지도 않았을꺼야. 그런 거 짓데문….추기만 : 아냐, 그렇게 짓을지도 몰라. 우리가 몰라.박현익 : 우리가 모를지도 모르지 그런 내력을 몰라 우리가 80년을 살아도. 그리고 이 양반이나 우리나 어려서부터 서울가 살다 나왔거든.조사자 : 그러면 여기 산이 무슨 형국이다 이런 거 있잖아요. 산이나 마을 지형이나 그런거요.박현익 : 이 뒤가 바로 두가 동구릉 아니야 동구릉. 이성계 능 그거지 뭐. 여기 무신산이다, 무신산이다 그런 거 우린 잘 몰라 그런거.조사자 : 산치성이 뭐하는 것인데요?박현익 : 동네를 우해서 제사 지내지 않아? 산제도 지내고. 옛날엔 굿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치성만 드리고.조사자 : 근데 여기 장승이 없다고, 다른 마을엔 다 장승이 있는데.박현익 : 이 동넨 장승 없어.조사자 : 옛날엔 있었죠?박현익 : 옛날에도 없었어.조사자 : 할아버지 어렀을 적에도 없었어요?박현익 : 장승이란 그 미신을 지키는 사람들 아녀? 그 장군이라 해가지구 그 귀신 같은 거 못들어오게 막는단 말이야. 여기는 그런 미신을 지키지 않아요.조사자 : 여기가 동구릉….박현익 : 동구릉이 그저 이성계 능이지 뭐. 능이 그저 아홉 능이었었거든 아홉 능이었었는데 두 능을 패갔기 때문에 동칠릉이였어요. 또 그래가지고 도로 동구릉이 됐다고, 두 능이 또 들어와서. 근데 시방 저 아렛거 캐갔는지 … 동쪽을 향하고 능이 아흡이라 그래서 동구릉이야.추기만 : 작년 가을에 산치성 지내는데 시월달이면 지내거든. 그런데 그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제사지내는 과정을 찍어 갔다구.조사자 : 전통이 오래됐나봐요? 산치성 지낸지….추기만 : 아 그럼, 오래됐지 한참 됐는데.조사자 : 장승이 있었는데 없어겼다 그러더라구요.박현익 : 아니에요. 우리 그 선대는 몰라도 내가 팔십 먹어도 우리 선대한테도 그 소리는못 들었다구.추기만 : 우리가 못 본거지. 저 축동까진 있었거던 축동. 동네 울타리식으로 동네 마을 울타리식으로 큰 소나무들 많았었잖아.조사자 : 축동이 어딘지 좀….박현익 : 여기 배밭 있지? 배밭 끝으머리가 축동이라고. 저 아래서 이쪽 우위까지가 소낭구가 쭈욱 있었는데, 그래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개인식으로 치면 울타리나 마찬가지야. 울타리나.추기만 : 동네 위에서 울타리야조사자 : 축동은 왜 축동인가요?박현익 : 글쎄. 그 축동이란 게 왜 축동으로 지었는지 그건 몰라요. 축동이라고 쓴 걸 갖다가 한문으로 써왔으면 그 이미가 나오거든 어디서 마을 울타리식이지 뭐.조사자 : 그러면 이 사노리 박씨, 차씨, 주씨, 엄씨 이 분들 본관은 어떻게 되나요?박현익 : 영월 엄씨 그래서 엄씨허고 우리 박씨허고 결혼을 안 시킨단 말이 있었어요. 예전에 한 저거라고.조사자 : 그럼, 차씨는요?박현익 : 차씨네는 무손했어. 아주 없어겼어. 아주.추기만 : 근데 본을 몰라.박현익 : 모르지 그야 뭐.조사자 : 추씨는요?추기만 : 주씨가 어디 주씨라고 내 들었는데 잊어버렸어.조사자 : 할아버님도 추씨잖아요?추기만 : 아이 그건 난 추씨고 가을 추.박현익 : 주, 구슬 주자라고.조사자 : 본은 모르시구요?박현익 : 모르지 뭐. 저쪽 동네니까. 뭐.조사자 : 그러면 마을별로 지금 현재 안말엔 박씨가 많고, 건너말에는 차씨가 많구. 그렇게?박현익 : 아냐, 차씨는 무손했다고.추기만 : 또 언제말 엄씨는 엄씨도 이 엄씨가 여기로 건너와 살아. 안말.박현익 : 그리고 그 동네두 시방 한집 있나? 엄씨가 없구나.추기만 : 무손됐어.조사자 : 그럼 주씨하고 박씨만….추기만 : 아주 주씨는 양지말 판이구, 여긴 또 박씨네가 많구 그래.조사자 : 그러면 지금도 언제말하고 건너말에 어떤 성씨들이 살아요?추기만 : 거기 주씨가 있고.박현익 : 건너말엔 아마 추, 김가가 좀 많을 거구.조사자 : 할아버님 추씨잖아요. 추씨도 여기 많아요?추기만 : 여기도 많고 거기도 많구.조사자 : 추씨는 언제부터 들어와서 여기에?박현익 : 그건 모르지.조사자 : 그래도 추씨가 많은거, 이 마을에 추씨가 많다고 들었거든요.추기만 : 그러니까 얼루 이사를 안 갔지. 이사를 안 가고 여기서 많이 뺑뺑들이 살았지.박현익 : 그거는 이제 어느대 어느대에서 인제 얼마나 아들을 많이 낳느냐. 그 빈선에 달린 거지.조사자 : 지금도 그러면 옛날 조상들이 살던 그 성씨들이 많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 새로 들어오신 거 잖아요. 나중에 맨처음 사노리 이외에.추기만 : 추써가 그때 당시 바로 들어왔어. 그때 당시에.박현익 : 그치만 그분들만 퍼져 있고 박씨도 그렇고 다 전멸했지. 다른 데서 들어온 사람은 없다고.조사자 : 지금 추씨말고 또 많이 있는 성씨가 있나요?추기만 : 임씨.조사자 : 임씨는 또 어떻게 맡게됐는지 혹시 아세요?박현익 : 그 후에 다 들어온 사람들이라니깐 모르지 게야 뭐. 김씨도 좀 있지. 김씨.조사자 : 김씨 본관은 어떻게?박현익 : 임씨가 나주 임씨조사자 : 추씨는 무슨 추씨죠? 본관이?박현익 : 추가 시방 원은 밀양인데, 밀양 춘데 잠깐만 밀양 추라 그래? 뭐라 그래?박현익 : 원은 그 말이 왜 나오는고 하니 원은 밀양 추씬데 똑똑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어? 그러니까 자기네가 추계 추니까 추계추로 허자. 몇 사람이 그래가지고 헌 사람이 있는데, 언은 여기가 추계 추라구.조사자 : 여기서 어려서부터 사셨다 그러니까 이 마을만의 특징적인 민속놀이 같은 게 있어요?박현익 : 옛날엔 많이 했지, 옛날엔 많이 했는데 … 여름이면 놀이도 허구 아까두 여기 산제 지낸다 그러지 않았어? 그 때문에 굿도 크게 소 잡아 가지구 허구 그랬는데, 시방 사람들은 모두 약지 않아? 그러구 젊은 애들은 전부 나가잖아. 취직해가지구 시방 지금 특수하게 뭐 저거 하는 게 없다구.조사자 : 여기 토백이세요?주순범 : 본토백이지.조사자 : 그럼 여기서 계속 사신거예요? 처음부터 여기 양지말에서요? 그러시겠네요. 주씨시니까. 주씨 본관은 어떻게 되세요?주순범 : 신한(안) 주씨야. 신한(안) 주씨,조사자 : 지금 몇 해 째 사시는 거예요?주순범 : 오라지. 여기 배포헐 때부터 처음부터 주씨가 살았는데.조사자 : 배포할 때요? 배포….주순범 : 여기 양지마을에 한 집이 살았거든. 주씨가 사방 … 사하리에 한 집씩 살았대서사노리라고 지었데는 거야.조사자 : 맨 처음 주씨 살았던 집이요, 어떤 집이었대요?주순범 : 거 뭐….조사자 : 그 분이 어떤 일 하시던 분인데요? 주영제 씨예요? 그러면?주순범 : 몰르지. 오래 돌아간 분을 어떻게….조사자 : 그 분이 어떤 일을 하셨던 분인지 모르시구요?주순범 : 모르지.조사자 : 이 마을에요, 옛날에 전통적인 민속놀이 같은 게 있었나요? 뭐 지기 놀이라든가, 줄다리기라든가, 다리밟기라든가….주순범 : 없었어요. 그전에 모내기 할 때는 저기 동네서 매야가지고 농악 허구 그랬었는데 시방은 안해.조사자 : 언제까지 하셨어요?주순범 : 그저 오라지 뭐 헌기야.조사자 : 그럼 여기 풍물패 같은 게 있었나 보네요. 두레패나 풍물패 같은….주순범 : 있었지. 처음엔 있었는데, 시방은 없어. 농사들도 여긴 안져.조사자 : 그럼, 여기서 제사 지내는 건 있어요? 마을에서?주순범 : 사노리에서 여기 삼 개 부락에서 저어 산치성 드려.조사자 : 네 개 마을이 아니라 삼 개 마을에서 산치성을 드려요?주순범 : 저 건너 동네서도 허다가 건너 동네는 별도로 허구.조사자 : 그러면 언제말 말씀하시는 거예요?주순범 : 별도로 하구, 삼개부락이.조사자 : 그럼 여기서 양지말하구 두루목골하고 안말….주순범 : 두루목골허구 안말사람들이 무루목골이라고 안하고 건너말이라구, 건너말이라고 허지 또….조사자 : 두루목골은 왜 두루목골이라 그래요?주순범 : 모르지 뭐.조사자 : 이 세 개 마을에서 산치성을 드린다는 거죠 그쵸? 산치성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모르시죠?주순범 : 동짓달 며칠이지 아마 … 음력.조사자 : 시월에 1년에 한 번 지내시나요?주순범 : 1년에 한 번씩.조사자 : 세 개 마을이 어떻게 누가 주관해요? 세 개 마을 이장님들이 각각….주순범 : 여기 다 각각이지. 이제.조사자 : 아, 그러니까 여기 마을의 이장님하고 안말의 이장님하구 셋이서 제사를 같이 지내시나요? 아니면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있을거 아니예요?주순범 : 동장들이 다 주관하지. 각 마을마다 통장, 영자, 통장 다 그 사람들이 책임진 사람들이 가서 다.조사자 : 거기 필요한 돈 같은 건 어떻게요?주순범 : 마을에서 개인이 돈 내서.조사자 : 다 개개인 별로 돈을 내요?주순범 : 어.조사자 : 그럼 할아버님도 돈을 내세요? 매년?주순범 : 그렇지.조사자 : 걷는 돈은 똑같애요?주순범 : 다 똑같이.조사자 : 얼마씩?주순범 : 소 잡고 돼지 잡고….조사자 : 소도 잡고 돼지도 잡아요?주순범 : 응.조사자 : 얼마씩 걷어요?주순범 : 삼 만원씩. 삼 만원 넘을 적도 있구 그래.조사자 : 또 무슨 음식을 하지요?주순범 : 떡두 하구 여러 가지 하지 … 과일하구.조사자 : 특별히 하는 음식은 없나요? 여기서 잘 나는 음식 같은 거 있잖아요? 특산품 같은 거.주순범 : 특산품? 뭐 여기 배 고장이지 뭐. 과수원, 여기 과수원이 많구.조사자 : 그럼 제사지낼 때 모든 여자들도 다 같이 제사를 지내요?주순범 : 산치성 지낼 때? 남자들만 가.조사자 : 그럼 음식도 여자들이 안 만지고 다 남자들이 만져요?주순범 : 그건 여기서 해서 저 남자들이 가지고 올라가는 거지, 이제. 여자들이 다 해서,조사자 : 음식을 만드는 집이 따로 있어요?주순범 : 그건 이제 부정 안 타는 집에 가서 하지. 그것도 그럼 매년마다 시를 보고 때를 봐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 집을. 이 고을에서도 초상이 나면 거길 못 올라가요. 또.조사자 : 이 동네에서 초상이 한 집이 나면 전부다 마을 사람들이 못 올라가구요? 또 금기사항이 또 있나요?주순범 : 없어. 시 잡을 땐 개 같은 거 못 잡지 닭 같은 거.조사자 : 닭두 못 잡어요?주순범 : 응, 날 받아가지구.조사자 : 날은 언제쯤 받아요?주순범 : 거 동지달 한 이십일게 되면은 제사 지내는 한 삼사일부터.조사자 : 삼사일 전부터요?주순범 : 거 치성날 잡아두면 못 잡는거야.조사자 : 치성지내는, 산치성 지내는 날짜가 매년 똑같애요?주순범 : 매년 똑같지.조사자 : 매년 음력 시월 며칠이에요?주순범 : 그게 아마 시월 그믐껜지 그럴꺼야.조사자 : 그러면요 제사지낼 때 동네 남자들이 다 올라가는 겁니까?주순범 : 아니지. 올라가는 사람은 책임지는 사람만 올라가지.조사자 : 그러면 남은 음식 같은 건 어떻게?주순범 : 음식은 이제 제사 끝내면은 다 집집마다 돌리지. 이제 주관했던 사람들이 자기 마을로 가져와가지구조사자 : 다 같이 놀진 않구요?주순범 : 응. 안 놀아.조사자 : 집에만 싸다주는 거예요?주순범 : 치성만 드리는거야. 제사만 지내가지구.조사자 : 그리구 술 같은거 따로 만들지 않나요?주순범 : 소주 먹구 막걸리 먹구.조사자 : 그리구 이 마을에요. 장승 같은 거 없어요? 장승?주순범 : 없어.조사자 : 옛날엔 있었죠?주순범 : 옛날에 여기 없었어.조사자 : 장승이나 서낭목 같은 거….주순범 : 서낭? 없었어.조사자 : 옛날에 산신당 같은 것도 없었어요? 산신당?주순범 : 없어요.조사자 : 여기 축동이라고, 앞에 길에 보면 축동이라고 소나무를 주욱 심어놨었다고 그러는데 혹시 아세요?주순범 : 저 언제말에 그전에 소나무 심구 그랬어요. 근데 시방 지금 다 캐버리고 집을 다 지었어.조사자 : 거기도 소나무를 쭈욱 심어놨던 이유가 뭐죠?주순범 : 그전에 나무를 배나무 안 심을 적에 거기 저 캐고 배나무 심지 않았어. 배나무 심었다가 파니까는 집들 진거지 뭐.조사자 : 그리구요. 여기는 지금 산치성 하나만 지내고 있잖아요. 산치성 말구 별도로 제사같은 거 지내는 건 없나요?주순범 : 없어. 지내는 건 없어.조사자 : 뭐 조상들 제사만 지내고 다른 신들 가택신 같은 거 있잖아요? 집안에 뱀신을 모신다거나 아니면 용신을 모신다던가 그런 뭐….주순범 : 없어요.조사자 : 두레목골이 왜 두레목골이예요?최현익 : 옛날 선조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고 그래서 두레목골인데, 그 우물 자리가 세 군데 있어요. 요기 쓰레기 태운자리 있죠? 거기하구 또 저 올라가다 보면 조선기와집이 있는데, 그리구 마을 끝에 김광배 씨 집 앞….조사자 : 이 사노동이요, 토백이 분들이 많더라구요.최현익 : 많죠.조사자 : 근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최현익 : 여기 말고도 시골가면은 토백이 많은데….조사자 : 그래도 여기는 유별난 것 같아서요. 다들 이사가거나 그러시잖아요?최현익 : 아마도 여기가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서 그럴꺼예요. 그린벨트에 묶여 있다보니까 땅값이 싸고 그러니까 팔지도 못하고…. 예전에는 많이들 팔고 떠났죠.조사자 : 아, 그래서 그렇군요. 그래서 여기 교회가 있어도 토백이 분들은 교회에 많이 안나가신다고 그러더라구요?최현익 : 아, 안식교회? 그쵸, 토박이는 한 5~6명 나가나?조사자 : 그 이유가 산치성 드리고 그러는 것 때문인가요?최현익 : 아마도 그렇겠죠?조사자 : 그런데 저희가 다른 분들께도 여쭤봤는데, 그 산치성 주관하시는 분 중에 영자가 뭐예요?최현익 : 영자란 길 동네 노인분들 중에서 행정적인 일을 떠나서 마을 일을 하시는 분인데 동네에서 추천해서 하는 거예요조사자 : 저, 그리고 이 동네에는 민속놀이가 없나요?최현익 : 음 … 다른 특별한 건 없고, 이것도 민속놀인가? 요기 지끔 대로 있는데 사거리 나가는 길 있거덩. 여기서 한 오백미터 정도 가면 개울이 있어요. 개울이.조사자 : 여기서 뭐하고 노셨어요? 뭐하고….최현익 : 지금은 수영이지만 옛날엔 헤엄치고 놀았죠.조사자 : 특별한 때가 아니라 여름에 그냥 여름에 가면?최현익 : 그렇지.조사자 : 특별히 민속놀이 같은 건 없었어요?최현익 : 여기서 민속놀이는 민속놀이라고는 할 순 없고 여름이면 왕숙천 대동놀이 같은 것 해가지고.조사자 : 대동놀이라고요? 언제쯤 하는거예요? 여름 언제….최현익 : 여름인데, 복 때.조사자 : 복 때요? 초복, 말복, 중복이 있는데….최현익 : 대개 중복 전후해서….조사자 : 어떻게 놀아요?최현익 : 그거는 그냥 일종의 물놀이지. 이 뭐 호적이니 피리니 이 뭐 장구니 이런 거 막 두들기면서 갈 적에 신나게 춤추구 남녀노소 다 마을 사람들이 다.조사자 : 보통 때에도 남녀노소 다 같이 노는 거 아닌가요?최현익 : 글쎄 그 때는 그랬어. 요즘에는 대개 연령별로 많이 놀러다니잖아?조사자 : 정기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꼭? 큰 행사였겠네요. 네 마을이 다 같이?최현익 : 아니 아니. 요기 부락별로, 네 개 마을이 부락별로.조사자 : 부락별로 왕숙천에 서 놀았다구요? 왕숙천은 하난데 네 개 마을이 중복 전후로 같이 모이는 게 아니구요?최현익 : 날짜는 틀린 거지?조사자 : 그러면 그때 노는 이유가?최현익 : 요즘말로 하면 스트레스 해소. 쉬는 거죠, 쉬는 거야.조사자 : 그 날은 일을 안하고?최현익 : 유일하게 쌀밥먹는 날이구.조사자 : 어렸을 때 배가 많지 않았었나요?최현익 : 그때는 배가 많지 않았어요. 물론 다른 고장 보담은 많았었어요. 왜냐면 여기 먹골배가 유명했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다른 고장 보담은 배나무가 있었지만 지금만큼 많진 않았어요.조사자 : 그래서 그 날은 쌀밥 먹는 날이요? 그리고요 이 마을은 장승 같은 거 있었어요? 장승이나 서낭목 같은 거?최현익 : 장승은 없고, 저기 산치성 지내는데 지금은 소나무가 다 죽어버렸는데.조사자 : 이 마을에 장승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최현익 : 장승은 없었구. 장승은 없었어요. 그리구 나만갑 선생의 묘라고, 고기 비석이 지금은 위치가 바뀌었지. 고 비석이 있었고.조사자 : 근데 나만갑선생님이 옛날에 높은 직책에 있었나 보죠?최현익 : 우의정, 우의정인지 좌의정인지.조사자 : 근데 왜 문화재로까지 지정이 됐죠? 경기도 문화재로….최현익 : 그게 꼭 벼슬자리보다도 비석이 옛날부터 있었어요. 비석이. 그 나만갑 선생에 대해서 쭉 내용이 나와 있는. 물론 그 사람도 그렇지만 그 비석이 그렇게….조사자 : 그리고 여기 축동이라고 들어보셨어요?최현익 : 예.조사자 : 축동이 뭔데요?최현익 : 우리도 어렸을 때 못 봤어 지금 안말 끝에 도로 거기를 축동밖이라 그러거든, 축동밖에.조사자 : 그러면 거기 밖에는 뭐 사람들이 없었다고….최현익 : 예. 거기를 축동밖이라 그랬는데, 그러니까 지금도 젊은 사람들은 잘 안부르지만 우리 또래만 해도 아직도 축동밖에라고 많이 써요.

□ 제보자

  • 박현익(80세, 남)
  • 추기만(73세, 남)
  • 주순범(72세, 남)
  • 최현익(두레목골 4통 2반, 1947년 생,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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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갈매동은 본래 양주군 노원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의 담터 전부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지역이 통합되어 갈매리라는 이름으로 구리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구리읍에 소속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갈매동이 되었다.
갈매동은 마을 주변의 산이 칡(葛)과 매화(梅)를 닯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갈매동 주변의 산(불암산, 테미산 등)이 풍수지리상 목마른 말이 화접리에 있는 샘말의 물을 먹는 형국인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형국인데, 이때의 ‘갈마’가 나중에 ‘갈매’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의 형성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전해진다.
담터마을은 마을의 북쪽과 서쪽을 둘러 싼 작은 야산들이 마치 마을을 담으로 둘러싼 듯 하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갈매1리와 2리의 도당굿에 대해서는 갈매동 도당굿 학술종합조사단에 의하여 이미 1996년에 「갈매동 도당굿」이란 제목으로 종합보고서가 간행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보고서에 이미 조사되었기에, 여기에서는 현재 도당굿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만을 채록하여 보충자료로 삼고자 한다.

1) 제명

담터마을 산치성, 산제

2) 당명 및 형태

당집, 굿터, 도당굿 굿터

3) 신격 및 신체

산할머니, 할머니신

4) 제일

음력 2월 초하루에 단골 만신이 부정을 풀고 준비를 시작하여, 3월 초하루 새벽에 제의의 날을 받는다. 산치성을 지내는 날은 일진에 따라 3월 1일 혹은 2일이나 3일로 정한다. 산치성 당일에 제를 올리고, 그 다음 날에 제의에 대한 총 결산과 앞으로의 일을 계획, 논의하는 것으로 제의를 끝낸다.

5) 제주

당주, 삼화주, 도가

6) 제비

마을 공동기금

7) 제물

모든 채소는 익히지 않고 날 것을 그냥 사용하며 쇠고기를 사용한다. 단 절대 돼지머리나 돼지고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8) 제차

음력 2월 초하루에 단골만신이 부정을 풀고, 대를 내려서 산치성 일을 볼 사람을 정한다. 이때 당주, 삼화주, 도가 등이 선출된다. 15일 경에 산치성에 쓸 홰를 만들 깨끗한 나무를 준비한다. 그믐께 다시 만신이 와서 부정을 풀고, 그 다음 날인 3월 초하루 새벽에 제의 날을 받는다.

11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 증언채록

갈매동 담터마을 산 2번지 66호 배나무 밭 앞에는 마을에서 ‘굿터’ 또는 ‘도당굿 굿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굿터의 넓이는 약 사오백 평 정도가 되는데, 당집과 ‘석수간’, 그리고 창고 건물 등이 있다.

김성선 : 도당굿 굿터라고 있어요. 거기나(갈매동) 여기나 풍습은 똑같은 데, 거기나 여기나 풍습인데. 에, 그 저희는 뭐냐하면 사변 후에 그 관리 소홀로다가 육이오 때 이렇게 폭격이, 이 마을에 폭격을 하는 바람에, 그 서류 절차가 없어졌어요. 그 사변전까지는 서류가 있었다고 그러는데요. 그 굿 채산 이렇게 하는 거, 연대 표시, 어떻게 내려온 전래 이런 게 있었는데.

담터마을 굿터는 옛날부터 산제를 지내던 땅이었으며, 현재는 마을 공동 재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원래 이 지역은 국유지였는데, 나라에서 땅을 불하하여 팔 적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입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 오랫 동안 마을 통장을 맡아온 김성선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성선 : 옛날에 산제 지내고 그러든 땅이 국유지였었는데, 국유림에서 5.16 나가지고, 박대통령이 동구릉 불하할 적에 저희도 부락 자체에서 산 거예요, 그거, 부락에서부락에서 사 가지고 그것은 어떤 부락 사람들이 쪼개 먹는 식으로 안하고, 옛날부터 굿터니까 이것은 살리자 해서, 그 이렇게 저 마을에 … 근데 인제 옛날에는 산에 이렇게 삐죽하고 그랬었는데, 삐죽하게 그러구 산제사 지낼 때 숲도 우거지고 그랬는데, 인제는 그 마을이 된다고, 거기가 마을이 되니까, 어떠한 그 산제 지낼만한 그러한 그, 그러한 그 위엄 무슨 … 거 산제 지낼 만한 소낭도 있고, 뭐 이렇게 참 귀신 나온다라고 이렇게 뭐냐하면 위압감이 있잖아. 그런 것이 없어, 지금은. 돌담도 있고 옛날엔 그랬잖아, 인제. 저희 부락에도 이렇게 뭐냐하믄, 몇 십년 묵은 나무가 있어 가지고 막 거기다 이렇게 울긋불긋한 천도 매달고, 돌도 있었고 인제 서낭이라고 비슷하게 그러는 게 있었는데, 요즘은 그 지역적인게 개발이 되다 보니까, 뭡니까, 그 위치적으로는 그래요. 갈매리 저 도촌 같은 데는 나무가, 노송이 우거지고 거 괜찮죠. 아무라도 봐도 그런 그런 거(조사자: 거기는 마을이 움푹들어간데 있어 가지고). 그리고 또 별도로 떨어져 있고. 근데 여기는 앞뜰에 집이 다 이렇게 층층이 들어서고 그렇게 됐어요.

굿터 안에 있는 당집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전에 있었던 당집이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되어서 새롭게 지은 것이다. 당집 앞에는 참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서낭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조사자가 조사를 할 당시, 참나무에는 흰 헝겊이 묶인 나뭇가지가 묶여 있었는데, 아마 대를 내린 나뭇가지 인 듯했다.
시멘트 건물에 청기와 지붕을 한 당집 안에는 마을 공동제의에 사용되는 제삿상, 병풍, 수저, 그릇, 촛대 등 일체의 물건들과 축문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결코 개인 집으로 가져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당집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금기는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이에 대해 마을 영좌 최용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용출 : 그건(산치성 축문) 우리 개인 집에 안 내려옵니다. 산에다 꼭 두고 써요. 또 산에서 쓰는 그릇도 일반 주민에게 안 내려오고, 그건 항상 언제나 그 산에다 보관하고 쓰고, 당집 안에다가 보관하고 있어요.

당집 오른쪽에는 ‘석수간’이라 불리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약 사 년 전에 지은 것인데, 마을 공동제의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고,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곳이라고 한다. 이로 보아 석수간은 잔치 때 음식을 만들기 위해 베푼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숙설간(熟設間)’의 와음으로 보인다.

김성선 : 우리가 비오면 다 거기서 먹고 잡숫든, 옛날에 석수간이라 그랬거든. 석수간은 뭐냐 하면은 제물을 차려 논 음식을 그런데서 배분해 주는 데라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거기서들 식사를 허고 그랬는데. 지금 뭐냐 하면은 짧은 시일 내에 끝이 나니까 석수간이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굿을 할려면 뭐가 필요해, 경제적인 게 필요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좀 뭐냐하면 우리가 그 참 한 달에 월세를 얼마씩 받고 세를 주고 있어. 세를 조금 줘서 임대료가 나오는 것을 가지고, 일 년에 꼬박꼬박 모아 가지고 고거를 우리가 어느 도움 안 받고 우리 부락 자체에서 제 지내는 비용을 충당한다 이 뜻이지.

담터마을에서는 이 굿터를 중심으로 해서 해마다 마을 공동제의가 벌어진다. 굿터와 굿터 앞 배나무 밭 끝자락에 있는 산치성터에서 벌어지는 마을 공동제의를, 마을 사람들은 산치성 또는 산제라고 부른다

김성선 : 부락과 안녕 뭐 모든 것을 위해서 산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정성을 드린다는 뜻이거든. 그래 인제 산치성이라고 인제 주로 많이 불르고, 인제 제를 잡수는 건 인제 산제라고 그러고, 산에서 지내니까. 고렇게 늘 해요. 우리는 어느 해든지 제는 한번도 빼논 예가 없어요. 제는 그냥 꼭 지내요. 굿은 인제 몇 년에,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하고.

산치성에서 모셔지는 신은 ‘산할머니’ 또는 ‘할머니신’이라 불리는 신격이다. 김성선 씨의 제보에 의하면, 이 신은 인근 갈매동 도촌마을의 할아버지 신과 어떤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선 : 그 저희가 알기에는 전래로 볼 것 같으며는, 갈매리 그 도촌마을에는 할아버지신을 모시고, 여기는 할머니신을 모신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신을 모신다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 그, 그래서 저희가 항상 그 뭐야, 어떤 땐 한 날 잡힐 때도 있고, 굿날이. 거기는(갈매동) 한 해 걸러서 하고, 저희 같은 경우에는 그 전에는 매년 했어요. 근데 지금도 산제사는 매년 지내요. 지내고, 이제 그 경비가 워낙 많이 들기 때문에, 굿 같은 거는 참 몇 년에 한 번씩 띄엄띄엄 해요. 도당굿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해요. 산제사는 매년 허고. 이월 달에 날을 잡아 가지고, 에 삼월 초로 주로 제 지내는 날이 나죠.

산치성에서 모셔지는 산할머니의 영검은 예전에는 대단했다고 한다. 산할머니의 영검의 대표적인 사례를 최용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용출 : 우리 대에 와서는 워낙 사람들이 인제 좀 시대가 자꾸 약아지니까, 따라서 주민도 약아졌지. 그래서 지금 현재에 산할머니의 영검은 근년에는 없고, 전자에는 영검이 많았죠. 다시 말하자면 산제물을 차릴 때, 절대 간을 못 봅니다, 절대적으로. 근데 인제 혹시 잊어버리고 간을 보다가 입이 이렇게 붓거나, 그런 예는 있죠. 인제 과거에, 간을 봤다가 입이 붓고 그런 예는 있죠. 요즘에는 일절 아주 정신들을 차리기 때문에 간을 보거나 그런 예는 전혀 없죠. 그리고 꼭 목욕재배(계) 철저히, 산에 올라갈 땐 목욕하고 옷 싹 갈아입고 올라가요.

산할머니를 모시는 산치성은 상황에 따라 산치성터에서의 제를 중심으로 지내는 경우와 크게 굿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 곧 굿을 하는 경우를 굿 또는 도당굿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경우를 정하는 것은 마을 회의를 통해서 인데, 운영위원회라 불리는 모임에서 주도한다고 한다.

김성선 : 저희가 제를 지내게 되믄 부락자금이, 거기 그 쓸 수 있는 관리 기금이 있어요. 그 관리 기금이 있는데, 인제 그 관리 기금을 가지고, 인제 운영 위원회라는 게 있어가지고, 운영위원회에서 올해 노인네들이 ‘굿을 하자’ 예를 들어서 뭐냐하믄, ‘2001년에 하자’ 그러면은 운영 위원회에서 그걸 열어 가지고, 그러믄 굿을 하게 되믄 잽이가 다 오거든. 외부에서 인제 불러서 허고, 이 지금 옛날에는 자체에 우리 부락에, 신을 모시는 만신이 있었는데, 만신이 그 양반들이 연로해서 다 돌아가셨다고. 그러구 그 전수자가 없어, 지금. 거니까 그 저희 부락에 인제 그 단골로오는 그러한 만신들한테 의뢰를 해서, 그 만신들한테 의뢰를 허며는 만신이 보통 한 너덧, 다섯, 여섯 명 오거든. 여섯 명 허고 삼저라고 해서 피리 부는 사람 둘 뭐, 해금 뭐 이렇게 허고, 또 그거 뭐, 장구 뭐 북이라든가 기타 등등, 삼잽이가 맞아야 될 거 아녜요? 그럼 그렇게 오며는 한 천여 만원 소요가 되요. 그 사람네들이 소요 금액을 달라는 금액이 아마 천여 만원 달랠 거예요. 그러면 저희 부락에서 인제 그것이 한해 행사니까, 그럼 이 부락사람들이 전부 거기 가서 매달려 되니까, 먹어야 되거든. 먹고 쓰고 그럴려니까 몇 천이 아마 부숴질 걸로 알고 있어요. 자금난이 좀 그렇죠.

산치성의 과정은 음력 이월 초하루 날 단골 만신이 부정을 풀고, 대를 내려서 산일 볼 사람을 뽑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주, 삼화주, 도가 등이 이때 뽑힌다. 이월 십오일 경이 되면, 산치성 때 쓰일 홰를 만들 깨끗한 나무를 준비한다. 이월 그믐이 되면 다시 만신이 와서 부정을 치고, 삼월 초하루날 새벽에 날을 받는 사람이 날을 받는다. 산치성하는 날을 받으면, 당집에다가 산치성 제의 날짜를 적어 붙인다 그리고 산치성 당일에 제의를 치르고, 그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제의에 대한 총 결산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한다. 이러한 산치성의 과정을 주도하는 이는 마을에서 뽑힌 ‘영좌’이다. 현재 십 년째 마을 영좌를 맡고 있는 분은 최용출 씨인데, 그가 직접 말하는 산치성의 과정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최용출 : 음력으로 이월 초하루 날, 예 단골 만신이 있어요. 그 분들이 오셔서, 부정을 풀고, 이제 우리 절차를 말씀드릴께. 산일 보시는 분들이 모여서, 그 생년월일 그것을 다 인제 봐 가지고 대가 내려서 산일 보는 사람들을 뽑습니다. 대가 가는 집마다. 인제 무슨 얘긴지 아세요? 이월 초하루 날 대가 가서 산일 볼 사람을 대가 가는 집마다 뽑아서, 적어 봤다가, 인제 이월 초하루 날, 인제 여기서 말하기를, 예 이월 초하루 날은 산일 볼 사람 뽑는 날, 이월 한 십오일 경에 제재소에 가서 깨끗한 나무를 실어다가, 제재소, 뭐 건물을 지었다 헐었던 나무라든가 이런걸 일절 안 써요. 제재소에 가서 깨끗한 나무 사다가 해를 매 놓고, 이월 그믐날 또 만신이 와서 부정을 치고, 삼월 초하룻날 새벽에 그 날 받이 하는 분이 있어요, 그 분한테 두 사람이 가서 날을 받아서, 당집에 갖다 붙여 놓고, 몇 일 날 제사를 모십니다 하고.조사자 : 당집에다가요?최용출 : 그렇죠. 문 창호지 이런 데다가 써서 갖다 붙여 놓고, 제삿날이 삼월 초하루든, 초이틀이든, 초사흘이든 날 일진에 따라서 날이 나는 대로, 갖다 써서 붙여 놓고, 그날짜에 재물을 가서 모셔다가, 치성을 모시는 겁니다. 만약에 굿을 허게 되며는, 만일 오늘 치성을 모셨다면 내일 대동이 다 모여서 명절날과 마찬가지로 다 정결한 마음가짐으로 이제 굿을 허고 그거예요. 갈매리나 똑같애요.조사자 : 당제를 다 지낸 후에는 어떻게 하죠?최용출 : 제사를 모시고 그 이튿날은 역시 대동분들이 다 모여서, 제사에 모신 모든 비용이라든지, 산에 대해서 앞으로 운영해 나갈 것을 같이 의논하고 그러면 끝나는 거죠. 그 이튿날 하기 닦는 날이다 해서.조사자 : 하기 닦는다?최용출 : 하기 닦는다.김성선 : 그러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은, 산제를 지냈잖아요. 지내고 끝나고 나면 날이 밝았잖아. 그 이튿날에 제사를 지내믄, 그날이, 저 굿을 허는 날이면 그 날이 준 날이거든, 굿 날인데, 굿을 안 지내고 제만 지내며는, 하기 닦는 날이라고, 저 하기 닦는 날은 뭔 뜻인가 하면은 결산하는 날이야, 그 날에 음식을 총 채려 놓은 걸 다 동네분들이 나눠 잡숫고, 여기에 산제에 비용이 얼마가 들어갔다. 어떻게 어떻게해줘야겠다.최용출 : 앞으론 또 우리 산할머니를 위해서 모든 일을 어떻게 해 나가는 게 좋겠느냐. 의논도 하고….김성선 : 굿을 허게 되믄, 그 날에 하기를 안 닦고, 굿 허고 고 이튿날.최용출 : 고 다음날.김성선 : 그러니까 굿을 허게 되믄 삽일이 걸리고, 이제 굿을 안하면은 저택에 지내서 그 이튿날까지 하고, 그렇게 되는 거지.

산치성에서 쓰이는 제물로는 ‘모든 채소는 날로, 익히지 않고 날로’ 올린다는 것과 소고기를 쓴다는 점을 제보자들은 강조했다.

최용출 : 돼지고기는 일절 안 쓰고, 소고기만 씁니다.김성선 : 그것은 그 할머니라 그래가지고, 원래 제를 지낼 적에, 보통 제를 지낼 적에 돼지머리를 많이 쓰잖아. 근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소머리를 써요.최용출 : 예전서부터 내려오는 전례고, 또 우리 여기 주민들도 고사 지낼 때, 반드시 소고기, 돼지고기 안 써요, 가정집에서도.김성선 : 고사 그, 산제했을 적에 소머리를 썼기 때문에 저희도 돼지머리를 안 써요, 이 부락 사람 만큼은. 전에 본 주민들은 자기네들이 인제 뭐냐하면 고사 같은 걸 지내도, 없으면 술 한잔 놓고 북어를 놀 망정, 돼지머리는 안 놓습니다.

□ 제보자

  • 김성선(갈매동 담터마을, 1937년 생, 남)
  • 최용출(갈매동 담터마을, 1923년 생, 남)

□ 제보자 : 2000년 10월 8일,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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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 - 갈매동 도당굿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갈매동의 도촌(島村)마을(갈매1리)은 일명 섬말이라고도 하는데, 갈매초등학교에서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검암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을 좌우로 둘러싼 채 흘러서, 마을이 마치 섬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 제명

갈매동 도당굿, 산치성

2) 당명 및 형태

산신당, 당집

3) 신격 및 신체

산신, 도당,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4) 제일

보통은 음력 3월 3일. 격년제로 시행한다.

5) 제주

마을굿 전체를 주관하는 사람을 <도가>라고 하는데, 도가는 무당이 대를 내려 지명한다. 이 절차를 <비내리>라고 하며, 도가로 선출되는 사람은 마을에서 비교적 여유 있고 평소에도 손재수가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출한다. 도가는 <산도가>라고도 부른다. 다음으로 <숙수>와 <당주>를 선출하는데, 숙수는 제물 차리는 것을 담당하며, 당주는 당지기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한 번 맡았던 사람이 계속하고 있는 펀이다. 일단 도가로 선출되면 일체의 모든 금기를 지켜야 한다. 외출을 삼가고 초상집에 가는 일이나 험한 일 등을 피한다. 또한 제물준비와 굿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절차를 모두 도맡아서 처리한다. 도가에 비하여 금기는 약하지만 숙수와 당주도 금기를 지켜야 한다. 숙수나 당주에게 초상이 난다거나 아이를 낳게 되면 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하는 금기가 있는 등, 대개는 도가의 금기에 준하지만 일상적인 일들은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약한 편이다.

6) 제비
7) 제물

소머리, 조포(두부), 계면백, 술(조라술)

8) 제차

갈매동 도당굿은 현재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어서, 그 제사의 절차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① 예고제 : 음력 2월 1일, 일단 도가를 선정하면, 도가의 주관 아래 모든 제의준비가 이루어진다. 당집의 신단에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치성을 올리는 일종의 예비적인 성격의 제의라 할 수 있다.
  2. ② 부정풀이 : 예고제가 있는 날의 오시(午時) 경에 선출된 제관집을 돌아다니며 일체의 부정을 사전에 막아주는 절차이다.
  3. ③ 당집청소 : 음력 l0일, 20일, 말일에 마을 남자들이 따로, 당집청소, 제기정리, 굿청만들기, 치성터다지기 등을 하는 절차이다
  4. ④ 나무준비 : 굿날 횃대로 쓸 나무를 준비한다. 굿날에 유가(遊街)행사에 쓰일 횃대이다.
  5. ⑤ 조포모시기 : 손으로 직접 빚은 두부를 조포라 하는데, 깨끗한 치성터의 우물에서 물을 떠 와서 콩을 불리고 갈아서 두부를 만든다. 조포가 완성되면 밤 9시경 그릇에 담아 당일체차일을 치고 상에 올려둔다.
  6. ⑥ 안반고사 : 산치성을 지내기 직전에(밤 9시경), 도당굿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올리는 제사로, 당주택의 안주인이 올리는 고사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기>를 위로하기 위한 고사로, 산치성과 도당굿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7. ⑦ 산치성 : 밤 10시경, 제물을 준비하여 제관들이 모이면, 횃대를 든 청년들이 불을 밝히고, 제관을 선두로 제물을 든 여자들이 그 뒤를 따라서 산치성 장소로 이동한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입에 한지를 물어서 입부정을 막는다. 이를 <함봉>이라 한다. 제사의 형식은 일반 유교식의 제사와 거의 흡사하며, 산신에게 올리는 인사가 끝나면 축문을 읽는다.
  8. ⑧ 서낭맞이 : 서낭신을 맞아들이는 의식으로, 산치성을 끝낸 후, 모든 사람들이 대를 마당에 세워두고 서낭신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 제의를 끝으로 산에서 행하는 제례는 전부 끝나고 유가(遊街)가 시작된다
  9. ⑨ 유가(遊街) : 유가는 길놀이 의식으로, 산치성을 끝낸 사람들이 서낭맞이를 하고, 대잡이들은 대를 앞장세워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횃불을 든 청년들이 불을 밝히고 무당, 당주 등이 앞장선다. 장구, 바라, 북, 피리, 대금, 해금같은 악기들을 연주하고, 주민들이 그 뒤를 따른다. 주민들은 집 밖에 불을 피우며 기다리다가 유가 일행이 오면 상에다 팥시루떡을 올려서 밖으로 내온다. 떡 위에는 촛불이나 북어를 올려서 복을 빈다.
  10. ⑩ 본굿 : 유가가 끝나면 대개 아침 나절이 되는데, 모두 도가의 집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본굿에 들어간다. 산 밑에서 올라오는 대잡이와 무당, 악사행렬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굿이 시작된다. 마당에 도착하면 대를 세우고, 가운데에 줄을 쳐서 전갈을 읽는데, 굿하는 내력을 답한다. 당 안의 도가가 전갈을 보낸다. 주고받는 답변이 끝나면 가운데 쳐놓은 줄을 끊고 들어와 대를 굿당에 안치함으로써 본격적인 굿이 시작된다. 굿거리는 무당이 진행하는 데,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초부정→가망청배→조상거리→산할아버지→별상거리→제석거리→창부거리→대감놀이→바라→계면떡거리→군웅거리→걸립→당집고사→뒷전
  11. ⑪ 회계 : 음력 3월 5일에 마을 대표들이 도갓집에 모여 산치성과 도당굿에 소요된 비용에 대한 회계를 하여 정산을 하고, 다음의 굿을 기약함으로써 일단 치성은 전부 끝이 난다.
12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 - 갈매동 도당굿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1차 증언채록

갈매동 도촌마을의 공동제의는 구리시 뿐만 아니라 서울에까지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갈매동도당굿’이라 알려져 있으나, 마을에 전하는 문서에는 ‘산치성’이라 적혀 있고 마을사람들 역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공동제의는 1995년 8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 세밀한 현지 조사가 이루어져서 『갈매동 도당굿』이라는 학술종합보고서가 나와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2000년 4월 6일에서 7일에 걸쳐 벌어진 산치성과 본굿에 대한 조사자의 참여 관찰과 현지 조사, 그리고 앞서 이루어진 보고서를 참고하여 도촌마을의 공동제의를 정리해 본다.

도촌마을 산치성은 마을에서 도당산 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한 당집, 도당터, 치성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당집은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다. 기와 지붕을 한 1칸의 당집은 “龍 昭和拾年乙亥十月二十五日 立柱 上樑 龜”라 쓰여진 상량문으로 보아 1935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당집은 초가집이었는데, 나중에 보수를 한 것이라 한다. 당집 위쪽에는 도당굿을 벌이는 도당터와 숙수간이라 불리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숙수간은 1994년에 새로 지은 것인데, 제물을 준비하는 곳이다. 마을 공동제의에 쓰일 물건을 넣어두고 떡을 찌는 등의 일을 할 장소가 없어 불편을 겪다가 아예 건물을 마련한 것이라 한다. 이로 보아 숙수간은 잔치 때 음식을 만들기 위해 베푼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숙설간(熟設間)’의 와음으로 보인다.

갈매동 도촌마을의 산치성은 이년에 한 번씩 봄에 치러지는데, 음력 이월 초하루 제의를 주관할 제주들을 뽑는 회의에서부터 그 준비가 이루어진다. 음력 이월 초하루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의를 주관할 사람들을 선출한다. 뜻이 있는 마을 어른들과 영좌, 통장 등이 이때 모인다. 먼저 도가를 뽑는데, 그 선출 방식은 무당이 대를 내려 지명한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에게 빌고 나서 나무에 대를 받는다. 대잡이로 임명된 사람은 대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도가를 지명한다. 산도가라고도 불리는 도가는 마을에서 비교적 여유가 있으며, 집안에 손재수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 대체로 뽑힌다. 이렇게 뽑힌 도가는 엄격하게 금기를 지켜야 한다. 초상집이나 험한 일을 피하고 외출마저 삼간다. 도가는 제의 준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땔나무도 하고 제물 준비를 비롯해 산치성을 올리는 데 필요한 제반사를 주관한다. 이렇게 도가의 책무와 역할이 크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도가에게 일정 정도의 대가를 지불한다. 도가와 함께 마을 공동제의를 준비하게 될 화주와 시주, 도당굿에서 대를 잡을 대잡이, 제물 차리는 사람인 숙수, 당지기 역할을 하는 당주도 이때 함께 뽑는다. 이들은 도가와는 달리 일상적인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지만, 초상집을 피하는 등의 금기는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이렇게 제의를 주관할 사람들이 뽑히면, 도가는 제의 비용 마련에 나선다. 제의 비용은 집집마다 갹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전에는 개인별로 쌀을 반 말에서 한 말 정도 냈는데, 현재는 쌀과 돈을 함께 낸다. 제의 비용은 대체로 제의 날짜가 정해지는 날에 반 이상이 모아진다고 한다.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물른이고 외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도 기꺼이 제의 비용을 함께 부담한다. 또 마을 전체를 도는 유가를 할 때에 대잡이의 대에 한지로 싼 돈을 매달게 되는데, 이것 역시 적지 않게 걷힌다.

제의에 쓰일 제물 준비는 마을에 전해져 오는 문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1928년과 1960년도에 기록된 이 문서에는 아주 상세하게 제의에 쓰이는 모든 물품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제물 구입은 보통 청량리시장을 이용한다. 제물 구입을 할 때에도 엄격한 금기가 있는데, ‘초상을 치른 집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라거나, ‘물건은 가장 좋은 걸로 사고 물건값은 절대 깎지 않는다’ 등이 그것이다. 구입한 제물들은 숙수간에 보관한다. 제의 날짜까지 사람들 손을 타면 안되므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제물 구입과 관련해서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도가가 도당굿에 쓸 소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잔하다 보니, 매어 놓은 소가 없어졌다. 그래서하는 수 없다 싶어 다시 돈을 가져다 사려고 터덜터덜 마을로 돌아와 보니 그 소가 소를 잡는 장소에 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소마저도 자신이 제의에 쓰일 것임을 알고 스스로 오게 할 정도로 마을 신의 영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음력 이월 십일과 이십일 그리고 말일을 전후하여 당집과 그 주변 청소가 이루어진다. 보통 마을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당집 주변 벌초, 당집소제, 제기정리, 횃대만들기, 치성터다지기, 굿청만들기 등을 한다. 굿청은 당집과 치성터 중간에 지어지는데, 옛날에는 볏집으로 ‘채’를 만들어 날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요즈음은 비닐 하우스로 대신한다. 굿청 안은 검암산 쪽으로 신단을 두고 좌우로 멍석을 깔아 산치성 본굿(도당굿)의 장소로 사용된다. 산치성 날짜는 음력 삼월 초하루 새벽에 정해진다. 이른 새벽에 제주로 뽑힌 사람들과 날을 보는 사람이 모여서 날짜를 잡는다. 제주들 각각의 생기복덕은 물른이고 그들 부인의 것까지 종합하여 가장 깨끗한 날이 산치성 날로 정해진다. 산치성 날짜는 보통 음력 삼월 초순에 정해진다. 지난해의 경우(서기 2000년) 4월 6일(음력 3월 2일)로 정해졌다. 산치성 날짜가 정해지면 제주들은 당집 문을 열어 놓고, 문 중앙 위쪽에 정해진 산치성 날짜를 적은 종이를 붙여 놓는다

2000년에 올린 산치성은 음력 삼월 초이튿날 벌어졌다. 당주 부인이 행하는 ‘안반고사’, 손으로 직접 빚은 두부를 만들어 상에 올리는 ‘조포모시기’, 그리고 산치성에 올릴 밤을 짓는 ‘노구메짓기’에 이어 본격적인 산치성이 밤 9시 25분 경부터 시작되었다. 횃대를 든 청년들이 불을 밝히는 가운데 고깔 모양으로 한지를 씌운 제물들을 입에 한지를 문 아낙들이 치성터로 옮긴다. 산치성을 올리는 장소는 예전에 호랑이가 자주 내려왔다는 곳이다. 산치성제는 산치성터에 병풍을 두르고 그 앞에 상을 놓고 벌어진다 제주가 절을 세 번 하고서 젓가락으로 상을 세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제의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제주가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리면 산치성은 끝이 난다. 이때까지 제주들은 물른이고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일체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산치성터에서의 산치성은 9시 55분 경에 끝이 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10시 30분이 되자 도당터에서 청년들 7~8명이 마을을 향해 “서낭맞이 갑시다”라고 외친다. 이제 서낭신을 맞아들이는 ‘서낭맞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새오개서낭’이라 불리는 서낭은 퇴계원에서 신내동으로 빠지는 차량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갯마루 오른쪽 산 위에 자리하고 있다. 도당 터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새오개서낭을 맞이하러 가는 도중, 삼거리나 사거리 등 길이 합쳐지는 지점에서는 무당이 어김없이 거리제를 올린다. 11시 40분 경 새오개서낭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무당과 제관이 새오개서낭 앞으로 올라가서 제를 올린다. 새오개서낭을 맞이한 이후에 일종의 길놀이라 할수 있는 ‘유가(遊街)’가 시작된다. 횃대를 든 청년들이 불을 밝히는 가운데, 만신과 대잡이 그리고 퐁물을 치는 산이들을 앞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집 앞에다가 불을 피워 유가를 맞아들인다는 신호를 한다. 그리고 팥 시루와 북어 등을 차린 상을 올려서 대를 맞이하며 복을 빈다. 대가 집 안팎을 돌며 축원을 해주면 대주가 나와서 절을 하고 유가 행렬을 이룬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예전에는 유가가 몇 일 동안 지속되었다고도 한다. 요즈음은 하롯밤을 새우고 다음날 오전까지 지속된다. 유가가 끝나면 ‘본굿’이 시작된다. 이때에는 갈매동 도촌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온다. 본굿은 대삽이를 필두로 한 일행이 당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장문밟기’로 시작된다 이어서 당에 도착하면 굿을 하게 된 내력을 고하고 답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본굿이 시작된다. 본굿은 초부정→가망청배→조상거리→산할아버지→별상거리→제석거리→창부거리→대감놀이→바라→계면떡거리→군웅거리→걸립→당집고사→뒷전 등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굿이 모두 끝나고 그 이튿날에는 도갓집에 마을 대표들이 모여 마을 공동제의에쓰인 비용을 정산한다. 마을 공동제의에 관한 모든 것이 의논되고 기록되어 마을 장부에 남겨진다.

□ 조사일자 : 2000년 4월 6일~4월 7일, 2000년 10월 8일, 2000년 10월 16일, 2001년 5월 12일

□ 참고문헌 : 갈매동 도당굿 학술종합조사단, 『갈매동 도당굿』, 구리시, 1996.

12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 - 갈매동 도당굿 민속문화 > 마을 신앙의 실태
2차 증언채록
조사자 : 갈매동 도당굿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정영화 : 도당굿은 그러니까 작년에 했으니까 내년에 2002년도 음력 2월 1일날 이제 삼하주라고 산지를 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날이 음력 2월 초하루날 도가, 시주, 하주 시외군을 대가 내려서 맨 처음에 도가 집에 들어가고 두 번째로는 시주, 세 번째는 하주 집에 들어가는데, 그 사람들이 이제 주관을 해서 도당굿 준비를 한단 말이지, 세 사람이, 그리고 당주, 내가 당주인데, 하고 숙주는 계속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내가 병이들었다든가, 가정에 부모가 사망해서 상을 입었다든지 이런 부정이 있을 때에는 그 직을 상실하게 돼있어. 그리고 또 다음 해에 당주와 숙수를 결정하고 도가, 시주, 하주는 여기 도당굿을 한 해 걸러서 하니까 2002년, 2004년 짝수 해에 하거든? 그 때마다 도가, 시주, 하주는 무당이 대를 내려서 대자리가 들어간 데로 결정내려서 세 사람과 같이 하지.조사자 : 여기 상방과 하방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당집에 도당이 밑에고 산신이 위에 있잖아요. 산신당은 조사해 보니까 아직 산신당 당집은 없고 나무만….정영화 : 당집은 없는데 산신제 지내는 당집은 없지마는 그 산신제 지내는 자리가 옛날서부터 그냥 거기서는 산제를 지내고 이 당집에는 상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셔 있는 장소고 거기에 산제 지내는 재기, 제기 서류 그런거이 그 안에 보관되어 있지, 당집에는.조사자 : 지금 도당집에 거기 제기랑 다 있다고요? 저희가 마을 산에 조금만 올라가면 도당이 있는 거죠? 그럼 산신당은 터는 어디에 있어요? 그 뒤에?정영화 : 그 뒤에 올라가면, 쭉 100m 올라가면 길옆에 잔디를 심어 놓은 데가 있어.조사자 : 어르신 말고 같이 준비하시는 분들이나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그걸 좀 여줘보고 싶어요.정영화 : 준비는 2월 초하루날 상하주가 결정이 되면 그 기간이 한달이야, 한달. 그리고 3월 초하루날 4시에 새벽에 날을 받는다고. 우리가 결혼을 한다, 환갑을 한다 하면은 날을 택해서 육십갑자 산지를 따져 가지고 좋은 날을 하잖아? 그래서 그것 보면서 음력(?)이 있어. 그 집에 가서 당주, 숙수, 도가, 시주, 하주 다섯 사람이 옛날처럼 갓을 쓰고 두루마기 입고 정복을 하고 나서 날을 가지고 오면 삼월 초하루에서 삼일 그 안에 날을 받는단 말이지? 그래서 날짜를 써가지고 당집을 열고 붙인단 말야. 사실 굿이 시작되는 거지. 그래서 삼월 초하룻날 굿이라고 하면 그날 저녁에 산제를 잡숫고 산제를 몇 시에 잡숫냐면 한 오후 10에서 11시에서 거기서 산제를. 그래서 다음 절차가 어디냐 하면 서낭맞이를 가요. 서낭맞이라 하는 것은 저기 신내동 고개가 있어 그 고개에 옛날에 서낭당이라고 하는 게 있잖아. 서낭당 거기에 산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데 그 두 분을 모셔다가 여기서 같이 굿을 하게 되었어요.조사자 : 서낭당이 따로 있는 거예요?정영화 : 서낭당이 옛날에는 시골에, 자네들은 잘 모를 거야, 산너머 다니면은 서낭당이라고 돌멩이를 얹어 놓고 거기 넘어 갈 때 보면은 떡도 놓고 가고 여자들이 친정에 가면 떡도 놓고 가고 돈도 놓고 가고 하는 것이 있는데 갔다 오면서 아무 무사고 없도록 기원하는 것, 거기에는 서낭이 있다고.조사자 : 지금 이게 서낭당이였어요?정영화 : 그게 원래 서낭당인데 시방 그걸 사람들이 그냥 짚고 다니면서 없지. 서낭당이 거기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도 있고 고개 넘을 때마다 서낭당이 있었어, 옛날에는.조사자 :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요?정영화 : 그렇지, 시방은 가다가 돌멩이 얹어 놓고 떡도 놓고 가고 옛날에 그랬거던. 우리 어려서는? 시방은 거기가 새오개서낭당이라 해가지고 새오개가 고개였거던. 그것이 거기에 서낭당이 없었어, 옛날에는. 지금 가면은 남아 있는 … 시방은 거기에 큰 나무 하나 있어, 나무. 제일 굵은 나무가 있어.조사자 : 서낭당은 세 개가 있었다고요?정영화 : 어, 세 개가 있었지.조사자 : 그리고 당집은 따로 있고요?정영화 : 당은 여기 금완산(?)에 산신을 모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거고 서낭당이라 하는 것은 우리 갈매리 사람들이 많이 왕래를 하다보니까 그 쪽 산신을 위한 거지.조사자 : 산신제를 올리고 나서 당제를 나중에 드리는 건가요?정영화 : 산신제가 우선이니까 제일 먼저하고 갔다가 서낭맞이를 가서 산신을 모셔다가 그리고 쭉 유가를 돌아. 유가는 놀 유에 집 가 자야. 집집마다 다 돌아가서 대가 있고 무당이 있잖아. 그리고 제비가 다 있지? 그러니까 굿을 해. 잠깐 동안 굿을 해. 집에서는 산신 할아버지가 지내는 떡과 음식, 정한수, 막걸리 떠놓고 절을 하고 이런 순서가 돼요. 이것을 밤새도록 하는 거야. 시방은 옛날엔 집집마다 했는데, 고수가 많아 못해 가지고 저기서 서낭맞이를 갔다가 오면 집 앞에다 불을 펴 놔. 불을 펴놓으면 우리 집에 오시오 그런 뜻이야. 쭉 오다보면 첫째 집, 둘째 집 … 불을 펴놓는단 말이지. 그 집에 준비가 다 돼있는 집이니까. 거기에 와서 무당이 축언도 하고 밤새도록 돌아. 다 못 돌아. 아침에도 잠깐 돈단 말이지. 그리고 나서 산 위에 가서 당굿을 시작하는 거지. 올라가서, 도당굿을 한단 말이지. 이리로 올라가서, 시방은 아무 것도 없지만, 굿청을 비닐하우스로 크게 지어. 거기가 당굿에 필요한 제물, 시루떡, 갖은 여러가지 신에 대한 시루, 제물이 다 준비가 되어서 거기서 무당이 14거리를, 그쭉 하면서 그날 저녁까지 뒷전이 마지막인데 뒷전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지 .조사자 : 그리고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신제를 드리고 서낭맞이를 한 다음에 유가를 돌고 산에 올라가서 도당굿(14거리)을 하고 내려와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굿은 언제부터 했던 거예요, 도당굿을.정영화 : 이것이 뭐 역사는 없지만은 5OO~600년 전부터 주민들이 한 걸로….조사자 : 왜 하는 거예요?정영화 : 그건 옛날에는 신들을 우상하고 그래서 도당굿을 해줌으로써 신에 대한 제사를 올림으로써 우리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뜻에서 쭉 해내려 온 거지.조사자 : 예전부터 2년에 한 번 씩 한 거예요?정영화 : 예. 그전에는 딴 데는 매년 한다는 동네도 있는데, 여기는 2년에 한 번 씩이야.조사자 : 도당굿을 안 지내서 마을에 나쁜 것들이 있었다거나 뭐 그런 것 없었어요?정영화 : 글쎄, 그것은 꼭 집어서 얘기하기가…. 안했다고 해서 동네 무슨 일이 생기고, 또 지냈다고 해서 뭐가 잘됐다하는 이런 것은 뚜렷하게 나타나는 건 없지.조사자 : 어르신은 지금 당주시잖아요. 얼마나 돼셨어요? 당주한지.정영화 : 내가 시방 5년째 하나?조사자 : 그전에는 (당주를) 무당이 원래 정해주는 거죠? 아니면….정영화 : 무당이 추호를 해서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어떠한 사정으로 해서 당주를 못하니까 일할 수 있는 분을 택해주십시오 라고 축언을 하면은 대가 삼월 초하룻날 제일 먼저 돌아오는 집이 당주가 되는 거지.조사자 : 지금까지 쭉 지내왔던 것들 있잖아요. 그리고 몇 년에 당주가 바뀐다거나 아니면 매년 바뀐다 그런 건 있어요?정영화 : 그런 순서가 있지 있기는. 그렇지만 그런데 그걸 적어 놓지 않았을 걸. 내 위에는 2년 보고 그만두고 그 위에는 5, 6년 했나? 또 이런 사람도 있고 그래.조사자 : 마을 토박이 분들이 쭉 하는 거죠? 무당은 어떤 무당을 부르는 거예요?정영화 : 무당은 시방 조순자가 경기 문화재 15호거든? 시방 조순자 어머니가 최복동이라는 분이 죽 해오다가 딸이 세습을 받은 거지. 조순자하고 제비하는 허용업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이제 추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됐지. 이용문 씨는 그전에 했어.조사자 : 여기가 댁이시죠? 갈매동 도당굿의 보존된 곳이예요? 다른 분들은 당주, 숙수, 도가, 시주, 하주 이 분들은 어떻게 되는거예요?정영화 : 당주와 숙수는 계속하고 집에 무슨 일이 없으면 계속하고 도가, 시주, 하주는 매년 바뀌어. 한 번 도당굿하면 임무가 끝나고 다음 할 때 또 세 사람을 결정하고 그래.조사자 : 누가 결정을 하죠?정영화 : 그건 저 산에서 대를 내려서 그 대가 들어가는거야. 신이 내려가는 거야. 신이 너 오늘 도가를 해라 전해주고, 두 번째는 들어가는 집이 시주 집에 들어가고 세 번째는 하주 집에 들어가고….조사자 : 각 숙주, 도가, 시주, 하주들이 하는 일이 뭐예요? 당주는 말씀하셨듯이….정영화 : 이 날, 이 때에 도가, 시주, 하주는 준비사항이 많잖아. 준비사항을 전부 같이 도가를 위주로 해서 점검하고 당주, 숙주는 산에 대해 모든 관리를 하는 사람이고, 이 세 사람(도가, 시주, 하주)들은 그해에 굿을 하는 데 모든 준비사항을 또 여러사람 해야지. 당주, 숙주 두 사람이 할 수 없잖아. 이 사람들이 같이 협조를 해서 그 날 도당굿을 준비를 허지.조사자 : 도가는 한자로 어떻게 되요?정영화 : 도가는 길 도 자에다 집 가 자지.조사자 : 아까 유가할 때 맞춰서 하는 … 시주는요?정영화 : 그건 내가 잘 몰라.조사자 : 제물 준비할 때 어디서 준비를 하는 거예요?정영화 : 시장에서 살 건 사고, 당집 위에 숙수간이라고 거기에서 마을 분들이 일 좀 하는 분, 시주, 하주 등 다섯 사람들이 다 하지.조사자 : 이때 뭐 금기된 사항은?정영화 : 금기된 사항은 고기나 생선을 못 먹어. 돼지고기, 쇠고기 못 먹어. 외부에서 손님이 와서 고기 살 돈이 없어서 못사는 게 아니라 그게 금기가 되어서 못해.조사자 : 왜 금기하나요?정영화 : 뭐어, 사찰과 마찬가지 아냐? 불교 쪽의 영향을 받은 거지. 다른 지역은 돼지, 소를 잡지만 여기는 그런 게 없어.조사자 : 갈매동 뜻이 뭐고 어떻게 해서 갈매동이라 했나요?정영화 : 내려오는 유래가 칡 갈 자에다 매화 매 자인데 옛날에 칡이 많고 매화나무가 많아서 갈매리라고 했다는 사람이 있고, 또 갈마음수에서 갈매리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 산모양이 칡이랑 매화나무랑 비슷해서 그런 말도 있다고….조사자 : 칡 갈 자에 매화 매 말고 갈마에서 유래되었다는 건 뭔가요? 아까 풍수지리….정영화 : 그것이 풍수지리에서 나온 얘긴지, 확실하게 우리도 잘 모르겠어. 여러 가지 말이 많은데. 어떤 사람은 이 뒤의 산 모양이 같다는 사람들도 있고, 또 칡과 매화가 많아서 갈매리라고 한 사람도 있고 그렇더라고.조사자 : 그러면 산신이랑 도당신 따로 있는 거죠? 아니면 같이 있는 거예요?정영화 : 같이 있지.조사자 : 도당신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이 계세요?정영화 : 같이 모시지.조사자 : 산신은 산에 계신 신이 도당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그러니까 위에 상당이랑 하당이랑 따로 있잖아요. 하당에는 도당할머니, 할아버지를 지내시고 산신에는 어떻게?정영화 : 아니지. 할아버지,할머니가 다 거기 산신 위에서 지내는 거야, 위에서 도당에서는 산신제 지내는 제기, 굿에 대한 절차는 보관하지.조사자 : 모시는 건 산신에서 모시는 거예요?정영화 : 음 맨처음에는.조사자 : 지금은요?정영화 : 시방은 여기 당에 모셔 있지?조사자 : 어떻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려오게 됐어요?정영화 : 산제에서?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가 산에 산소가 있어서 제를 지내러 가잖아. 자기네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여기 있지마는 맨 처음 지내기 전에 저기 가서 산신제를 지내잖아. 그런 의미에서 하는 거지.조사자 : 그러니까 산신에는 어떤 분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치러드리고 내려와서 도당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구요? 아까 14거리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기억나는 거 있으면 좀 말씀해주세요.정영화 : 유가 한 다음에 도당굿에 올라가서 청도전, 감남 청재, 도산거리 쭉 이렇게 하는 거죠.조사자 : 이 때 몇 명 정도가 준비를 해요?정영화 : 동네분들이 있으니까 많지.조사자 : 대략?정영화 : 2월 1일에서 3월 초하루까지 준비를 일요일마다 하거든? 그전에는 2월 열 하루, 스물 하루에 모여서 했는데, 시방은 직장생활을 하니까 일요일마다 모여서 산에 가서 횃불도 만들고 준비를 해요. 준비기간은 한달.

□ 제보자 : 정영화(구리시 갈매동 376번지, 1936년 9월 생, 남, 현재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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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나무장승
  • 02 안창동 응달말 돌도깨비와 양지말 돌도깨비
  • 03 사노동 장승들

장승신앙이란 마을에 침입하는 잡귀나 나쁜 운세를 막기 위하여 나무나 돌에 무서운 사람의 얼굴 모양을 그리거나 새겨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워둔 구조물로서, 우리 나라의 마을신앙 중 <하당신>에 속하는 신체(神體)를 말한다.
현재 구리시에서는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장승은 없지만, 장승과 관련된 증언들을 채록한 결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장승이 세워져 있었고, 장승제도 지내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장승은 여러 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고, 그 기능은 가슴에 새긴 명문(銘文)에 의해서 알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마을 밖의 잡귀와 액(厄)을 방어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장승의 모습은 가능한 무섭게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얼굴에는 벽사(○邪)의 기능을 가졌다고 믿은 붉은 색의 황토 칠을 하여 잡귀를 몰아내려는 역할을 강화시키려는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구리시의 경우에는 어떤 명문을 새기고 있었는지, 어떤 얼굴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증언은 채록할 수 없었다. 다만 동네 어른들에 의하여 예전의 장승 모습이 어떠했다든지, 어느 곳에다 장승을 세웠다든지 하는 증언이나, 예전의 장승이 왜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도의 증언만을 채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몇 군데서 장승을 제작하여 세워 놓고는 있으나, 예전의 마을신앙으로서의 장승의 기능은 사라지고, 다만 마을 안내판의 역할, 혹은 장식의 역할만 하고 있어서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1.아천동 우미내마을 나무장승 민속문화 > 장승신화

아천동 우미내마을 입구에는 4m 정도가 되는 나무로 만든 장승 세 개가 있다. 아무런 칠을 하지 않고, 눈 부분에만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장승은 장승이 세워진 바로 뒤에 위치한 아천농장 주인이 올해 만든 것이라 한다.
맨 왼쪽에 서 있는 장승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눈가의 주름까지 새겨져 있어 마치 하회탈을 연상시킨다. 가운데 있는 장승은 혀를 내민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세 번째 장승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왕방울눈에 주먹코를 하고 벌린 입 사이로 이빨이 보인다.
이 장승들은 모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어떤 관련을 가진 것도 아니다. 장승 뒤에 자리잡은 아천농장 주인이 만들어 세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우미내마을을 들어서는 사람들에게는 마을의 또 다른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 하다. 우미내마을의 유래 표석과 함께 자리하여 우미내마을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아믈 안내를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미내마을 노인 회관 앞에도 제작 중인 나무 장승이 있다. 이 장승은 현재 마을 통장인 이송재씨가 제작 중에 있는 것이다.

□ 제보자

  • 이종서(아천동 우미내마을, 1933년 생, 남)
  • 이송재(아천동 우미내마을, 1948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8월 28일, 2000년 9월 9일

2. 안창동 응달말 돌도깨비와 양지말 돌도깨비 민속문화 > 장승신화

예전에 인창동 응달말과 양지말에는 ‘돌도깨비’라 불리는 돌장승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은 마을지킴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응달말 돌도깨비는 여자라 여졌으며, 양지말 돌도깨비는 남자라 여겼다.

이옥선 : 둘 있었지. 저기 응달말하고 양지말하고.김종원 : 장승이라는 게 돌인데, 그게 다 없어졌지, 지금은. 양쪽에. 저기 양지말이라는 동네 들어가는 입구에….이옥선 : 돌다리에서 들어가는 입구에,김종원 : 거기에 인제 서 있고, 이쪽에 인제 그 돌다리에서 이리 들어오는.이옥선 : 보림 부페 있는 쪽으로 들어가는데.김종원 :거기에 인제 서 있었거든, 이제 다 까불고 없어.이옥선 : 건 나 시집와서도 그건 있었어, 이렇게 넙적한 돌 이렇게.김종원 : 넙적한 돌 있는데, 거 치워버리고.이옥선 : 그거가 마을을 지킨다고 그 전에 그랬어요.

이 돌도깨비들은 무엇이라 적힌 글자도 없었고,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옥선 : 그냥 이렇게 납작한 돌을, 납작한 돌이.김종원 : 그냥 생긴 데로 큰돌을 갖다 세워 놓은 거야.이옥선 : 그냥 그걸 그렇게 세워 봤더라구. 그런데 요쪽에 있는 건, 보림 부페 있는 쪽에서 들어가는데 거기 있든 건 납작하고, 저쪽에 있든 건 둥글둥글했죠?김종원 : 컸지, 그건.이옥선 : 저기 돌다리에선 철뚝으로 들어가는데, 거기는 돌이 둥글둥글 허고 좀 키가 크고, 이쪽에 건 납작하고 그렇드라고, 내가 보니까.김종원 : 집들 짓느라고 다 부숴버리고….

응달말 돌도깨비는 양지말 돌도깨비보다는 작았으며 넓은 형태의 돌이었다고 한다. 응달말 돌도깨비가 있었던 곳은 현재 인창동 292-1번지 성림빌라가 들어선 자리이다. 양지말 돌도깨비는 제보자 황명수 씨에 의하면, 넓이가 1m 70cm 정도, 높이가 2m가 넘는 뾰족한 형상의 돌이었다고 한다. 양지말 돌도깨비가 있었던 곳은 현재 인창동 268-1번지 옛 고을 전문점이라는 식당 옆 빈터로 남아 있다. 돌도깨비가 있었던 자리를 직접 안내해 주신 황명수 씨에 의하면, 이 돌도깨비들은 서로 마주보며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으며, 날이 나쁠 때면 응달말 돌도깨비에서 불빛이 나와서 건너편의 양지말 돌도깨비가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 제보자

  • 김종원(인창동 궁말, 1929년 생, 남)
  • 이옥선(인창동 궁말, 1938년 생, 여)
  • 황명수(인창동 응달말, 1930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30일~2000년 10월 1일

3.사노동 장승들 민속문화 > 장승신화

사노동에는 현재 장승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여러 마을에서 만나본 제보자들에 의하면 여러 군데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전한다. 이 장승들 가운데는 옛날부터 민속 신앙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던 장승도 있었고, 현대에 만들어진 장승도 있었다. 우선 민속 신앙에 따라 만들어졌던 장승은 서낭과 함께 안말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이성근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근 : 안말 지금 배 밭 있어. 응달말 길에 가다가, 길에다가 해놓았다. 왼쪽으로. 안말 응달말 왼쪽으로 서낭이 있고, 사로리에서 장승을 해 놓았어. 나무때기로 깎아서 사람 형체로 만들어서 이렇게 뻘겋게 칠하고 있었지. 사람 얼굴을 그려서 해놓았지. 그 전에 있었는데, 그 후에는 못 봤어. 지금 배 밭 있는데, 거 중간에 가다가 있어요. 거기 서 있었어.

사노동에는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마을 안내라는 기능을 하는 장승들이 여러 개 세워졌었다. 내동마을 입구, 양지마을 입구, 언재마을 입구 등에 각각 장승 한 쌍씩 서 있었다. 이 장승들의 모양은 거의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왼쪽에 장승은 여자이고 오른쪽 장승은 남자였다. 그리고 여자 장승에는 한글로 마을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남자 장승에는 한문으로 마을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남자장승은 사모관대를 쓰고 있으며, 여자장승은 족두리와 연지곤지를 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승들은 마을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장승에 대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마을 안내라는 현대적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었던 장승이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었던 장승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거의 장승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 결과 내동마을 장승의 경우 오래지 않아 썩어 넘어져 버렸고, 양지마을과 언재마을의 장승은 도로가 넓혀지면서 그냥 사라졌다.

□ 제보자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임정태(사노동 안말, 1930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3일, 2000년 10월 16일

□ 참고문헌 : 김두하,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5.

  •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명무씨 댁 입춘축
  • 02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명무씨 본가 집안고사 돌 제단
  • 03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광무씨 댁 입춘축
  • 04 아천동 주유소 입춘축
  • 05 아천동 민속관 식당 입춘축
  • 06 토평동 벌말 금줄
  • 07 수택2동 수늪마을 강호명씨 댁 입춘 부적
  • 08 수택2동 수늪마을 서성복씨 댁 입춘축
  • 09 수택동 이촌마을 이인수씨 댁 입춘축
  • 10 인창동 궁말 김종원씨 댁 입춘 부적
  • 11 인창동 인창1경로당 입춘축
  • 12 인창동 동창마을 이성근씨 댁 입춘 부적
  • 13 사노동 안말 방복선씨 댁 돼지업주저리
  • 14 사노동 안말 추기만씨 댁 터주주저리
  • 15 사노동 안말 추계훈씨 댁 터주
  • 16 사노동 언재마을 서동우씨 댁 가정신앙
  • 17 갈매동 담터마을 김겅선씨 댁 복조리
  • 18 인창동 동창마을의 <도투마리경>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명무씨 댁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가정신앙이란 집안의 요소마다 신(神)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집안을 보살펴준다고 믿고, 이들 신에게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儀禮)를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가정신앙, 혹은 가신신앙(家神信仰), 가택신앙(家宅信仰), 집안신앙이라고도 말하며, 집안에 있는 신을 가신(家神), 가택신(家老神)이라 부른다.
전근대 사회에 우리네 가정에는 모든 곳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대청마루의 성주신, 안방의 조상신과 삼신, 부엌의 조왕신, 뒤곁의 터주와 업신, 우물의 우물신, 변소의 측신, 마굿간이나 외양간의 우마신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정한 곳에 자리 잡고 저마다 맡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들의 삶이 항상 신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으나, 많은 지역에서는 가정신앙이 급격히 사라지거나 다른 것으로 변질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구리시처럼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기존의 주거환경이 파괴되고 새로운 주거환경의 조성과, 이에 따른 거주민들의 성분 변화는 기존의 가정신앙에도 새로운 양상 내지는 기존 가정신앙의 소멸로 귀결되고 있음을 조사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정신앙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각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마을 신앙조사에 비하여 심도 있는 조사를 행하지 못하였다. 다만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여 구리시의 가정신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많이 눈에 보이는 것이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기둥에 써서 붙이는 행위로, 입춘축에 적은 글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발견되었다.

  • □ 立春大吉
  • □ 建陽多慶
  • □ 萬事亨通 등의 일반적인 종류와,
  • □ 歲在庚辰年戊寅月壬辰日辛亥時立春大吉이라 하여 입춘의 구체적인 시각까지 적어놓은 것.
  • □ 龍○福○逐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음)
  • □ 千禍皆消滅 四時大吉祥
  • □ 太歲庚辰萬事如意亨通
  • □ 立春大吉萬事亨通과 千禍皆消滅, 四時大吉祥을 함께 붙힌 경우
  • □ 立春大吉萬事如意亨通과, 天下泰平春 人間五福來,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등을 붙인 경우가 나타나고 있었다.

입춘축 이외에 나타나는 가정신앙으로서는 집안고사, 금줄, 짚주저리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우미내 마을의 이명무씨 댁에서는 예전에 할머니 때까지 집안의 고사를 지냈던 돌로 만든 제단이 집의 화단에 아직도 남아 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금줄은 아이를 남은 집에서 대문의 입구에 걸어 두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행위로, 비단 구리시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가정신앙의 한 형태이다. <짚주저리>란 집터를 지켜주는 가신인 <터주>를 모시는 신체(神體)인 <터줏가리>를 말하는 것으로, 짚으로 원물모양을 만드는데, 이를 짚주저리라 한다. 일반적으로 짚주저리 안에는 터줏단지가 들어 있고, 단지 안에는 벼(혹은 쌀)이 들어있는데, 터주를 보통 터줏가리라한다.
터줏가리를 모셔 놓은 가정으로 사노동 안말의 방복선씨 댁 <돼지업주저리>, 같은 마을 추기만씨 댁의 터주주저리와 추계훈씨 댁의 터줏가리, 사노동 언재마을의 서동우씨 댁 짚주저리 등이 조사되었다.

방복선씨 댁의 돼지업주저리는 뒤꼍 장독대에 모셔놓고 있다. 업(業)이란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으로, 보통은 사람업, 뱀업, 족제비업, 두꺼비업 등이 나타난다. 방복선씨의 할머니가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는 꿈을 꾼 후 집안의 가세가 일어난 이후부터 돼지업주저리를 모셨다고 하는데, 매년 한 번씩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사의 날짜는 음력 10월 초에 마을 공동의 산치성을 끝낸 후, 손없는 날을 잡아서 집안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고사는 고사에만 사용하는 시루를 이용하여 흰 떡을 만들어 돼지업주저리 앞에 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방복선씨는 2001년 현재 54년째 이 고사를 거르지 않고 지낸다고 한다. 추기만씨 댁의 터주주저리는 마당 뒤꼍에 작은 옹기항아리를 두고, 그 안에 쌀을 담고 뚜껑을 덮고, 다시 볏짚으로 주저리를 만들어 놓았다. 볏짚은 1년에 한 번 새 것으로 바꾸며, 보통은 음력 10월의 마을 산치성이 끝난 뒤에 새로 짚주저리를 만들고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같은 마을 추계훈씨 댁의 터주도 추기만씨 댁의 터주주저리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작은옹기 항아리 안에 쌀과 돈을 넣고, 항아리 입구를 비닐로 싸고 뚜껑을 덮고 짚주저리를 얹어둔 것으로, 약 백여 년 이상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에 짚주저리를 새로 만들고 떡과 막걸리, 북어 한 마리로 고사를 지내고 있다.
대개의 집에서는 하나의 터주신을 모시고 있는데 비해, 사노동 언재마을의 서동우씨 댁은 매우 다양한 가정신을 모시고 있다. 집의 안방과 마루, 선반 등과 집의 뒤꼍에 모신 4개의 짚주저리가 조사되었다. 뒤꼍의 주저리는 터주대감, 뱀업, 족제비업 등으로 모시고 있다고 하며, 주저리 안에는 각각 쌀?볍씨?콩 물 등을 넣은 항아리가 있으며, 농사가 잘 되고 식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올린다고 하였다. 주저리를 만든 짚은 매년 새 것으로 교체하지만, 항아리 안의 내용물은 거의 교체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음력 칠월 칠석날 아침일찍 막걸리와 호박부침개를 해서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안방에 모신 것은 성주라고 부르며, 선반을 만들어 상자를 그 안에 넣어 두는데, 상자 안에는 올베 한 필이 들어가 있었다. 아래에는 직접 현지 조사를 하고, 취재한 것을 녹취하여 옮겨 두었다.

01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명무씨 댁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아천동 316-17번지 이명무씨 댁은 따로 대문이 없고 길가에 직접 현관문이 나 있는데, 그 현관문 벽에 입춘축이 붙어 있었다. 형태는 아주 소박하게 파란색 물감으로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쓰여진 것이었다.

조사자 : 직접 쓰신 거예요?이명무 : 제가 썼죠. 옛날 저기 저 한옥집이 우리 집이거든요. 그 대문에 양쪽에 이렇게 쓰든지 써 가지고 이렇게 썼죠. 근데 뜻이 좋다구요. 이게.조사자 : 옛날부터 계속 이렇게 집안에서 쓰고 그랬어요?이명무 : 썼죠. 이거는 제가 알고 나서 그 때 이제 대학교 땐가, 그 때일 거예요. 아마, 그때 인제 써가지고, 지금 십오 년 이상 쓴 거죠. 매년. 우리 형님네도 쓰고 그렇죠. 매년. 이제 저는 이건 원래 붓글씨로 써야 하는데(웃음). 그냥 물감으로 쓴 거예요. 정성이기 때문에.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않고 파란색 물감으로 쓴 소박한 입춘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쓴 이명무씨의 정성과 의미 부여 만큼은 제대로 쓴 다른 집 못지 않았다.

이명무 : 이것도요, 정신적인 면이 강해서, 아침 해 뜨기 전에, 인제 다른 거 하기 전에, 먹갖다 놓고 벼루해 가지고 직접 쓰고서, 해뜨기 전에. 보통 입춘이 춥잖아요. 추울때 풀도 잘 안붙어요. 그럼 이거를 풀로 해서요, 이게 글씨 쓰는 것도 정성이지만 붙이는 것도 정성이예요. 이거 얼만큼 잘 붙이느냐에 따라서 일년 가고 그러거든요. 근데 이거 틈이 없이 다 붙였잖아요, 이렇게, 그게 이걸 정성껏 글씨만 쓰고 붙일 때 또 잘못 붙이면은 바람에 날라 가고 막 그래요, 그럼 이걸 하여튼 붙여서 완성해서 딱 안 떨어지게 하는 데까지 정성이예요. 요까지 해 놓며는 일년 동안 보면은 그냥 이렇게 좀 빛에 바래도 그냥 운치가 있고…. 조사자 : 올해도 이게 입춘날 아침 새벽에 붙인 거예요? 이명무 : 그럼요. 입춘날 아침 똑 해야돼 그러니까 이거는 저 사진과의 약속이지, 뭐 다른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입춘날 아침에 딱 하면은 그게 ‘아 내가 할 일 했다’ 이런 생각들죠, 그리고 인제 안 하고서 다음날 하면은, 아 이게 항상 찜찜한 게 있을 거 같잖아요. 그래서 부득이해도, 입춘이 추워요, 추워서 그냥 풀이 안 붙고 하는데, 하여튼 여기까지 정성이예요. 매사가 그런거는 정성을 쏟는 게, 다 해서 붙이는 거 까지, 이게 남들 같으면 따뜻할 때 붙이면 쉽잖아요. 그런데 추울 때 아침 일찍 이것도 그냥 입춘날 붙일려면 힘든 거죠, 그러면은 하늘이 어떻게 달리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웃음).

□ 제보자 : 이명무(아천동 우미내마을, 1965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9일

02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명무씨 본가 집안고사 돌 제단 민속문화 > 가정신앙

이명무씨 본가 화단에는 예전에 집안 고사를 드렸던 돌 유적이 있다. 현재 고사를 지내지도 않고 집안의 구조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남겨 두고 있다. 이 돌에 대해 이명무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명무 : 저는 막내이기 때문에 우리 큰 집에서 하죠, 우리 큰 집 지을 때도 제가 관심을 둔게 뭐냐 하면, 우리 뒷곁에, 옛날 구옥에요. 뒷곁에 인제 돌이 이렇게 있잖아요. 계단돌처럼 이렇게 있으면은, 거기다 우리는 항상 할머니 때부터, 내가 끝까지 뵌분은 할머니니까, 그 이상은 잘 모르지만, 할머니를 보면 이렇게 돌멩이로 부담이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거기서 항상 고사를 지내고, 어머니도 그러셨고, 그 다음에 큰 형수님도 그렇게 배워오셨고, 그러시잖아요. 그러면은 그게 집을 새로 짓는다고 그게 옮겨야 되서 인제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실 관심을 안 갖죠, 물론 인제 했는데, 저는 그게 항상 거기에 있더라구요. 그래가지고 고거, 고 돌만 빼다가 지금 우리 저 형님네 앞에 고기다가 돌멩이를 이렇게 놔두고, 세 개가 있어요. 고사 만일 지내면요, 갖다 놓는 자리가 있잖아요. 다락에, 다락 입구에 갖다놓고 대문 입구에 갖다놓고, 우리 뒤에 그 돌멩이 있는 데 거기 갖다 놓고, 여러 군데거든요. 네 개인데, 한 줄로 안 있었어요. 이렇게 두 줄 있었는데, 여긴 층 만들긴 뭐 해가지고.

□ 제보자 : 이명무(아천동 우미내마을, 1965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9월 9일

03 아천동 우미내마을 이광무씨 댁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이날 벌어지는 여러 민속적인 행사 중에 하나가 좋은 글귀를 써서 대문이나 기둥, 대들보, 천장 등에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입춘첨, 입춘축, 춘축 등으로 부른다. 아천동 우미내마을 40번지 6호 이광무씨 댁 대문 양쪽에는 “立春大吉”이라 쓰여진 입춘축이 붙어 있다. 전형적인 입춘축의 형태를 한 것이다. 이광무씨 댁 대문 앞 창고 문에도 입춘축이 붙어 있다. 이 입춘축은 대문에 붙어 있는 것과는 그 형태가 다르다. 증앙에 있는 글귀는 “立春大吉”이라 하여 동일하지만, 왼쪽에 “萬事亨通”이라는 글귀가 있고, 오른쪽에는 입춘이 든 날짜인 “庚辰年二月四日”이라는 글귀가 있다.

□ 조사일자 : 2000년 9월 9일

04 아천동 주유소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주유소와 민속은 어울리지 않는 듯 싶다. 하지만 아천동 302-22번지 아천동 주유소 곳곳에는 우리의 대표적인 민속 행사인 ‘입춘축 붙이기’를 한 자취가 남아 있다. 주유소 사무실 입구벽에는 “歲在庚辰年戊寅月壬辰日辛亥時立春大吉”이라 하여 입춘이 든 구체적인 시각까지 적어 놓은 입춘축이 붙어 있다. 그리고 주유소 양쪽 기둥에는 각각 “龍?福”, “○逐?"라 쓴 글귀가 붙어 있다. 이 입춘축들은 이 주유소의 주인인 이강준씨가 직접 입춘 때 써서 붙인 것이라 한다.

□ 제보자 : 주유소 종업원들

□ 조사일자 : 2000년 9월 9일

그러나 이런 형태로 붙인 입춘축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 얼마 뒤에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근 이 주유소를 찾았을 때 입춘축이 없어져서, 당시 주유소 사무실에 있던 직원 김봉안씨(29세, 남)를 대상으로 대담을 해 보았다.

조사자 :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기에(기둥을 가리키며) 입춘축이 있지 않았어요? 여기 기둥하고 문 옆에….김봉안 : 아 이거요? 이거 오래되가지고 떨어졌는데….조사자 : 일부러 지운 게 아니라 떨어진 건가요?김봉안 : 예. 이거 우리가 앞전에 종이로 써서 붙인 거라고.조사자 : 종이로 쓴 거에요?김봉안 : 예, 우리가 도색을 매년마다 한번씩 할 때마다 (페인트색이) 바뀐다고요. 그래서 우리 사장님이 새해되면 한번씩 써요. 그런데 이게(도색) 한지가 얼마 안 되요.조사자 : 그래서 안 붙이셨어요?김봉안 : 그게 초에는 있었는데 도색은 주유소에서 해주니까 바뀌어버린다고. 그래서 그래. 나중에 새해 내년 정도 되면 새로 붙일 거에요.조사자 : 도색을 전부 다 하는 거에요?김봉안 : 예 전부 다 하죠. 디자인이 바뀌었잖아요.조사자 : 이게 도색한지 얼마나 됐죠?김봉안 : 한 2,3개월 됐죠. 사장님께서 새해가 되면 다시 하실거에요.조사자 : (사장님께서) 서예를 하셨나요?김봉안 : 예, 잘하세요.조사자 : 글씨가 아무나 쓴 글씨 같지가 않네요?김봉안 : 예, (사장님께서) 위풍이 있으신 분이죠. 새해에 오면 다시 한 번 쓰실거에요.조사자 : 내년에요?김봉안 : 예, 내년에요. 항상 새해되면 새로운 각오로…. 그런 것 때문에 쓰시더라구요.
05 아천동 민속관 식당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아천동 300번지 11호 민속관 식당 입구에 입춘축이 붙어 있다. 한지에 검은 색 붓글씨로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입춘축 중앙에는 “立春大吉萬事亨通”이라 쓰여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千禍皆消滅”과 “四時大吉祥”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06 토평동 벌말 금줄 민속문화 > 가정신앙

아이를 남은 뒤 아이가 무사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여러 가지 금기를 지킨다. 가장먼저 마련하는 것이 금줄이다. 아이 아버지가 깨끗한 볏집을 골라 추린 다음 왼쪽으로 비벼가며 꼰다. 이것이 왼새끼로, 좌우 양쪽 끝은 자르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아기와 산모의 수명이 끊이지 않고 늘어나는 뜻이 담겨 있다.
보통 금줄은 태어난 아이가 남자이면 붉은 고추 3개와 숯덩이 3개를 엇바꾸어 가며 줄에 끼워 대문에 가로로 걸어둔다. 여자이면 청솔가지와 숯을 쓴다. 고추는 남성 상징인 데다가 붉은 빛은 잡귀를 쫓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청솔가지는 생명력과 정절의 표본이다. 또 숯은 부정을 없애는 물질이다. 3개씩 끼워두는 이유는 3이라는 슷자에는 상서로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줄은 보통 세 이레(21일) 동안 두었다가 거두어 불에 태운다. 백 일이 될 때까지 금줄을 거두어 한 쪽 기둥에 감아두는 곳도 있다.
이러한 금줄이 토평동 벌말 440번지 3호 집 대문 한쪽에서 조사되었다. 새끼에 고추를 매단 것으로 보아 아들을 낳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금줄이 쳐져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거두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들을 낳은 지 세 이레는 지났고 아직 백일은 안된 것으로 보인다. 제보자 이매화 씨에 의하면 마을에서 금줄을 걸어두는 민속은 지금도 여전히 집집마다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매화: 매년 그 뭐야, 우리 회장님들이 기금할려고, 모아서 이렇게 해 가지고. 저 구정때, 섣달 그믐 전까지 바가지하고 복조리하고 갖다 주고 가거든. 그럭허고 인제 저희가 주죠. 회장님들, 부녀회장님들한데.

왜 복조리를 걸어두고 있느냐는 물음에 제보자 김성선씨는 ‘걸어 두면 복이 들어을 것’ 이라고 답한다. 이는 복조리가 단지 마을 기금 마련을 위한 상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오는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세시의 한 민속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제보자 : 김성선(갈매동 담터마을, 1937년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8일, 10월 16일

07 수택2동 수늪마을 강호명씨 댁 입춘 부적 민속문화 > 가정신앙

수택2동 454번지 11호 강호명씨 댁 안방 문 위쪽 벽에 입춘 부적이 붙어 있었다. 며느리가 절에서 가지고 온 것을 입춘날 붙인 것이라 한다. 부적 가운데에는 검은 글씨로 “立春大吉 萬事如意亨通”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붉은색 글씨로 각각 “天下泰平春 人間五福來”,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이라 쓰여 있다.

08 수택2동 수늪마을 서성복씨 댁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옛부터 우리는 입춘이 오면, 각 가정에서 나라와 가족의 번영을 염원하는 뜻으로 대문, 기둥,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곤 했다. 이를 입춘축이라 하는데,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을 해서 써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입춘축을 수택2동 657번지에 위치한 5층 빌딩 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빌딩 소유자 서성복 씨가 직접 붓으로 써서 붙인 것이라 한다. 빌딩 1층에 들어서면 바로 정면 벽 위에 한지에 붓으로 쓴, “龍?福”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그리고 빌딩 내에 입주해 있는 에어로빅 체육관 입구에도 동일한 글귀가 붙어 있다. 서성복씨가 거주하고 있는 5층에도 여러 개의 입춘축이 있다.
대문에는 건물 다른 곳에서도 보았던 “龍?福”이라는 글귀와 함께 “立春大吉萬事亨通”이라는 글귀를 쓴 입춘축이 절에서 받아온 입춘부와 함께 붙여져 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는 “天福”이라는 글귀와 그 왼쪽에 좀 작은 글씨로 “無量光福”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 제보자 : 서성복씨 딸

□ 조사일자 : 2000년 9월 27일

09 수택동 이촌마을 이인수씨 댁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수택동 374-23번지 이인수씨 댁 현관 위쪽 유리창에는 붉은 색으로 “立春大吉”이라 쓰여진 입춘축 두 개가 사선으로 붙어 있다. 주택들이 현대화되면서 다세대 주택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대문 구실을 하는 현관에 이렇게 입춘축을 붙여 놓은 듯 하다. 붉은색으로 쓴 것은 붉은색이 갖는 벽사의 기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立春大吉”이라는 글귀를 통해서는 복을 빌고, 붉은 글씨를 통해서는 재액을 막는 것이다.

□ 조사일자 : 2000년 9월 30일

10 인창동 궁말 김종원씨 댁 입춘 부적 민속문화 > 가정신앙

인창동 563-22호 김종원씨 댁 현관 천장에 입춘부가 붙어 있다. 입춘 부적이 붉은 색으로 삼두매가 그려지고 다양한 부적 문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위에 중앙에는 검은 글씨로 “立春大吉 萬事亨通”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千禍皆消諸”, 오른쪽에는 “四時大吉祥”이라 쓰여 있다. 이 입춘 부적은 입춘날 아치울에 있는 대원사라는 절에서 받아와 새 철이 들어오는, 곧 입춘이 시작되는 시각에 맞추어 현관 천장에 붙인 것이라 한다. 절에서 스님이 알려 준 입춘날, 입춘시에 맞추어 붙여 놓은 것이다.

□ 제보자 : 이옥선(인창동 궁말, 1938년 생, 여)

□ 조사일자 : 2000년 9월 30일

11 인창동 인창1경로당 입춘축 민속문화 > 가정신앙

인창동 568번지 24호에 있는 인창1 경로당 입구에 “太歲庚辰萬事加意亨通”이라 쓰인 입춘부가 붙어 있다. 입춘날 경로당에 출입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직접 써서 붙인 것이라 한다.

□ 제보자 : 인창1 경로당 할아버지들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일

12 인창동 동창마을 이성근씨 댁 입춘 부적 민속문화 > 가정신앙

인창동 15번지 3호 이성근씨 댁 마루 기둥에는 입춘 부적이 붙어 있다. 가운데에는 검정색글씨로 “立春大吉萬事如意亨通”이라 쓰여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붉은 글씨로 각각 “天下泰平春人間五福來”, “父母千年壽子孫萬代榮”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입춘부는 매년 정월 초 사흗날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받아와서 붙인다고 한다.

□ 제보자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일

13 사노동 안말 방복선씨 댁 돼지업주저리 민속문화 > 가정신앙

업이란 집안의 재운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다. 업에는 보통 사람 업, 뱀업, 족제비업, 두꺼비업 등이 있다. 이러한 업은 집으로 들어왔다고 여기는 가정에서만 섬긴다. 업은 재물신격으로 모셔지며, 대개 뒤꼍의 주저리로 나타난다.
사노동 안말 282번지 1호 방복선씨 댁 뒤꼍 장독대에는 돼지업을 모셔놓은 짚주저리가 있다. 까만 색의 작은 항아리 속에 벼를 가득 놓고 짚주저리를 씌워 놓았다. 제보자인 방복선씨가 53년 전에 시집오기 전부터 시어머니가 만들어서 모셔오던 것을 이어받은 것이라 한다. 그 동안 이사를 다니면서도 돼지업주저리만은 계속 가지고 다녔다는 제보자는 돼지업주저리를 모시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복선 : 우리 할머니가 꿈을 꾸셨는데 돼지 새끼를 많이 낳아갔고 그거 해갔고 부자가 됐어요. 그래가지고 우리가 점점 나아졌어요 …(중략)… 우리 시어머니가 그 전에 꿈을 꾸시니까. 돼지가 큰 게 있는데 그냥 돼지 새끼를 낳아서 그렇게 받아 들이셨대요. 안으로. 안으로 받아들이시니까, 그때 어려워졌던 것이가 나아지고 저걸 맨기러 놓으드래요. 그래서 저걸 맨기러 놓은 거에요.조사자 : 어디 가서 물어봐서 만들어 놓으신 거에요?방복선 : 노인들끼리 얘기를 해서.

돼지업주저리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고사를 지낸다. 매년 음력 10월 초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 산치성을 끝내고 난 후, 날을 봐서 손 없는 날을 택해 집안 고사를 지낸다. 고사는 방복선 씨가 직접 지내는데, 올해로 53년이 되었다. 시집오기 전에는 시어머니가 고사를 지내어 왔는데, 이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며느리가 이어서 지낼 것이라고 한다. 고사는 고사를 지낼 때만 사용하는 시루에다가 하얀 떡을 해서 돼지 업주저리 앞에 놓고 지낸다. 이 고사 시루도 장독대에 함께 보관이 되어 있다.

□ 제보자 : 방복선(사노동 안말, 1931년 생, 여)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3일

14 사노동 안말 추기만씨 댁 터주주저리 민속문화 > 가정신앙

사노동 276번지 추기만씨 댁 뒤꼍 텃밭에 터주주저리가 있다. 작은옹기 항아리 안에 쌀을 담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볏집으로 주저리를 만들어 놓았고, 밑에는 평평한 돌을 깔아 놓았다. 터주주저리라고 부르는 이것을 모시는 이유에 대해 제보자 추기만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기만 : 태어나기 전부터 한 백 년 전도 넘지. 할머니 할아버지 뭐뭐 이렇게 쫘악 올라가지. 나 일흔 두 살인데, 어른들이 이렇게 허고 계신 걸을 없애기도 뭘 하고 해서, 내가 앞에다 바탕에 돌을 갖다 논거라고, 몇 일 전에, 몇 해 전에. 그리고 주저리는 내가 완전히 맨글어요. 내가 완전히 기술자야, 기술자. 이걸 트는데, 저거 트는데도 아무나 못 틀어요 …(중략)…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서부텀 계속 허니까, 그대로 허믄, 뭐 해서 좋은지 안 해서 좋은지 모르지만은 그 어른들이,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아버지 시아버지지. 뭐 허든 거였으니까 해서 손해보는 것도 없고.

터주주저리는 일 년에 한번씩 볏집을 새로 간다. 볏집을 구하지 못하면 사다가 만든다. 보통 음력 시월 달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 산치성이 끝나면 새로운 볏집으로 주저리를 만들고 고사를 지낸다. 터주주저리에 대한 고사는 이때 말고도 수시로 지내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기만 :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여. 만일에 내가 무슨 횡재를 했다, 돈을 벌었다했을 적에는 거기다 좀 놓고. 또 무슨 뭐 고사 날, 가을에 고사 날은 물른 해야 되고. 또 좋은 일이라면은, 좋은 일이 생겼을시에는 꼭 거기다가 술 막걸리를 해서 올려놓지.

□ 제보자 : 추기만(사노동 안말, 1929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3일

15 사노동 안말 추계훈씨 댁 터주 민속문화 > 가정신앙

터주는 집터를 지켜주는 집안 지킴이의 하나이다. 집 울타리 안을 주로 관장하는 신으로서 집의 뒤꼍이나 장독대 가까이 터주를 모시는 터주주저리를 만들어 둔다. 사노동 57-1번지 추계훈씨 댁 뒤꼍에 이러한 터주주저리가 모셔져 있다. 작은 항아리 안에다 쌀과 돈(백원짜리 동전과 천원짜리 지폐)을 넣어서 항아리 입구를 비닐로 싸고 뚜껑을 덮었고, 그 위에 짚주저리를 덮어놓았다. 제보자 추계훈 씨에 의하면, 아버지 때부터 모셔진 것으로 백여년이 넘게 모셔온 것이라 한다.
터주주저리를 모시면 재수가 있다고 해서 계속 모셔 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시월에 고사를 지낸다. 고사는 마을에 농사짓는 집에서 칠을 새로 구해서 주저리를 새로 만든 후에, 고사시루에다가 떡을 하나 해 놓고 막걸리와 북어 한 마리를 터주주저리 앞에다 올리고 지낸다.

□ 제보자 : 추계훈(사노동 안말, 1923년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3일

16 사노동 언재마을 서동우씨 댁 가정신앙 민속문화 > 가정신앙

사노동 375번지 서동우씨 댁에는 다양한 집안 신들이 모셔지고 있었다. 집안 신들은 뒤꼍에 4개의 짚 주저리 형태로 모셔져 있는 것과 안방과 마루에 선반을 만들어 상자를 올려놓은 형태로 모셔져 있는 것이 있었다.
뒤꼍에 있는 4개의 짚 주저리에서는 터주대감, 뱀업(긴업), 족제비업 등이 모셔진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제보자 이석남씨는,

이석남 : 꿈에 뱀업이 들어와 갔고, 그것 땜에 우리 큰 시누가 잘 살기는 잘 살지, 신작로에서 사는데, 아니 그걸 시집갈 때 달라고 그랬었대요. 근데 만약에 그걸 가지고 가면 우리가 못 사니까 할머니가 안 주셨다고 그러드라구. 가지고 간다는 소리도 했었대요, 시누가. 자기 집에 거기 한다고. 그 뱀업이 옛날에 부자되고 그런대요. 그래갔고 그것을 가지고 간다고도 했었대요.조사자 : 돼지, 족제비, 뱀이….이석남 : 족제비, 그게 하나가 족제비업일거야. 또 하나는….조사자 : 족제비업도 있어요?이석남 : 응, 들은 소리가 있어. 몰라 확실하지는 않은데, 하여튼 뱀업 그것은 우리 시누가 달라고 그랬는데 우리 할머니가 안 줬지. 건 가지고 가는 거 아니라고. 우리 시누가 그 소리 한 번 했어. 우리 큰 시누가 자기 꿈에 그걸 해가지고, 우리 큰 시누는 지금도 꿈을 꾸면 잘 맞춰. 집에 무슨 일이 있어갔고, 이상하다 그러면은 그래.

짚 주저리 안에는 각각 쌀?볍씨?콩?물 등이 담긴 항아리가 있으며, 해마다 농사가 잘되고 식구가 잘 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낸다. 이 같은 고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으로 집안을 보호하는 여러 신들과 조상을 위하는 것이라 한다. 현재 고사를 맡아서 하고 있는 이석남씨에 의하면, 해마다 겉의 짚주저리는 새로 갈지만, 안의 내용물은 시집와서 한 번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석남 씨 기억에 의하면, 예전에는 칠월 칠석에 시할머니가 막걸리 세 잔 부어 놓고, 아침일찍 남이 들어오기 전에, 호박으로 밀가루 부침개를 해 놓고 제를 지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석남 씨는 이러한 고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고 한다.

이석남 : 나는 그냥 젊어도 노인네들 하던 거라 그냥 믿는 거보다도 나한테 해가 안되니까. 옛날에 우리가 4대 살았을 때도 노인네들 하던 거 봤으니까 그냥 해요. 젊었다고 미신 안 믿는다고 그러는데, 거 미신도 아니지…?. (중략)…. 지금도 내가 술 한잔 부어놓고 가끔해요, 해기는. 우리 제사 음식 지내고 나서 내가 나물하고 갖다 놔요. 우리 제사가, 종가집이니까 제사가 많으니까. 난 몰라 이 다음에 집 지어도 그것을 없앨 마음은 없어. 왜 그러냐 하면은 마당에 이렇게 해 놓으면, 어디 지푸라기 이렇게 해서 잡아 놓으면 뭐 누가 뭐래? 뭐랠 사람은 없잖아. 그래가지고 지푸라기를 이렇게 해서 만들어 놓으면 그게 처음에는 예뻐요, 그게. 새 지푸라기를 갖다가 해놓으면.

서동우씨 댁의 집안 신은 안방과 마루에도 모셔져 있다. 안방과 마루에 모셔진 것은 ‘성주’라고 부른다. 원래 할머니 때 하나를 만들어 모셔 놓았다가 이석남씨가 시집오고 나서 하나를 더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안방과 마루에 선반을 만들어 그 위에다가 상자를 얹어 놓은 형태인데, 그 상자 속에는 아기 기저귀감으로 쓰이는 올베 한 필을 넣어 두었다.

□ 제보자

  • 함경환(사노동 언재마을, 1948년 생, 남)
  • 서동우(사노동 언재마을, 1954년 생, 남)
  • 이석남(사노동 언재마을, 1956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4일

17 갈매동 담터마을 김겅선씨 댁 복조리 민속문화 > 가정신앙

복조리는 보통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넘어 구입하여 벽에 걸어두었다. 쌀을 이는 기구인 조리를 걸어 두는 것으로 그 한 해의 행운을 쌀알과 같이 조리로 일어취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적 믿음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복조리는 복을 건진다는 의미, 불러들인 것을 거두어 모은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복조리는 한 쌍으로 구입하며 안방 방문 위에 한해 동안 걸어 둔다. 복조리 장사는 섣달 그믐밤부터 설날 새벽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복조리를 파는데 당일 돈을 받아 가는 것이아니라 나중에 받아간다. 그리고 값을 깎는 일이 금기시 된다. 이러한 복조리가 갈매동 담터마을 176번지 3호 김성선씨 댁 안방 문 위에 걸려 있었다.

김성선 : 매년 그 뭐야, 우리 회장님들이 기금할려고, 모아서 이렇게 해 가지고, 저 구정때, 섣달 그믐 전까지 바가지하고 복조리하고 갖다 주고 가거든. 그럭허고 기금은 인제 저희가 주죠. 회장님들, 부녀회장님들한테.

왜 복조리를 걸어두고 있느냐는 물음에 제보자 김성선씨는 ‘걸어 두면 복이 들어을 것’ 이라고 답한다. 이는 복조리가 단지 마을 기금 마련을 위한 상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오는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세시의 한 민속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제보자 : 김성선(갈매동 담터마을, 193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8일, 2000년 10월 16일

18 인창동 동창마을의 <도투마리경> 민속문화 > 가정신앙

동구동 동창마을의 「도투마리경」 읽기는 일종의 민간 의료의 한 형태로 보여진다. 의료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민간인들이 병이 들거나 의사의 진료가 필요할 때는 대개 비손을 하거나 개인이 치성굿을 통하여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온 민간 치료에 의존하여 병을 고치고자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민간요법의 경우로는

  • □ 배탈이 났을 때 소금을 먹는다.
  • □ 쇠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는 배를 먹는다.
  • □ 돼지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는 새우젓을 먹는다.
  • □ 딸꾹질을 할 때는 찬물을 먹는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활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으로 종종 효과를 보는 수도 있다. 이외에 어떤 내과나 외과적인 병이 아닌 경우, 예를 들면

  • □ 정신이 이상해서 헛소리를 할 때는 만신한테 가서 물어본다.
  • □ 담 결렸을 때는 수수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담든 곳을 세 번 친다.
  • □ 학질에 걸렸을 때는 갑자기 놀라게 한다.
  • □ 정신에 이상이 있을 때는 만신을 데려다 경을 읽는다.
  • □ 하루걸이(학질)에 걸리면 학질 걸린 사람을 멍석에 말아 소의 등위로 세 번 넘긴다.

이러한 종류는 병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민간요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 어떤 유감주술을 통하여 병을 낳게 해보고자 하는 바램이 들어있는 민간요법이라 할 것이다. 동창마을의 「도투마리경」은 예전 우리 조상들이 병이 들면, 병의 원인이 병을 옮기는 귀신에 의하여 발병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귀신을 몸에서 쫓아내는 방법의 하나로 사용한 ‘경(經)’을 읽는 방법의 하나로 보인다.
「도투마리경」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우선 <동법>이 나야 한다. 아마 이 동법이란 어떤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린 상황을 ‘동법이 났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동법이 났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고추를 아궁이에 넣어 태우고 그 냄새를 맡게 하는데, 동법에 걸린 사람은그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마을에서는 ‘동법을 잡는’ 행사를 하게 된다.
「도투마리경」을 읽어서 동법을 잡는 대상이 되는 것은 학질에 걸렸을 때, 초상집에 다녀와서 이유 없이 벌벌 떨고 아플 때, 새로 소를 사 왔는데 소가 먹지도 못하고 아플 때, 집에 새로 방을 한 칸 내었을 때 등 다양하다.

동법 잡는 방법을 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1. ① 우선 「도투마리경」을 읽기 전에 경문과 약간의 준비물을 마련한다. 이때의 준비물로는 나무로 눈 치우는 넉가래 모양을 만들고, 메밀떡 21개, 소금(호렴이 좋다고 한다) 한 접시, 미나리나물(무나물) 등 나물 3종류, 막걸리 등을 준비한다.
  2. ② 소금(호렴)을 손에 쥐고, 왼발을 세 번 굴리면서 “태세 도투마리 부적장군 들어가니 동법귀신 썩 물러가라.” “쉐!”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동시에 손에 쥔 소금을 뿌린다.
  3. ③ 이때 미리 막걸리를 한 잔 부어 놓는다.
  4. ④ 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각성바지 3사람이 동시에 “태세 동법귀신 썩 물러가라”라고 읽어야만 한다.
  5. ⑤ 경을 읽을 때는(아래 경문참조), ‘사파’로 끝을 맺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도투마리경」은 7번을 반복해서 읽는다.

「도투마리경」을 읽기 시작한 유래에 대해서는 동네 사람들도 모르고 있으며, 막연히 500년 혹은 600년 전부터 읽어온 것이라 하였으며, 한 때는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서 동창마을만이 아니고, 서울의 청량리, 장위동이나 퇴계원 등지에서도 병이 나면 동창마을에서 사람을 모셔와 동법잡기를 시행했다고 한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마을 사람들도 어릴 때까지만 해도 동법잡기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하며, 동법잡기를 하면 신기하게도 병이 다 낫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래는 「도투마리경」 읽기에 대한 동창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것이다.

강한만 : 우리 위로는 옛날에 이게 심했는데 동법만 나면 「도투마리경」을 읽어요. 그러면은 지신도 구신도 없어져요. 학질 뭐 그렇게 고뿔 학질 이런 거 심하게 걸린 거 모양으로 그냥 추워서 떨리고.황춘균 : 밤에 막 덜덜덜덜 떨고 그냥 막 열이 나고 그러는 거는 이제 「도투마리경」을 읽어서, 만약 이 집이가 새로 이사오거나, 또 옆에다 방을 하나 새로 또 꾸미거나, 또 뭘 하나 마굿간에 소마굿간에다 뭘 나무때기 하나를 대거나 그럼 이제 탈이 나면「도투마리경」을 읽어. 거기다 막 「도투마리경」을 읽고, 거 수수떡 옛날 수수떡 꼬챙이에다가 끼고 담에다가 화살로 쏘고 그러면 이제 나요. 그래서 옛날에 그게 있었어요.조사자 : 그 경은 뭐 특별히 정해진 분이 읽습니까, 아니면….황춘균 : 그건 아무나 못 허죠. 그래도 남들은 짜고 한다고 그러는데, 그거 아니예요. 세 사람씩 세 사람씩 짝이 있어야 되요. 혼잔 못해요. 근데 널빤지도 이렇게 이런 건데, 눈치우는 거, 눈치우는 거 있잖아요, 옛날에. 그걸 아래 위로 거꾸로 둘을 매가지고 딱 붙들면 이게 꼼짝도 안해요. 암만 장사가 와도 못 디미려요. 그 분들이 딱붙들고 허면, “태세 도투마리경 부적장군 들어간다” 그걸 외게 되면 이놈은 꼼짝도 않해요. 헌데 옛날에 그런 게 있었어요. 피란가서도 그걸 우리 동창서 저 우리 동구면에 가서, 광주, 용인, 평택 가서 그 어려울 때도 밥을 얻어먹고, 우리가 발도 자루로 얻어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그때 누가 쌀 줘요. 헌데 하 그냥 몸은 아파, 그때 염병인지 뭔지 열병이라는데, 그걸 「도투마리경」이면 나아요. 그러니까 또 그냥 와서 해가지고.강한만 : 동법인지 어떻게 아냐 하면은 동법에는 거 옛날에는 저 소 솥에다가 인제 아궁지를 맨들어 가지고 장작불을 떼지 않아요. 그러면은 거기서 떼면은 그냥 그걸 떼면은, 저 아궁지로 태면은, 그게 고추 그냥 타는 냄새가 왼 집안을 아주 그냥 요동을 쳐요 그냥, 냄새, 큰 기침하고 뭐.황춘균 : 일부러 고추를 땝니다. 고추 이제 거기 가을에 그 내비 쪼시며 어울리지 않아요? 거 우리가 때면요 매워요.강한만 : 그런데 동법이 걸렸으면은 냄새가 하나도 안나요.황춘균 : 그땐 그걸 갖다가 일부러 때는 거예요.강한만 : 그래서 잡는 거예요.조사자 : 동법?황춘균 : 동법을 잡는다고. 고추를 아궁이에 때고, 여기다가 「도투마리경」 읽는 것을 써서 붙입니다.

강한만이 입이 말라서 얘기를 할수 없다고 하며, 물을 뜨러 간다. 이성근이 왔다.

이성근 : 적어가지고 왔어?조사자 : 그게 「도투마리경」이예요?황춘균 : 네 「도투마리경」.조사자 : 한 번 읽어보실 수 있으세요?이성근 : 있죠.조사자 : 실제 하는 것처럼.황춘균 : (읽는다)강한만 : 아니 이거 처음에 읽을 제, 넉가래를 마주해 가지고.황춘균 : 넉가래 라는 게 있습니다, 이렇게. 널빤지로 눈치는 거, 옛날 눈치는 거 둘을 가꾸로 묶어요. 두 개를 꽉 쥐고 벽에다 대놓고….이성근 : 내가 얘길 가르켜 드릴게. 메밀떡 요런 거 있잖아요. 고거 스물 하나, 또 소금 한접시. 또….강한만 : 미나리 나물….황춘균 : 미나리 나물이나 무 나물이성근 : 미나리 나물이나 무 나물이나 세 가지.강한만 : 무 나물은 아냐.황춘균 : 무 나물도 넣죠.강한만 : 무 나물은 안 들어가.이성근 : 소금을 먼점 쥐거든요. 동, 이걸 읽을 때.조사자 : 예. 읽을 때 소금을 잡고.이성근 : 먼저 확 뿌리고조사자 : 어디다 뿌려요?이성근 : 그 넉가래 있는 데다.황춘균 : 아니 그게 아니고요. 오늘 이제 이 집에 오늘 소 마굿간을 새로 짓던지 뭐헌데, 거기다 대고 끼얹이는 거예요. 방을 고쳤던지, 뭐 부뚜막을 고쳤던지 거기다가 끼얹이는 거예요.이성근 : 여기다 이제 냅다 먼저 끼얹이고, 냅다 왼발을 세 번 굴러요, 팍팍, 그러구 “태세도투마리 부적장군 들어가니 동법귀신 썩 물러가라 쉐” 하고 던지는 거예요.황춘균 : 왼발을 구르고, 왼발을 광꽝 굴러요, 왼발을,이성근 : 왼발을. 또 술도 한잔 부어놔야 한다고.황춘균 : 막걸리를 붓고이성근 : 그건 격식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러믄 세 번만 혼자 읽으면 사흘을 읽고, 또 세분이 각성바지가 읽어야 해요.황춘균 : 각성바지예요. 한 사람이 읽는 게 아니예요. 똑같으믄 안되죠.이성근 : 성이 똑같은 사람 말고, 각성바지가 세 사람이황춘균 : 김씨, 이씨, 박씨든지.이성근 : 똑같이 일시에 허거든요. “태세 동법귀신 씩 물러가라”조사자 : 셋이 똑같이요?이성근 : 예, 셋이 서서.황춘균 : 세 사람이 같이 서서 똑같이 불르는데, 성은 틀려야 되요.이성근 : 성은 각성바지가 해야죠. 그러구 냅다 왼발을 썩 굴르고.황춘균 : 그냥 쾅쾅 울려요.이성근 : 소금을 냅다 끼얹고, 거 메밀떡 고거 있잖아, 스물 한 개 해온 걸.황춘균 : 여기 수수떡허고 소금을 막 끼얹이는 거예요.이성근 : 냅다 그냥 그리 끼얹어 후려쳐서 물러가라고. 그 방법이라구요. 이게 유교에서 나온거야. 옛날부터 있었어. 오백년 전부터 있었어.황춘균 : 거 왜냐하면, 옛날에는 저 마굿간을 짓든지, 닭 저저 집에 새로 옆에다 뭘 하날 이렇게 지으믄, 나무가 들어와서 동티가 난다는 거야, 나무가 들어와서. 산에서 나무가 몰래 베서 지었으니까 그 나무가 동티가 났다 그래가지고 거기다 도투마리읽고. 무신 저….강한만 : 거 나무만 나는게 아냐.황춘균 : 나무도 아니고 짐승이라든지.이성근 : 흙을 달던지, 돌을 달던지, 뭐 이 고침을,황춘균 : 하다못해 방하나 이렇게 뜯어 고쳐도 동티가 났어요. 그걸 동티라고 하는 거예요.이성근 : 거 동법이라는거는.강한만 : 저 저걸 보면 삼설방이니 뭐 그런 걸 말을 하더라고.이성근 : 이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허는데. 도투마리 그 앓는 사람이 있거든요, 병자가. 그밤이면 더겁고 떨고 앓아요, 말짱했다가.황춘균 : 학질 걸리면 그래요. 막 덜덜덜덜 떨어요.이성근 : 떨고 앓으면‥‥황춘균 : 이불을 덮어줘도 이렇게 들떠요.이성근 : 그것을 동법인가 아닌가 보는 법이 있어요.조사자 : 예.이성근 : 불에다가 저걸 태요. 고추, 고추를 태고 동법이래면 그 고추가 매웁지가 않아요, 통.조사자 : 냄새가 안나나요?이성근 : 안 나고.황춘균 : 안 매웁고요.이성근 : 동법이래면 매워서 사람이, 동법 아니면 그냥 매워서….황춘균 : 도망가야 되요.이성근 : 고추를 피니까.조사자 : 그러니까 고추를 피우는 걸로 병을 알아보는 거죠.이성근 : 그 방법으로 아는 거예요.황춘균 : 그걸로 동법인가 아닌가 확인하는 거죠.조사자 : 동법일 경우에 「도투마리경」을 읽는 거죠.이성근 : 그렇죠. 그렇지 않을 경우엔….황춘균 : 그러면 빨리 읽어야죠.이성근 : 고추는 불에다 노믄 매웁지 않아요? 그냥 냄새가 지더분하고. 헌데 그걸 그런 동법 읽을 거믄, 이걸로 읽을 거믄 냄새가황춘균 : 냄새가 맵지 않다는 거죠.이성근 : 안나요. 허니까 그건 신의 놀음이다 그러니까 쫓아 버려야 한다 해가지고 이게 허는 거예요.조사자 : 「도투마리경」은 어디서 언제 배우신 것들이예요?이성근 : 이게 옛날에.황춘균 : 우리도 모르지.강한만 : 몇 대 선조에서부터 계속.황춘균 : 이 동네 할아버지들이 계속 내려주신 거예요.조사자 : 마을에서 계속 내려‥‥강한만 : 계속해서 몇 백 년 전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이성근 : 근데 이게 이 저 『주역』같은 데 보면 있어요, 이 경법이.황춘균 : 여기만 아니고 딴 데서도 허드라구요.이성근 : 이 『주역』 같은 데는 글에 다 있어요. 이 중국 역사여.황춘균 : 여기 이것이 강태공이 귀신을 아주, 귀신이 아주 무서워하거든. 그래 강태공이 하마처라 하면은 귀신이 물러난다 말이야, 그 자리에서.강한만 : 어따 뭘 썼는지 그렇게 고추를 태워보면 냄새가 지독하게 나거든. 그러면 매웁고 그런 냄새가 지독하게 나면은 동법이예요. 그러니까는 저 동법….이성근 : 아이, 동법이면 안난다구요, 그게.강한만 : 동법이면 안나고 동법이 아니며는 몹시 나요. 그걸 보고 아는데. 이제 어떤 요기저기 이 추녀 밑에다가 쌓았던지, 뭘 달았던지, 다른 걸 집었던지, 그래 뭘 했으며는 그게 그것이 의심이 난다 하면은 거기 가서 이제 읽는단 말이예요. 거 옛날엔 세 사람이 이제 하루 저녁에 세 사람이 읽으며는 하루 저녁이면 되는데, 혼자 읽으며는 사흘 저녁을 읽어야 되요. 그런데 아까모양으로 저 이 메밀떡 스물 한 개, 또 저 미나리.황춘균 : 미나리 나물.강한만 : 미나리 나물 그거 삶아서 그걸 해 놓고, 이제 술 부어 놓고, 호렴을 이 만한 대접으로 하나….황춘균 : 소금을 이만한 대접으로 갖다가 끼얹이는 거죠.강한만 : 것다 내고, 시발에다 디리 끼얹어야 돼. 그래 가지고서 시작을 하는데 인제, 거 그 단 그 앞에 가서 상을 이렇게 놓고서, 그 메밀떡이고 뭐고 다 거기 갖다 놓고, 이제 저 이 뭐야.이성근 : 뭐가 있어 또, 이제 고만이지.강한만 : 아니, 소금 놓고이성근 : 메밀떡 놓고황춘균 : 메밀떡 놓고 막걸리 놓고이성근 : 막걸리 술 한 잔 부어 놓고 그거지 뭐야.강한만 : 그거 놓고, 넉가래 맨들어 가지고,이성근 : 가꾸로 해, 넉가래는 반대다 붙들어 가지고.강한만 : 넉가래는 이렇게 이렇게 허며는 여긴 자루고, 여기는….황춘균 : 옛날 눈치는 거, 그거예요. 거꾸로 매달아 놓은거.이성근 : 넉가래가 어디 있나, 맨드르면 되니까.강한만 : 여 삽같이 됐어요. 그러고 삽 같이 된 걸, 마주 이렇게이성근 : 양쪽으로강한만 : 마주 붙들어 매가지고선, 거기다가 이걸 써야 되요.(「도투마리경」 쓴 것을 내보인다)이성근 : 붙이죠.강한만 : 써서 붙이고황춘균 : 써서 붙이고 읽는 거예요.강한만 : 이걸 써서 가꾸로 붙여요.조사자 : 거꾸로요?강한만 : 어.황춘균 : 솜방망이로 불을 붙여 줘야 읽는다고 또, 옆에 솜방망이로 불을 붙여 줘요.강한만 : 좨 외니까는 솜방망이 필요 없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이제 그 넉가래를 붙들고 소금을, 집어 가지고서 이 넉가래를 광꽝 울르고.황춘균 : 왼발로.강한만 : 소금을 쥐고, 태세 도투마리 들어…?. 뭐야 저 잊어 버렸네.황춘균 : 도투마리 부적장군 물러가라.이성근 : 아 도투마리 부적장군 동복귀신 썩 물러가라고 왼발 콱콱 굴르는 거지, 뭐 그런 얘길 더듬고, 어고 어고 참.강한만 : 썩 물러가라 이제 좀 쉬었거든. 그래가지고서 오작이 ‘사파’하고, ‘사파’하고선 거기서 저 쐭쐭쇡 허지 마러. 사파 허고서 다시 오작이 교, 오작이를 일곱 번을 읽어요. 일곱 번을 읽고, 일곱 번을 읽고서 일곱 번째 소금허고 미나리 나물하고 메밀떡허고.황춘균 : 내던지는 거죠.강한만 : 그래가지고서, 쐭쐭쐭(발을 구른다)세 번 한단 말이야. 그러면 한 군데는 됐어요.황춘균 : 잘하셨어요.강한만 : 거 인제 다른 데 또 허는 데가 있으며는, 거 또 나서서 갖다가 해야되요.조사자 : 아까 사흘을 읽는다고 그랬는데요. 아까 읽었던 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는 거예요?강한만 : 반복허는 거지.황춘균 : 예.이성근 : 혼자 허면 사흘인데황춘꾼 : 세 사람이 허거든요, 세 사람, 각성바지래야 되요.강한만 : 하루만 읽어도, 하루만 읽어도 나으니까는, 사흘을 읽지 마는 거지. 사흘을 읽는 것은 혼자 해야 사흘을 읽는 거예요.황춘균 : 혼잔 사흘, 셋이.강한만 : 셋이 허면 하루믄 되고.황춘균 : 거 땡겨서 세 사람이 읽는 거죠.조사자 : 동티가 난 장소에서 한 번만 읽으면 되는 거예요?강한만 : 한 번 읽는데, 한번 읽는 것이 이걸(부적을 보이며) 일곱 번을 되 외워야 된다 말이예요.황춘균 : 연거퍼, 돌아가면서 하는 거죠.강한만 : 사파허고선 다시 오작이로 돌아가야 되요.김동수 : 그 뜻도 설명을 해주세요. 사파는 뭐고 오작이는 뭐래는지.강한만 : 사파래는 거는, 갈라져라 그….황춘균 : 이 모든 것이 다 귀신으로, 사방으로 사죽으로 다 물러가라는 거야.김동수 : 또 오작이는 뭐예요?황춘균 : 오작이 귀신이, 귀신 오 자 아냐. 귀신을….강한만 : 까마귀 오자, 저 이 뭐야 새 작 자 아녀?김동수 : 예.강한만 : 까막까치, 까막까치가 동서남북을 어떻게 알랴? 이거야. 오작이 교서하니 까막까치가 혼인을 해 가지고서 사는데 동서남북을 무엇을 어디로 난지 아느냐 그런 거야. 오작이 교서하니, 오작이가 서로, 오작이 서로 혼인을 해서 사니까, 교서, 교서라는 것은 저 서로 혼인을 하고 있는….조사자 : 그리고 아까 메밀떡을 스물 한 개 만든다고 그랬거든요. 왜 스물 한 개를 만드는 거죠?황춘균 : 메밀떡이 요만하게 작게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가지고.이성근 : 도투리 만하게, 도투리.조사자 : 왜 스물 한 개죠?강한만 : 스물 한 개, 삼 칠은 이십 일이성근 : 스물 한 개야.강한만 : 저 이 세 군데를 예상하고서는 스물 한 개라 한 거예요. 여기 읽는 것도 왜 일곱번을 허냐 그러면은, 거 삼칠은 이십일이기 땜에 떡도 스물 한 개, 저 읽는 것도 스물 하나. 그러니까 일곱 번을 읽으면 스물 하나가 된다 말이야.김영배 : 세 명이서 일곱 번을 읽으니까 스물 하나인 모양이구나.황춘균 : 셋이서 삼칠은 이십 일요.강한만 : 그 인제, 그거 한 군데서 스물 한 번을 읽고, 쐭쐭쐭. 다른 데가 있으면 다른 데로 가서 허되, 다른 데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되해요.황춘균 : 그만두는 거지.강한만 : 되 한다고, 되.조사자 : 다시?강한만 : 응, 다시 헌다고. 그래서 스물 한번을 거기서 읽고 나서, 인제 저 다 내버리고 그저 호렴을 가지고 가서, 이 저 뒤 울안에 다시 쐭쐭 하고.황춘균 : 집안에 기둥, 사방 기둥에 가서 끼얹는 거지, 기둥.강한만 : 그러면, 도투마리며는 그 날 저녁으로 나아요.조사자 : 도투마리가 무슨 뜻이죠?강한만 : 동법.이성근 : 동법이 나는데 거 또 아프다고요. 이렇게 염병 앓는 거 보다 더 무서워요.황춘균 : 그러니까 옛날에 이제 만약에 초상집.조사자 : 학질 같은 건가요?황춘균 : 아니예요. 이제 초상집 가잖아요, 초상집, 상갓집에 가면, 상갓집에 갔다 와서 괜히 아퍼. 멀쩡허던 상갓집 갔다 오면 그냥 막 덜덜 떨고 밤에 앓고 그럴때면, 그 “당신 어저께 어디 갔다 왔소” “초상집 갔다 왔어” 초상집 갔다 와서 그게 탈이 난 거예요. 그래서 그 도투마리 읽고 그러는 거고. 또 소를 새로 사와도, 큰 소를 사와도 소가 오며는 그냥 막 설사를 하고, 소가 막 쓰러지고 그러면 또 도투마리 읽고 낫고 그러구, 그 전에는 그랬어요.조사자 : 젊은 분들 가운데 직접 했던 경험들 있으세요?김동수 : 저희가, 내가 그니까 초등학교 다닐 적에, 그니깐 내가 지금 마흔 아홉이거든요. 그니까는 한 삼십 오 년 전, 그때 지금 저기 저 윤석이네 아저씨가 … 같은 데에서 그거 많이 해주셨어요. 그런 거 기억을 허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모르죠. 어렸을때 들었던 것이기 때문에.황춘균 : 거 뭐가 뭔지 모르지,강한만 : 이제 엎드려서 일하고 와서 저녁이면, 거짐 여러 군데에서 와서 불러요. 그래 저녁만 먹으면.황춘균 : 그땐 약방이 없거든요.강한만 : 어쩔 수 없이 불르면 가서 또 그걸 읽고서, 거기서 또 술을 그땐 좋아했으니까.황춘균 : 거 막걸리 남은 거 먹고.강한만 : 술을 한 잔 먹고 그러고서 또 오는데. 거 또 그걸 읽으면 분명히 그냥 그 날 저녁.황춘균 : 나아요.강한만 : 자고 나며는, 씻은 듯 벗은 듯 허거든.황춘균 : 열병도 나고.이성근 : 거 타동에도 가서 해줬다고. 저 웃말 있는데, 갈뫼 그런데서 했어요.황춘균 : 거 저 여기 이 동네에서 청량리도 해드리고, 저 장위동, 이 저 퇴계원 쪽으로 저 광문리꺼정 가서, 그때 그거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조사자 : 다른 마을에서도 비슷한 게 이런 게 없었나요?이성근 : 없어요.강한만 : 없어요.황춘균 : 이거 배울래도 못 외요.강한만 : 거 여기서 좌근방에선 「도투마리경」만 읽으려면 여기서 사람을 사 가요.김동수 : 저 아저씨가 제일 많이황춘균 : 게 또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세 분인데.이성근 : 환이황춘균 : 예 환이하고 저저 잘하셨죠.강한만 : 거 잘 뎅기는 친구가 이 한 서너명 있었는데황춘균 : 저 차대기 씨 허고 세 분강한만 : 죄 죽고 나만 남았어.김동수 : 그 세 분들이 많이 해주셨죠, 옛날에. 우리가 옛날에 여기가 백 이십 세대거든요, 동네가 동창마을이. 백 이십 세댄데. 백 이십 세대가 살다 보면은 이렇게 탈 같은거 나기도 하고 그러기도 하잖아요. 그럴 적에는 이제 그 겨울에 눈치는 넉가래라고 있는데, 거기다 특별한 게 옛날엔 없으니까, 거기다 종이로, 한지죠 한지, 창호지에다 써 가지고, 보통 인제 붙여 놓으시면은. 뭐 제가 기억하는 거는 아까 그 메밀로 경단 얘기하시는데, 소금은 제가 기억을 많이 해요. 소금하고 미나리는, 그런 걸 허는데, 보통 지금 같은 이러한 집이 아니고 옛날 뭐 초가집 이럴 적에는 보통 집 뒤에 가면, 울타리 같은 데 있잖아요. 보통 장독간 같은데, 집 뒤간에서, 집뒷켠에서 많이 하신 걸로 기억을 하거든요, 보통 이렇게 할 때 보면은. 그래 인제 소 같은 거 아까 사오는 거 얘기하는데, 소 사와서 그럴 땐, 외양간 같은 데, 그런데다가 그거 저기 넉가래에 써 가지고 놓고 세 분이서 발 굴러가면서 이런 식으로 하고, 그런 기억은 저희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이성근 : 어 소도 거뜬하게 낫는다고.조사자 : 소 병 낫는거 보셨습니까?김동수 : 거 저 소가 설사를 하고, 뭐 콩 같은 거 여물 같은 거 콩깍지에 해 주면, 잘 먹지도 않고 드러눠만 있고 그렇단 말이야. 그러며는 농번기 때 일도 하러 나가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소가 큰 자산이잖아요. 소 같이 큰 자산이 없으니까는 소 한 마리가 사람 다섯 품이거든요, 옛날로 따지며는. 그래 소가 병나면 안되니까는 이제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뭐, 옛날엔 특별하게 약이 없으니까는 그런 식으로 해서 그랬죠.강한만 : 부적은 요거만 가지은, 외고 쐭쐭쐭 하는 거까지 적어가지고서 부적을 붙이고. 소금은 호렴이 좋다.황춘균 : 아니 그 때 그전에 메밀떡을 할 때는 수수깡에다 꿰 가지고, 화살로 같은데다 쏘고난 그것도 봤다구요. 그죠? 거 이상하다. 저거 왜지. 근데 데고 화살로 쏘아요 그냥. 근데 떡이니까 쏘아도 소나 다치지도 않고 그냥 쏘더라고. 메밀로 해 가지고 저 수수깡대 있잖아 그 앞을 짤라 가지고 꼬챙이다 그 떡을 탁 쏘니까 이거 맞죠.강한만 : 나는 몰라.

「도투마리경」 읽기와 내용

김동수 : 지난번에 왔을 때도 말씀드렸지만은 「도투마리경」이라는 것은 그 용어도 모르고 하는 데가 없어요.황춘균 : 도투마리는 옛날부터 이 근처….김동수 : 이 근처에서도 그러한 게 있어나 하고 아는 사람도 없어요.강한만 : 도투마리, 요 가근방엔 없어요.황춘균 : 몰라요. 「도투마리경」이 뭐냐고 그런다고.이성근 : 아마 이 백리 안으론 다 모른다고.김동수 : 이거를 이 근방에서는 우리 동네 뿐만 아니라 인근 동네 사람들이 그러한 부작용이 일어나면은 여기서 가서 해주셨다고.황춘균 : 그 전에 임금님, 임금님이나 누가 저저 궁에가 아프시면 그게 헌다고. 그걸 따라서 누가 해준 걸 어디서 따라 헌거야. 그거 같아 딴 사람 몰라요. 어디 경상도 어디가다 가도 그런 소리 모른다고. 그런데 여기는 옛날 궁에서 나와 가지고 인제….

「도투마리경」의 내용

태세, 도투마리, 부적장군 들어가니 동토지신은 썩, 물러서(가)라
오작이 교서하니, 불지동서남북이라
동서남북제신은, 무남북하가은
하처, 유동서라, 태세왕의 부는 금귀요
모는 을명부인, 병부왕의 부는 대명귀요
모는 황천부인, 각장여장의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에, 하마처라, 어명급급명월
명, 사파
오작이 교서하니, 불지동서남북이라
동서남북제신은, 무남북하가은
하처, 유동서라, 태세왕의 부는 금귀요
모는 을명부인, 병부왕의 부는 대명귀요
모는 황천부인, 각장여장의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에, 하마처라, 어명급급명월
명, 사파

이것을 일곱 번 읽는다. 일곱 번째 소금하고 미나리 나물하고 메밀떡하고 던지면서 발을구르며, 쐭쐭쐭

<경 내용>

태세, 도투마리, 부적장군 (들어가니) 동토지신은
썩, 물러서(가)라
오작이 교수하니, 불지(부지)동서남북이라
동서남북제신은, 무남북하가은
하처, 유동서라, 태세왕의 부는 금귀(세)요
모는 을명부인, 병부왕의 부는 대명귀요
모는 황천부인, 각장여장의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에, 하마처라, 어명급급명월
명, 사파 쐭쐭쐭

□ 제보자 : 강한만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6일

  • 01 장자늪이 생긴 이유
  • 02 기어가는 용을 두들겨 잡은 기륭둥지
  • 03 용마산 아기장수
  • 04 군인으로 변한 동구릉 나무와 건원릉의 갈대군사
  • 05 대성암 쌀 바위
  • 06 기타
01 장자늪이 생긴 이유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수택동 우미내 쪽에 옛날에 장자늪이 있었다. 장자늪과 관련된 전승을 채록하였다.

김무희 : 옛날에 저 이 동냥을 하러 왔는데, 중이 참 시주를 하러 왔는데, 시주를 하러 왔는데요. 아 이 영감이 시주를 안주고 소똥을 그 표주박에다 떠붓잖아요. 그리고서 인제 그러구 그이가 갔는데, 며느리더러 뒤도 돌아다보지 말고 날 쫓아오라고 그랬거든요. 나도 노인네 한테 들었는데 많이 잊어 버렸죠. 아 그랬는데 그이가 참며느리가 그냥 그래도 그 중을 쫓아가다 뒤를 돌아 봤데요. 그래서 거기서 그냥 그 벼락을 쳐죽였잖아요. 그래서 그 웅뎅이가 그래 그게 그거예요.조사자 : 아 장자못.김무희 : 어 장자늪이라는게 그게 그런거죠. 그리고 장자늪이죠.이성근 : 장자못이 여러 가지덜 이야기하니까 몰라, 내가 알기는 그 전에 듣기는 거기 부자가 살았데, 그 장자못 옆에, 아주 부자가, 참 아주 더러운 부자가 살아서조사자 및 청중들 : 더러운 부자….(웃음)이성근 : 그 웅덩이는 땅이 죄다 자기 땅인데, 심통이 그렇게 못됐데요. 하루는 저녁 때 시주 좀 하라고 중이 가니까, 시주는 무슨 시주냐고 중이 가만히 놀고, 일도 안하고 동냥이나 얻으러 다닌다고 욕을 하고, 거 가져갈 거 없거든 이 쇠똥이나 가져가라 그리고 그냥 쇠스랑으로 꽉 찍어서 표주박에다 꾹꾹 담아서 바랑에다 퍼줬데. 게 그러니까 조기가다가 죄 털어버리고 이러는데, 그때 저녁때가 되니까 며느리가 나와서 그 중을 보니까, 왜 그냥 보내면 그냥 보내지 바랑에다 똥을 쳐 주느냐고 그걸 쏟아 버리고 딸을 한 되박 줬데 그러니까 그걸 받질 않고, 그걸 거기 두고 날 쫓아오너라 그랬데, 중이. 게 인제 거기서 저 아치울쪽으로 가니까 별안간 벼락을 내리치드라네, 거기를황춘균 : 천둥허고요.이성근 : 그래 천둥허고 벼락을 쳤는데. 그리곤 중이 허면서 벼락을 아무 소리가 나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나만 쫓아 오너라 그랬는데, 거 우미뎅이 모퉁이 가다가, 하 거기가 지끈거리고 번개를 치고 벼락을 내리치니까 그냥 힐끗 돌아 봤데. 아이고 너도 그 더러운 놈의 집 마음을 그래도 못잊어서 돌아보느냐고 그러구, 부처를, 목 딱부러진 부처를, 돌맹이 하나를 세워봤어. 허 그랬데는 이야기뿐이야.황춘균 : 거 노송벽력을 치고 그러니 겁이 났죠이성근 : 게 뒤 돌아보지 말고 오라고 그랬으믄, 그게 부처가 되는 건데, 착해서. 거기 그 더러운 마음을 못 잊어서 또 돌아봤단 말이야. 목 부러진 부처가 됐어.황춘균 : 아이구 이 노송벽력 우루루 뚝딱 빗방울은 뚝뚝 번개는 번쩍치는데 거 안 돌아볼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이성근 : 뭘 돌아봐, 돌아보질 말라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더러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거야.

□ 제보자

  • 김무희(동창마을, 1917년 생, 여)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6일

우미내쪽에 옛날에 이 장자늪이라구 거기 있었어요. 장자늪이 하나. 근데 그집이 부잔데, 잘 사는데 인심이 나쁘다구 그런 소린 있어요. 근데 어떤 대사가 그 집이 하두 인심이 나쁘니깐. 통 남이 뭘 달래면 주지 않구 그런 구드쇠길래 그래서 대사가 가서 시줄 좀 하래니까 뭐왔느냐구, 뭘 줄게 있느냐구 안 주드래. 그래드니 이거나 퍼 가지구 가라구 마구간에 있는 쇠똥이나 가져 가라구. 쇠스랑으루 찍어서 표주박에다 하나를 채워 주드래요. 그래 며느리가 저녁, 아니 낮에 점심을 질려고 밥상을 놓다고 가만히 보니까 아주 그거 안 됐드래. 안 주면 그냥 안 줬지 으떻게 표주박에 쇠똥을 담아 주느냐 말이야. 이거나 가지구 가라구. 그래 며느리가 보구는 안 돼서, 중이 저만치 가는 것을 불러서 쌀을 건져서 이렇게 표주박에 다 주구갔대. 갔는데 중일 허는 말이 “이 집에서 살지 말고 나를 따라 오라.”구 그했대요. 그래 “왜 그러냐?”구, “두말 할 것 없이 나를 부지런히 따라 오라.”구 그래군 저 우미내 모퉁에, 그 광나루허구 우미내 허구 이렇게 새(사이)인데, 거기 거 산마루턱에 거길 갔는데, 그냥 그 뒤에선 벌써 천둥번개를 허구 벼락을 쳤대.조사자 : 네근데 뒤를 돌아보지 말랬는데, 뒤를 이렇게 못 잊어서 돌아봤단 말이지. 즈이 집이니까, 아 그랜 바람에 그냥 목 뿌러진 부처를 하날 세놓구 없어줬어. 그래 그 장자늪이 됐어. 그 집터가. 베락을 치구 디리 그냥 물이 그냥 거길 다리쳐서.조사자 : 거기 장자늪인가 뭐 있는데 그거 말하는 거예요? 그게요?예. 그게 장자늪이라구. 그런데 다 읎어졌어.조사자 : 옛날에 장자가 살던 데예요? 거가.거가 부자루 잘 살았대 그래 그랬다는 말은 있습디다. 그것두 뭐 우리두 보질 못했는데 그전에 저 광나루를 가다보면, 고 우미내 모퉁일 돌아가다가 고, 산 위에 다가 당을 하날 지놓구, 그게 또 부처두 목 부러진 부처야. 그걸 돌아보지 않았으면 부처가 될 건데. 거기가 즈이집이 물에강한길 : 죽지 않았지?예?강한길 : 죽지 않았지….그렇죠. 그런데 거길 돌아봐서 모강지가 떨어져 나갔대.이금석 : 장자늪에서 한강으루 굴이 뚫렸대. 그래서 이무기가 거길 드나들었대. 거기가. 그래 그런 소리두 있으니까 그건 몰라.조사자 : 누가 장자늪으로 드나들었어요?이금석 : 이무기.한강하구 통했다구 땅 속으로 굴이 뚫려서 들어갔다 나갔다 그랬는데, 이무기를 누가 봤소? 못 봤어. 이무기두 못 보구.강한길 : 아 저 왜 있잖어? 비. 비 했잖어.뭐?이금석 : 길거리에 해 세웠잖어?그거 목 뿌러진 거지요. 목 뿌러진 비죠.이금석 : 글세 그거 있지?예. 그건 있어요.이금석 : 근데 시방 없어.그것두 치워 버렸어. 길 닦느냐구. 그 당집두 없앴든데. 요전에 보니까.이금석 : 대관령 중턱에다가 말이야. 주막집을 짓는다우 예전에 대관령 중턱에 주막집이 있었는데 그 길목 확장으루 없앴대.이추석 : 없앴지.이금석 : 없어겼는데….그렇지요. 예전에 그 령 넘어가래믄, 거기 하룻길이니깐. 가다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깐, 쉬 가는 델 주막집을, 자구 가는 델 맨들어 놨었대.이금석 : 대관령 거기두 제 지낸댑디다.그래 도루, 아 그래나마나 접 때 우리 갔다온 데 거기두 백리나 되는데, 거리 길이 있었길래 그래두 그리 길이 뚫렸잖우. 거기 오는데 해가 지면 산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지, 어디 우두커니 있을 데도 읎어.이금석 : 거기 주막집 짓는데‥‥거기다가.조사자 : 어디 다녀 오셨는데요?저….이추석 : 강릉.강릉이란 델 쪼끔 갔다 왔어요.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84~86쪽,

02 기어가는 용을 두들겨 잡은 기륭둥지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이성근 : 옛날에 이촌말이라고 그러는 데야. 이촌말 기룡둥지 이렇거든. 기룡둥지는 저기저 이조 때 인조 때 이괄이가 역적을 부렸거든 그러니까 이괄네 산소를 세원서 파서 강에다 띄워 버릴라고 파는데, 용이 다 됐어. 그러니까 때려잡을려고 하니까, 붙들리지는 않고 물로 못들어가고 이 땅으로 기서, 여기서 역군이 나라에서 몽치로 때려잡았데. 기어가는 용을 잡았다고 기룡둥지, 두둘겨 잡았다고. 오래지도 않아,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 백 한 팔 십 년 됐지.조사자 : 이괄이 용이 다 될 때 까지 좀더 기다렸으면….이성근 : 아 이태만 더 기다려도 됐지. 그래 물로 들어가면 그때는 정권을 바로 잡았지. 땅에서 용이 덜 됐다구. 그 아버지가 그랬지. “날 여기다 산소를 쓰고 십 년 후에 역적을 부리면 니가 된다.” 그랬는데, 그 병조판서 한지가 칠년 만에 정권을 그냥 휘어잡으려고 들이치다가 천지척이야 사흘 용상했으니까. 그런데 그만 그 제 아버지 산소 그렇게 하는 바람에 망했지. 사흘 용상하다가 망했어. 부여로 쫓겨 갔거든.조사자 : 아 부여로 쫓겨갔어요?.이성근 : 그럼. 아 공주 어가가 인조가 쫓겨 왔다가 도로 정금남이가 이괄이를 들이쳐서 부셨어. 한 삼백년 됐어.조사자 : 그 전에 얘기 하셨던 기룡둥지 얘기요. 용, 기어가는 용 때려잡은 거.이성근 : 예.조사자 : 그 산소가 이괄 아버지 산소였죠? 파헤친게.이성근 : 아버지예요.조사자 : 그게 어디 있었나요?이성근 : 세원요.조사자 : 서원?황춘를 : 세원, 세원.이성근 : 저 미금면에.황춘균 : 여기 토평리서, 토평리서 조금 올라가야 돼요. 토평리서 올라가서 올라가면 세원리 다리가 있어요. 세원리 다리.조사자 : 세원이예요?황춘균 : 세원 다리 바로 위에가 거기에요, 세원 다리. 지금도 거기 다리가 있어요, 돌로 멩근 다리예요.조사자 : 구리시가 아니죠?이성근 : 거긴 미금면이여.황춘균 : 남양주신데 거 다리가 구리시 허고, 거 다리만 건너면 미금시이고 이족은 구리시예요. 거 세원리 다리예요. 세원리 다린 돌로 멩글었어요, 돌로. 이런 돌로 깍아서 멩근 돌이예요. 그건 그냥 다리가 아니예요. 한번 가보세요.

다른 지역에도 전한다는 내용의 말 다음에 다시 이야기가 나왔다.

이성근 : 여기는 이괄의 산소는 한 삼 백년 밖에 안됐어요. 그 병자호란에, 그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죄 애를 썼고 그랬는데, 자기가 더 애를 썼는데, 병조판서로 내직을 시켜줬거든 저 함흥으로 가서 어두가서 병자판서 노릇하라고. 그리고 애를 안 쓴 사람은 모두 내직을 시켜서 벼슬을 시켜주고 그했는데, 이괄이가 화가 나니까 병권을줬으니까 군사를 데리고 그냥 인조를 냅다 디 후둘겨 댔어요. 그래 저 공주로 피난을 갔었지.조사자 : 인조가요?이성근 : 인조가. 그래 사흘 용상을 하다가, 허허(웃음). 그 정금남이 하고 그 부원수 그 이가 아는 일이 많아서 서쪽 저 무악재 고개는 이괄의 군사고, 동쪽에는 정금남이 군산데, 저쪽에 먼점 군사는 무척 많다고, 병권에 먼점 해놨던거. 여기 신 군인이지, 이 저 정금남이가 헌 사람은 그냥 동네 사람들 모두 모아서 그런 군사니까 훈련도 안 받은 군산데, 계교가 있어 그때. 가만히 보니까 오후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바람이. 그리고 아침 나절엔 잔잔하니까, 이괄이 그 큰 바람 부는 것을 알아가지고 장안에서 전부 고춧가루를 연구를 했죠, 모았죠, 수백석을. 모아가지고 전부 군인들을 노놔줄 때, 바람불 때 당장 접전할 때 서로. 이 바람부는데서 풍진에 눈을 뜰 수가 있어요? 그 수백명이 그냥 죄 붙들려 죽었어요, 계교로. 싸움도 못해보고. 아 그 고춧가루 그냥 얼굴에다 뿌리게 되니, 바람이 재차 불으니 눈을 뜰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에 이괄이 붙들여 죽었어요. 그래 이괄 아버지가 그랬어요. 그 세원다리 산소를 쓰는데, 거기가 천혜대주고, 용이 될 자린데 임금을 헤먹을 자린데, 여기 쓰거든 십년 후거든 니가 역적을 부리되, 십년 안되면 역적을 부리지 마라 그랬거든요.(조사자: 예) 그 아버지가. 그랬는데 제 아버지를 십년이 못되고 칠년 만에 역적을 부렀거든요. 아버지 말이 정말인가 그러구 그때 병권을 쥐고 서울을 그냥 내쳐버렸잖아요. 별안간 혁명 정부 박정희 모양으로 밤새로 혁명 정부 이룩해서 내쫓았잖아요, 임금을, 아 그러다보믄 이괄이가 용상을 앉았는데 용상이 벌벌벌벌 떨리니 칼을 빼가지고 용상을 찍었다오. 찍으니까 지가 자격이 안됐어 안즉, 용상에 올를 자격에. 보믄 정부는 내쫓고 다 내쫓고 자기가 임금을 허겠(웃음)… 용상이 덜덜덜덜덜 떨리니까 칼로 거길, 거 용상이 떨렸지 몸이 떨리는 걸. 자리에 앉을 사람이 못되거든. 그래가지고 사흘, 나흘만에 붙들여 죽었어, 이괄이. 그래가지고 역적을 몰렸어. 헌데 그 산소자리, 몰리니까 그 집터는 연못을 파고, 이괄이 난 집은 또 그 산소는 역군을 데려서 디리 파니까 용이 다됐단 말이야 손톱 발톱만 덜 되고.조사자 : 그게 아버지 산소죠. 이괄이 아버지.이성근 : 그렇죠. 이괄이 아버진데. 아 그래 용이 다됐는데 물론 못 들어 가거든 용이 안 되기 때문에 재주가 없어서. 그래 더 있어야 할텐데, 그 미음나루로 해서 이 구리시 여기로 와서 그 백성들이 나라에서 온 몽치로 때려서 기어가는 용을 때려잡아서 그게 기룡둥지여. 지금 시장, 그게 기룡둥지여. 지금 시장.김동수 : 그게 이무기예요?이성근 : 용이야. 사람이 백룡이 되는 건데, 하얀 용이 되가지고 비늘이 돋혀가지고 그 손톱 발톱이 덜됐다고, 용이. 삼년만 더 있으면 되는 건데. 그래서 이괄이 꽹과리라고 그랬죠. (청중들 웃음) 이괄이 꽹과리지 뭐요. 왕까지 했다가 그렇게 죽으니, 꽹과리지. 그래서 이괄이 꽹과리지. 뭐 사흘 더, 삼년만 더 기다렸으믄, 참으믄 됐어. 근데 매사가 어디든 그 때가 돼야지, 시간적으로 금방 급하게 되면 안돼. 참을건 참아야지조사자 : 세원리가 바로 요기?이성근 : 지금 그 산소 있는데, 조말생이가 갖다가 썼어요. 그 자리에 다가. 거기가면 그조, 좌청룡이 이렇게 되 있는데, 저 동열개가 다 뵈거든, 저기. 등열개 물이 덕소로 돌아서 이 앞으로 들이닥쳐 가지고 옆으로 빠지는 건 안되요, 그래 조화가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임금을 헌다 그랬어요. 그랬는데 그만 거 참지를 못해서 망했지. 그래 이괄이 꽹과리,

조사자가 “수중명당 얘기는 모르세요?” 했더니, “물명당요?” 하면서 막 웃더니, 조사자에게 그 얘길 알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조사자가 모른다 하면서, 그런 얘기가 있다고 하여 혹시 아시나 해서 묻는 것이라 하니, 제보자는 “아니, 물명당이래는 건 그렇거든요. 덕을 닦음으로써 언짢은 데다 둬두, 거가 명기가 들어서 명당자리다 그래는 거예요. 덕을 안 닦았으믄 좋은 데 찾어야 좋은 게 내 복으루 안 오구, 덕을 닦은 일이 있으믄, 그 냥반이 언짢은 데들어두, 덕을 닦는 냥반은 천신이 도와줘서 닦은데루 된다 그거라구.” 조사자가 다시 “그 뭐 수중에다가 뭐 죽은 다음에 넣어 노라 그랬다가 뭐, 아들이 넣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알아가지구 파 보니까 용이 될려다가 말았다는 그런 얘기도 있던데요.”하니, “게, 이괄네 산소는 그랬잖우….” 하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게 이괄네 산소는 그랬잖우. 이괄이 꾕갈래.조사자 : 그런 얘기가 여기 있어요?그럼요, 이 제 이괄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이괄이더러 그랬거던. 십 년이 지내믄 이, 큰 역적질, 나라에 임금을 헌대든지 그렇게 역적을 부릴랴구 했는데. 그 인조 적에 말이야, 인조대왕 적에, 벵자호란 난리에, 그 사람이 이괄이가 병조는 외, 저 먼디다 병조판사를 내주거든. 다른 이는 죄 공이 있어 가지구 안으로 나 집을 시키는데, 자기는 외직으로 보내니깐, 가만히 보니깐 역심이 난단 말이야.‘에이 참, 옘병헐 녀석 나는, 그 나리에 그렇게 앨씨구 해두 외직으루 주구, 다른 사람은 나처럼 애쓰지두 않는데 내직을 씨구. 에이, 반심을 먹어야겄다’하구 그 회의를 품었네. 회의를 품어가지구 여기 서울을 그냥 들어오네. 무악재 고갤 넘어와서 다리 그냥 서울을 들이치니, 아, 임금이 뭐, 벨안간 으떻게 해? 그래니깐 저 부여루 달아났다구 인조가 급허니깐. 인제 그리 가서 계신데, 그 해 우리 할아버지의 이, 정금남이라구 하인이 있어. 하나가. 하인. 그 이괄이가 그렇게 역적질이 허니까 그 정금남이가 그 때 부원수라구. 부원수루 있는데, 가만히 보니깐, 이 눔이 역적질을 허는데, 인제 잡아야 헐 텐데, 싸움을 하다 고만 실패를 했어요, 아 그래, 그래니깐 계교가 아는 일이 많아서, ‘에이, 가만히 있어라. 오늘은 저 눔이 서쪽에서 내려올 데니깐, 내일은 동풍이 불거야. 꼭.’근데 이 곱두 부분을 갔다가 저 놈이 다 차지를 했으니깐, 이 짝에선 사람 많이 모으질 못허구, 훈련을 잠깐 해 가지군 그냥, 고춧가루를, 고춧가루를 한 백 석을 맨들었단 말야 그냥. 빠아서 그냥 빠아가지구 죄 군사들은 노놔 주구. 그냥 동풍 몹시 불 때 냅다 뿌리구 쫓아 들어가는데, 만멩이믄 뭐 해? 고춧가루루 냅다 뿌려서 바람에 휙휙 날라가니까, 지금으루 치면 독가스 뿌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우? 아 그래구, 바람 부는데 쫓아가면서 보니깐, 이눔들 눈깔이 멀어서, 옛날엔 당상접전 하니깐 서루 만나서 찔르는데, 뭐 헐 수가 있어? 그냥 망했지. 이괄이 군사가. 게 이괄이가 역적 됐잖우? 성공 못 했으니까, 사흘 용상했거든. 게, 용상을 다 칼루 찔렀어, 게 괜히 붙들구 때가 안 되는데 용상이 떤다구, 용상을 칼루 배가지구 찍으니까, 용상이 제 몸이 떨려서 그러는데, 인재가 안 되니까, 그래 가지구 역적으루 몰려서, 저 서원 평주대(?)에다가 갖다 이괄 아버지의 산솔 썼어요.조사자 : 어디에다가요?서원. 이 동네 집이 말이죠. 이괄이 산소자리 참 좋읍디다. 아 거길 팠단 말이야, 혈을 끊어버리구. 파니깐, 손톱, 발톱이 다 됐어, 용이. 근데 물론 못 들어가게 마련이야. 손톱, 발톱이 덜 돼서. 그래 손톱 발톱이 다 됐으믄, 물루만 들어 갔으믄, 한강으루 뚫구 나갔으면 임금을 허는 건데. 십 년 후에 역적을, 역적질을 해라 그랬는데, 칠 년에 했으니까 손톱, 발톱이 못 됐어요. 그래서 거기서 왕산내루 건너 와서, 게서 여기 구리시 시장 있는데 거가 기룡두둘기거든. 그 나라에서 거기 기 나오는걸 그냥 때려 잡았어. 그래 기룡두들기야. 그것두 다 역사에 있는 얘기지 뭐.강한철 : 기륭둥지?기룡둥지야. 아유 여기 저 구리시장께 기룡둥기 아냐? 거가. 기어가는 용을 때려 잡았다 그거야. 그래 기가는 용이야. 기룡둥지야. 개울을 건너와서. 게 이괄네 산소였는데, 난 더 몰라. 아유. 고만헐테야.

□ 제보자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6일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145~148쪽.

03 용마산 아기장수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김무희 : 여기 엑께산요, 용마산이 거기다 일본놈들이 와서 저 쇠말뚝을 박아 봤어요. 뎅구알이 뭐 이만한데, 우리 갖다가 절구 공이도 했는데.아 들 : 그게 정기 끊는다고 박아놓은 거야, 맥에다가.김무희 : 아 그래서 거기서 그걸 죽이기 때문에 말이 나와서 울었대요, 장사를 죽여서. 말이 나와서 피를 토하며 죽었대요.조사자 : 일본놈들이 박아서요?김무희 : 그럼 일본놈들이 박고 그냥 거기서 장사가 못나니까. 그래 거기가 용마산이예요, 엑께산, 용마산요. 그래서 이름이 난 거예요. 그냥 대포질만 디리 펑펑하고 그냥. 이만큼씩 해요, 대포 껍데기가. 그걸 갖다가 쇠공이 절구 만들었어요. 그래서 거기가 용마산이예요. 장사가 날 곳이라 해서.이성근 : 그건 고려땐 데, 그땐 이 땅이 여기가 고구려 땅이라고, 여기가 지금, 우리가. 그때 고구려 때 저 사람이 있었죠. 그장군이, 바보온달이 성이 있잖아요 거기. 그거 밖에 없죠, 뭐 이 주변에 저기서부터 원주서부터 이리 내려오면 이게 이짝으론 고구려 땅이에요,조사자 : 용마산에서 장수 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어요?이성근 : 용마산에선 장수 난 건 없어. 말이 하나 났어, 고려 때.조사자 : 말이요?이성근 : 고려때. 말이 하나 나서 용마산이지 장수날 건 없어요.조사자 : 말이 어떻게, 그건 어떤 이야기예요?이성근 : 허허 근데 고려 때요. 그때도 아마 장사가 하나가 있었데요. 근데 그 거기가 그러니까 면목동 말고 여기 저 향당동 있잖아요.황춘균 : 장현동.이성근 ' 향당동이야.조사자 : 행당동.이성근 : 향당동.김동수 : 한양대학교 있는데.이성근 : 그래 거기가 향당동 아니야. 장안동 허고 거기가.이성근 : 거기가 그 전에 전부 밭이거든요, 전부. 근데 한 집이 소를 했는데, 거 어린애가 끌고 댕긴대요, 소를 요. 그 장사예요, 가만히 보니까. 아 그 벌판으로 소를 뜯기러 간다면 그놈의 소가 무척 말르드래요. 아 그 가만히 저희 아버지가 끌고 나가 갖고는 그 놈이 뜯긴다고 그러면은 그 놈이 살이 찌서 들어 올텐 데 소가 점점 패래드래요. 아 이게 웬일인가 하고 이렇게 봤더니, 그 애가 뿔 위로가 올라서 드래요. 올라섰다가 제주를 펄떡펄떡 넘고 배떼지 밑으로 들어갔다, 훨훨 아 그러구 그냥 채찍으로 디리 혼케 치드래요, 벌판에서. 그러니까 거기풀밭이니까 바깥에서는 안 보이거든요. 거기가 예전에 수수도 많이 싱겄지만, 그 저 벌판에서 재주를 넘는데, 훌훌 날드래요. 배때기 밑으로 들어가고 그냥 아무튼지 뿔위로 가 재주를 팔탁팔탁 넘고 그러니까, 이 큰일났다 허고. 그래. 그래가지고 그걸 집안에 그런 사람이 나면 망한다고 그걸 죽였다잖아요, 애를요. 기름통에다 눌러서, 집안에 묻었어, 아 그래가지고 액께산에서 용마가 나가지고 용마가 펄펄뛰고, 피를 토하고 울었는데, 그 집안이 싹 망했데요. 그런 얘기 밖에 못 들었어요. 그래서 용마봉 용마봉 그러잖아요. 아 원래가 그렇게 날래고 그런데 아 왜 죽입니까, 가만두지.황춘균 : 자기 잘 살려고 죽였겠죠.이성근 : 잘 살긴 집안이 망했다는데.조사자 : 역적질 할까바….이성근 : 예 그래서 겁이 나서 죽였대요. 그런데 고만 그 집안이 다 망해버렸대요.

구리시가 속한 양주일대는 고려시대부터 길지(吉地)로 소문이 나 천도설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양주가 길지라는 관념은 조선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천도설 대신 구리시를 중심으로 조선 왕조의 능침지(陵寢地)로 널리 활용되었다.
구리시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까지 모두 9릉 17위가 모셔지게 된다. 구리시에 능침들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조선의 농민들은 각종 조세의 직접 부담자였는데, 이 지역에 능침이 들어서면서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되면서 각종 역의 부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주의 면세지는 총 761결(結) 49부(負)로, 경기도의 면세지 871결 76부의 87%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면세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양주 자체의 전답의 경우도 실결수의 70%가 면세전답이었다.
면세지의 광점(廣占)에 따른 양주지역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경기도고양지역과 함께 양주의 비면세지에 대해서는 전세를 감하는 조치를 내려 양주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타 지역과 비교한 양주 주민들의 부역 부담은 상대적으로 과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한말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이른바 ‘甲午陞總’이라 부르는 면세지 철폐조치를 단행하였다. 즉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는 「宮土, 驛土, 屯土의 出稅에 관한 件」이 발표되어, 궁장토 등의 수입은 계속 각 궁의 소관이지만, 지세는 조세금납화 조치에 의거하여 거두고, 역둔토의 경우는 은결(隱結)과 결세가 헐한 토지 등을 조사하여 역시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토록 하였다. 또한 모든 세금은 탁지부에서 일괄 거두도록 조처하였다.

□ 제보자

  • 김무희(동창마을, 1917년 생, 여)
  • 이성근(동창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4일, 10월 16일

04 군인으로 변한 동구릉 나무와 건원릉의 갈대군사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건원릉은 다른 능과는 달리 봉분에 잔디를 심지 않고 억센 갈대를 입혀 놓았는데 그 이유는 태조 이성계는 젊은 시절 장수로 있으면서 전쟁이 일어나 적과 싸움이 붙으면 갈대밭에서는 패한 적이 없어 항상 승리하였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도 고향인 함경도 영흥땅의 갈대모습을 항상 동경하여 평소에도 그 곳의 갈대를 가져다 자신이 죽은 후 무덤의 봉분에 덮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효성스런 태종이 그대로 이행한 것이다.『대동지지』 권3, 양주 편을 보면, 고언백(高彦伯)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자리하고 있는 검암산을 근거지로 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검암산 고루(劍岩山 古壘)는 산의 서록 봉우리에 2곳이 있다. 선조 때 임란 의병장 고언백이 쌓은 것이다.

교동 향리 고언백은 일찍이 왜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도원수 김명원을 좇아 영장(領將)이 되어 왜적의 목을 벤 공이 있었는데, 양주로 돌아가기를 자청하여 병사를 모아 적을 치니 왕이 양주 목사를 배수하고 능침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은 산의 정상 험한 곳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보아 왜적을 초격(抄擊)하였으며, 능침에 복병하여 기회를 엿보아 사살하였다. 이때 토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 또는 백으로 무리를 이루었는데, 양주가 가장 심하였다. 고언백은 구리에 소재하고 있는 건원릉을 비롯하여 여러 능침이 왜적에 의해 훼손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다. 한편, 건원릉의 주산인 검암산의 정상에 2개의 고루를 세워 왜구의 동태를 살피고 백성들과 연계하여 이들로 하여금 적의 정보를 탐지케 하여 양주 일대에서 약탈행위를 자행하던 왜병을 유격전으로 격퇴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이때 고언백이 거느리고 있던 병사를 2,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 권34, 선조 26년 정월 병인) 한편 구리시에 전하고 있는 전설 가운데 건원릉과 관계된 것 중 이때 왜적이 건원릉에 3번씩이나 불을 지르자 모두 바람이 불어 불을 꺼버려 왜병이 건원릉에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설과 밤에는 능 앞에 있는 비석이 장군이 되고 잔디는 군사가 되어 왜병을 물리쳤다는 전설은 고언백의 검암산에서의 활약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고언백의 양주에서의 임무 중에 능침의 보호가 포함되어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 제보자 : 이성근(동창 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 16일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420-421쪽.
  • 구리시 구리문화원, 『구리의 역사와 문화』, 1996, 250~251쪽.
  • 구리시 구리문화원, 『구리시지』(상), 1996, 147~148쪽
05 대성암 쌀 바위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위치는 아천동 범굴사지 대성암이다. 의상대사가 수도를 했다는 장소로, 대성암 뒷편에 있는 바위 구멍이다. 의상대사가 수도할 때 천공미가 나온 구멍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사자 : 그 얘기 하나 해 주세요. 대성암 쌀 바위.이성근 : 그것도 임진왜란 얘긴데, 쌀 쏟아지는 거?조사자 : 예.이성근 : 피난민 하나가면 하나만큼 쏟아지고, 둘 가면 둘만큼 나오고, 셋 가면…. 그거 중이 욕심이 많아 구녕을 정을 들이 대고 많이 쏟아지라고 그랬는데, 물이 쏟아 졌어요. 물이 확 쏟아져서.황춘균 : 불암산 저 윗 절.이성근 : 불암산이 뭐야. 아치울 대성암 절 얘기야. 손님이 오시는 대로 피난민 올라오는 대로 적게 나오고, 중이 말예요. 저 쌀이 많이 쏟아지라고 정으로 구녕을 치니까, 물이 확 쏟아져. 그날 이후로 쌀도 안나왔다고 그랬어. 걸로 끝이예요.조사자 : 예, 그 다음부터.이성근 : 그러기에 과도한 욕심을 챙기면 망해.

□ 제보자 : 이성근(동창 마을, 1917년 생, 남)

□ 조사일자 : 2000년 10월'16일

□ 참고문헌 : 구리시 구리문화원, 『구리의 역사와 문화』, 1996, 195~196쪽, 251쪽, 264쪽.

06 기타 민속문화 > 전해오는 이야기(전승)

구리시가 속한 양주일대는 고려시대부터 길지(吉地)로 소문이 나 천도설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양주가 길지라는 관념은 조선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천도설 대신 구리시를 중심으로 조선 왕조의 능침지(陵寢地)로 널리 활용되었다.
구리시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까지 모두 9릉 17위가 모셔지게 된다. 구리시에 능침들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조선의 농민들은 각종 조세의 직접 부담자였는데, 이 지역에 능침이 들어서면서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되면서 각종 역의 부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주의 면세지는 총 761결(結) 49부(負)로, 경기도의 면세지 871결 76부의 87%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면세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양주 자체의 전답의 경우도 실결수의 70%가 면세전답이었다.
면세지의 광점(廣占)에 따른 양주지역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경기도고양지역과 함께 양주의 비면세지에 대해서는 전세를 감하는 조치를 내려 양주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타 지역과 비교한 양주 주민들의 부역 부담은 상대적으로 과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한말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이른바 ‘甲午陞總’이라 부르는 면세지 철폐조치를 단행하였다. 즉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는 「宮土, 驛土, 屯土의 出稅에 관한 件」이 발표되어, 궁장토 등의 수입은 계속 각 궁의 소관이지만, 지세는 조세금납화 조치에 의거하여 거두고, 역둔토의 경우는 은결(隱結)과 결세가 헐한 토지 등을 조사하여 역시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토록 하였다. 또한 모든 세금은 탁지부에서 일괄 거두도록 조처하였다.

1) 왕숙천과 퇴계원의 지명 유래

설화를 조사하기 위해 동구동의 경로당에 처음으로 들렀다. 그 곳에는 여러 노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이성근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조사자가 제보자에게 “왕숙교는 왜 왕숙교라 하는지” 물으니 “왕숙천에 다리가 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러면 왕숙천은 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물으니 “그건 내 얘기하지.”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다.

고려 말 때 이성계 그 냥반이 서울루 오셨는데. 그 아드님허구 서루 맞질 않았어. 싸움을 했어. 아드님허구. 이성계 아드님허구. 근데 작은 선생이, 이성계씨 작은 부인 강씨 부인이 애기를 낳았거든, 그런데, 근데 이성계씨 큰 아들은 한씨 부인에게서 낳구. 그래서 가만히 보니깐, 이방원이가 가만히 보니깐 그 쪼그만 것, 거시거 남은 걸 임금을 주구, 자기는 임금이 안 차례 올 것 같애. 그래서 이렇게 용상에서, 임금이 안고, 그 작은 몸에서 난 아들은 가지구 구엽다고 입을 맞추시구 그러길래 이방언이가 보니깐 화가 난단 말이여. 암만 해도 임금을 저거한테 전할 것 같애. 자기한테 안 전하구.“아버지, 그 동상 구여운데 지가 좀 봐주겠습니다.”그래니까,“앗따, 그럼 니가 보아라.”그래니까, 두 다리를 잡구 패디기를 쳐 버렸다구 임금이. 아 그래니깐 금방 죽잖어? 아 그래 으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옥새를 쥐구 있다가 그냥 후려 갈겼는데, 아휴 옥새, 그걸 쥐구 그냥 팽갤쳤는데 두 손으루 터억 받으셔. 그 냥반이, 이방언이가. “인제 저한테 전합쇼.”그래구 두 손으루 택 받아 놨으니, 뭐. 임금은 옥새만 뺏기면 임금이 아니거든. 그런데 애들 모냥으루 도루 달랠 수가 있나 으떻게 해? 함경두 함흥으로 달아 나셨어, 그분이. “에이! 나 채빌 놔라. 나, 함흥으루 가겠다.”그래 채빌 놓구 함흥 가서 있다가. 이제 여길 오는데 당췌 와? 그 어른이. 아들이 뵈기 싫어서. 그래서 인제, 벨 사람이 다 가두 안 오구 안 오구 함흥차사라구 그랬어. 가기만 하면 죽여 버렸거든.“이 눔 자식, 그 자식이 보낸 사람 그냥, 뵈기두 싫다. 너 가라.” 그러군 뒤루다 활을 쏴서 죽구 죽이구 그래, 함흥차사야, 그게. 그런데 이제 나중에 다른 냥반이 갔어. 그 냥반하고 아주 절친한 친구가. 그래 암송아지 하날, 그게 암소허구 송아지갓 난 걸 끌고 갔어, 그 냥반이. 끌고 가는데 하나는 여기다 매구, 요기다 맸어. 즈 아버지를 모셔오라 그랬는데. 그 냥반이 계시는데 요기 매놓구, 요기다 매 놨는데. 아, 그냥 소리소리질르네.청중 : 누가요?소가. 소는 새낄 보구 야단이구, 새끼는 에밀 보구 야단인데 이상하다 말이야. 임금이 가만히 그 데리고 온 사람“아, 저건 무슨 소리유?”그래니까,“글쎄 그게 에미소가 새낄 보구 저렇게 야단치구 새끼가 에밀 보구 서루 저렇게 야단을 칩니다.”그래니까,‘어허, 내가 자식을 두고 오기 때문에 금수만두 못 허구나.’이러구 생각하셨단 말이야. 임금이.“에이 가겠다.”그러구,“채빌 놔라.”그리구 함흥에서 서울에 내려 오거든. 서울로 들어오는데, 여기 저, 요 위에 광릉내가 있어. 광릉내 위에, 저 위 저 내광리라구, 내광리 거기 오다가 최숙 : 광능의 내광리에서? 응. 쉬서 오시다가 인제 서울루 들어오시는 거야.아, 그런데 이방언이가 임금이 돼가지구 지 아버지 대신 옥샐 뺏었으니까 그 연을 타구 와요, 연. 연이라는 게 또 타구 오는게,최숙 : 가마.그 연 타는 가마가 또 따루 여럿이 메는 게, 그걸 타구 응, 기고만장하게 큰 우산을 받고 이러구 와. 또 그래 보니까 가만히 보니까 들입까지 오시다 보니까 아주 괘씸하다 말이야. 또 분해. 삼각산을 보니까 분허구, 아들이 기고만장하게 온 것 보니까 분허구, 몸에서 당장 활을 내서 이 방언의 등떼기를 향해서 쐈는데.최숙 : 태조가?응. 태조가 쐈는데, 분허구. 바로 맞어 들거라구 쐈는데, 아 안 맞어. 제기, 옘벨라서 한 번에 쏴서 안 맞으니까, ‘너두 하늘이 냈구나.’ 그러군, 그냥 활을 가지구 퇴! 하고 퇴계쪽으로 다시 올라갔어. 저기 내광리루 그래 거기 가서 여덟 밤을 자구 내려 오셨어. 그래 개울에 오셔서 낚시질을 하셨어.최숙 : 태조가요?그래 여기 당이 있어. 그 냥반 낚시질을 한 거 하날, 여드레 동안을 거기서 낚시질을 하시구 계셔서. 그래서 왕숙천이라구 그랬어. 왕이 거기서 있었다구 해서. 다른 건 아니야.최숙 : 그러니까 거기가 상륜가 봐요? 내광리가 있는 데가?거기 죄 놨거든. 그 냥반, 거기 가보면 한 간을 제(지어)놨어. 여드레를 낚시질을 허시구 그랬다구. 그래 왕숙천이라구 그랬어. 거기서 난 것두 아니구.최숙 : 퉤! 하고 침을 뱉고 다시 간 거예요? 퉤!그럼. 퉤! 이러구. 그래 물러갈 퇴자야. 침을 뱉고 물러 가셨거든.조사자 : 그래서 거기가 퇴계원이예요? 이름이요?그럼. 그래서 퇴계원. 퉤! 하구 드럽다구 그래서 왕숙천이 됐다 그거야 뭐. 아 이제 고만 얘기해야지. 임금이 거기서 주무시구 놀았으니까.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39~42쪽

2) 용의 혈 건원릉

동구릉 이게, 이리 내려가서 건원능 잡을 때, 그 안배가 돼서 아차산이, 지가사에서 그랬거든. 동구릉 자리가, 그 건원능이 용의 설(혈)인데, 용의 설인데, 그 짝을 내다보면 아차산이란건 누운 용이 물 속에 들었다 그랬거던. 이 왕숙천이 일리 돌리 싸구, 조 쪽엔 중랑천이 돌리싸구, 저쪽엔 한강에서 물이 용이 들어서 무진무진 조화가 나갔다 그랬어, 저 쪽엔 한강 아니여? 저쪽으루 한강이구 이 양쪽에는 중량교가 돌리 싸구, 여긴 왕숙천이 돌리 쌓거든, 여기가. 그래서 건원능 자리가 좋다 그랬어.

조사자 : 아, 용의 혈을 물이 둘러싸고 있는 거니까 좋은 거예요?용이 돌리 쌓잖우? 누운 용이 물 튀기는 형상이다 그랬어.최숙 : 무슨 형상요?누운 용. 용이 누웠는데 물을 뒤기는 형상이다 그랬어. 아차산이 이렇게 됐다 그랬어. 건원능 산소 쓰는 게 그렇게 됐다구 그랬어.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43쪽.

3) 궁말의 지명 유래

앞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자가 “아유, 모르시는 게 없네요.” 했더니 옆에 있던 이금석 씨가 “아, 이 분은 역사를 모르는 게 없어요. 그래 우리가 여기 저기 놀러 다닐 때 이 분한테 역사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칭찬의 말을 했다. 이성근 할아버지가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겠다”고 했는데, 조사자가 “저 아래쪽에 ‘궁말’이라는 마을이 있던데 그건 왜 그래요?”라고 물으니 곧바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궁말요? 나라의 궁이 있어 궁말이지. 나라 임금의 따님이요, 그 소년에 돌아갔으니까 갖다가 모셨으니까 인제 궁말이라구 그랬어. 궁을 써서조사자 : 아, 그러니깐 나라 임금의 딸이 죽어서 여기다가 묘를 썼어요? 산소를요? 여기다 능을 썼다가 파 갔지요. 금곡으루. 그래서 궁말이예요. 그럼 뭐,조사자 : 궁말, 그럴 때 ‘말’은 무슨 뜻이에요?그 앞에 마을이 있다 그랬어. 궁 앞에 마을이 있다구. 거, 지금 시청이 있잖우? 시청이 있구 거기 집들이 있어. 그래서 궁말이다. 원래는 인창린데 옛날에 여기는 동창, 거기두 동창. 다 그런데 지금은 부서가 갈라졌지요, 지금두 다 구리시가 되지 않았우? 이렇게 된 거예요.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44쪽.

4) 동창의 지명 유래

이야기를 하는 도중 옆에 있던 이추석 할아버지가 제보자를 가르키며, “강화도 같은데 가면, 몽고군이 들어왔는데 그런 걸 어떻게 물리쳤다는 것이 저 사람 머리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저 분은 아주 특별하다”는 이야기로 제보자를 칭찬했다. 조사자가 할아버지에게 “본관이 어디시냐?”고 물었더니 경주라 하면서 경주 이씨는 아주 오래된 이씨이고, 여기에서 전주, 아산, 덕수, 원주, 고양, 오계, 재령, 함평 이씨가 나왔기 때문에 함께 결혼하면 안되고, 청해 이씨는 이성계 때에 청나라에서 나온 퉁두란으로부터 시작된 이씨이기 때문에 결혼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동성동본끼리 결혼하면 변고가 많고, 인물이 나지않는다는 말도 했다. 동창은 경로당 앞쪽에 있는 지명인데, 유래를 물으니 들려준 이야기다.

그저 먹고 살 거는 줘요. 지금으루 말하믄 둬 가마 주구, 동창이라는게 창고 창자야.조사자 : 아, 동창에 창고가 있어서 나라에서 월급을 줄 때 거기다 쌓아 놓고….곡식을 쌓아 놓구, 거기서 참봉이 누가 멧 가마 누가 멧 가마 다달이 줘요, 그래서 동구릉, 그리구 동창이예요. 동구릉, 동창 이랬다구.최숙 : 곡물이라면 쌀로 줘요?쌀루 줬지.최숙 : 쌀 두세 가마예요?두 가마. 아니 쌀을 찧서 주지. 시골서 용공을 이리 바치거든. 그러면 창고에다가 산더미같이 싸 놓구 한 달에 한번씩 요를 타는 거예요. 요, 요라고 그했어요. 요. 명칭이 요지.최숙 : 아, 한달에 한 번….네. 한 달에 한 번씩 먹구 살 걸 주지. 그러면 뭐 거 맨몸으루 다니우? 돈 주구 또 쌀 주구 그런 바람에 능에 댕기지.최숙 : 일이 고되거나 그러시지는 않으셨죠?아유, 펜하지 뭐.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45-46쪽.

5) 빈대절터

조사자가 이 근처에 ‘빈대절터’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빈 절터?’ 라고 하면서 그런 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사자가 “아니요, 왜 빈대를 잡으려고 절을 태웠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예요.” 하니까 “빈대는 없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옆에 있던 이금석 써와 이추석 씨가 말을 도와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빈대는 읎구 초가삼간이 다 타두 빈대 타는 맛이라구 그 얘기뿐이지 어느 절에서 그랬다는 건 몰라. 그건 몰라요. 말루는 있어. 그 집에 빈대가 많아서 불을 질러서, 그 빈대 태우는 맛에 그냥 불을 질렀다구 그런 소리는 있는데 그건 무슨 소린지 그건 몰라.이금석 : 그런 얘기 내가 누구한테 들은 거 같애. 어디 절인지 뭐 기둥을 뭐….빈대기둥이라구. 빈대두 죽구 그랜다구 그런 얘기 있는데 그건 몰라.조사자 : 이 동네에 있어요?읎어요 그런 건. 그 소린 안 났어.이금석 : 빈대가 많다는 얘기지 그러니깐.이추석 : 옛날에 빈대 많았지.불을 질렀다는 건 못 들었어. 빈대기둥이라구.이추석 : 육이오 전에는….빈대가 많았지. 벼룩이두 많구 이두 많구.조사자 : 이두 많았잖아요?많구말구. 아 육이오 때 아주 혼났는데….이추석 : 육이오가 나구 미군이 들어 와서 인제 뭐 디디틴가 뭐 뿌려주구. 그래두 많았지, 인제 그 육이오 때 어느날 보니까 정말 빈대가 다 없어. 초가삼간이 다 타두 빈대태는 재미라구.쫙 없어겼지. 그거 어디 개와장에 불을 놨는데 개와장에 그저 있단 그런 소리는 들었는데 어딘지 몰라.조사자 : 저기 우미내쪽에 산 어디에 그런 얘기 있다는….읎어요 그런거. 못들었어요.

□ 참고문헌 : 이수자, 「설화 화자 연구], 1998, 83-84쪽.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농촌사회에는 모심기, 김매기, 수확 등 농번기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공동으로 노동하는 이른바 <두레>라는 공동노동조직체가 삼남지방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레라는 공동노동조직체는 이른바 <촌계(村契)>의 한 부분으로, 촌계에서는 촌제(村祭)와 두레, 촌회(村會) 등을 운용하고 있었다. 촌계의 존재는 왕왕 마을의 형성과 그 역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자생적이며 공동체적인 성향을 지닌 기층민들의 상규상보하던 조직체였다.
이른바 촌제라는 것은 산신제, 동제, 서낭제, 당굿, 마을굿 등의 이름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전국적으로는 <동제(洞祭)>라고 부르는 경우가 가장 많다. 동제는 자연촌의 주민들이 그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자연재난을 면하고 온전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혀 신명(神明)에게 비는 취지에서, 마을마다 연 1회 혹은 2~3회 제사를 지내는 행위로, 농촌의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제사의 대상이 되는 제신(祭神)은 주로 산천, 서낭 등이다. 마을 근처에 신단(神壇), 신목(神木), 신당(神堂) 등을 마련하여, 일종의 신성구역인 신역(神域)으로 삼고, 동제 때만이 아니라 항상 마을을 재난에서 보호하고 풍년을 보장해주는 지신(地神)이나 신령님으로 숭상하고 있었다.
대개 이 제신을 공동으로 모시는 주민들은 자연촌을 단위로 촌계를 조직하고 있으니, 촌계자체는 물론, 촌계의 구성원인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사신집단(祀神集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모시는 신체(神體)는 흔히 큰 바위나 나무이며, 제신은 산신, 서낭신 등의 자연신이다.
제사의 모습을 살펴보면, 제사에는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대표를 제관으로 선정하여 제사를 지낸다. 제관의 선정기준은 마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을에서 신망 있는 장년 남자 중 지날 1년 동안 재난을 당했거나, 가족 중 사망 또는 해산한 자가 없는 등, 부정과 관계가 없을 것을 엄중히 요구하였다. 제관은 보통 <산주> 혹은 <제주>라고 부르는데 보통 3명을 선출한다. 한 명은 축문을 읽는 사람이고 한 명은 제물을 신전에 진설하는 사람이며, 다른 한 명은 제물을 조달하는 사람이다. 제관들은 직업적인 봉사자가 아니라 제사 때마다 주민 중에서 선정되는 등, 모두가 옛 풍습의 잔재라 할 것이다. 제사는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지내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지만, 제관의 운기(運氣)에 따라 조정되기도 한다. 제일이 정해지면 7일 내지 20여 일 전부터 근신재계(謹身齋戒)가 시작된다. 즉 제관은 부정한 것을 보지도 않고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심신의 청정화에 힘쓰는데 다른 주민들도 자신과 마을의 청정 유지에 협력한다. 제관의 집에는 금기(禁忌)의 표식으로 금줄을 쳐서 부정의 접근을 막고 외출도 삼간다.

제사에는 제관만이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제사는 보통 밤 12시 경에 지낸다.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정을 금기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니 고요한 밤중에 엄숙히 지내는 것이다.
먼저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절차로, 신사(神祠)가 있고 그 안에 신위(畵像 또는 位版)가 있는 곳은 그 앞에, 신목만 있는 곳은 그 신목에 종이나 헝겊을 붙여서 신체로 하고, 제단만 있는 곳에서는 지방(紙倣)에 신명(神名)을 적어서 세우고, 이 신위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제관은 분향(焚香)하여 강신(降神)을 빌고, 이어 헌작(敵爵: 初獻, 亞獻, 終獻), 천찬(薦饌), 독축(讀祝)을 한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축문을 불태우고, 또 백지를 사각으로 짜른 것을 촛불로 태우는 소지(燒紙)를 하면서, 1년 동안의 마을의 평안과 기풍(祈豊)을 한다. 소지는 주민 각자의 소원을 신에게 기원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한 장만을 태우기도 하고 전 주민 모두가 한 사람이 한 장씩 태우는 경우도 있다. 종이가 잘 타서 한 쪽도 남김없이 훨훨 잘 타면 그 사람의 소원이 신에게 가납(嘉納)된 길조(吉兆)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이니, 그 사람은 1년 내내 조심하고 삼갈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관 및 제의에 참여하였던 마을의 주민들이 그 자리에서 진설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싸 주기도 하는데, 이를 음복(飮福)이라 한다. 음복은 신성한 신역(神域)에서 신이 잡수신 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과 한가족이 되어 재액(災厄)을 면하고 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음복은 본래의 취지로 보면 전 주민이 참여할 것이므로, 제물의 대부분은 등분(等分) 혹은 적당하게 전주민에게 분배되며, 집집마다 가족 일동이 또 음복한다.

동제에 드는 비용은 대개 촌계에서 조달해 주거나 각 호마다 갹출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동제가 쇠미해졌을 때는 비용도 안들겠지만 동제가 농촌의 큰 오락적 연행사로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던 시절에는 소(牛)도 잡는 등 꽤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동제의 전통이 오래된 만큼 지역적인 특색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동제의 내용이나 외모가 거의 대동소이하여 각별한 특색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제신이 자연신인 까닭으로 주민과 제신 사이에는 친밀한 문화적, 사회적, 또는 혈연적, 지연적 관계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 주민들은 제신을 두려워하고 경원하면서도 그 영력(靈力)을 믿고 그것을 마을의 제재초복(除災招福)에 활용하게끔 기원하고 있다.
즉 주민들이 이 신에 제사지내면, 신은 이에 답하여 마을의 재난을 막고 복을 준다는 공리적(公利的) 측면이 있으면서도, 제사는 신에의 접근, 신에의 동화 내지는 인간의 신화(神化) 즉 심신을 정갈히 하고 치성을 드리면 자신의 신성(神性)을 발취하여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이른다는 취지로 제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동제는 촌락사회의 사회적 행사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동제가 공동체적인 친목을 다지는 기회이며, 또 공동체적인 향토오락으로서 으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전 주민이 공동으로 동제에 참여하고 한 곳에 모여서 잔치, 곧 동연(洞宴)을 베풀고, 음복하며, 이를 기회로 동회(洞會)를 여는 등, 촌락공동체의 튼튼한 유대를 형성해주는 것이 바로 동제였다.
동제의 모습을 관찰하면 일견 유례풍(儒禮風)이다. 제관이라는 명칭이나, 제의절차에서 분향, 헌작, 한문으로 된 축문 등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 대상이나 축원 등의 내용은 종래의 무속, 이른바 음사(淫祀)의 그것이니, 오랜 전통에다가 유교의례의 형식을 도입한 데 불과한 것이다.
동제가 즐나면 마을회의를 한다. 마을회의에서는 동제에 대한 결산과 일상적으로 동네에서 필요로 하는 공공시설의 유지, 보수, 동임원의 선출, 동비의 출납보고, 축제 운용 등을 상의하거나, 농사의 지도, 영농상의 문제점 해결, 생활상의 문제점 해결, 관혼상제 등에 대한 상부상조식의 제정, 두레에 관련되는 일 등을 관장하였다.
말하자면 동제를 주관했던 촌계는 마을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고 실제적으로 운용하던 주체였던 것으로, 한 마을이 흡사 하나의 대가족을 구성한 듯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침략할 때, 영국은 인도의 농촌공동체의 침체를 <정체(停滯)>의 심연으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영국의 침략을 필요악으로 미화하였다. 이는 칼 마르크스의 이른바 ‘아시아적 징체성’ 이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던 일제의 제국주의도 이 이론을 크게 활용하였다.
즉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19세기 말의 조선의 정체성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며, 일제의 침략은 이 정체성을 타파하고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한 필요악 내지는 구세주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농촌 공동체에 대해서는 한국인 학자들도 탐탁찮게 본 것만은 사실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의 기본 정책은 우리의 전통에 대한 부정에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 촌락사회의 고유한 촌계의 중요한 정신적 기반이었던 동제와 마을 굿을 낭비적인 미신(迷信)이라 하여 금압하는 등, 일제 초기까지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던 촌계, 마을에서의 가족적인 단합을 온갖 명목으로 탄압하였다.
종전의 조선사회가 수전농업사회가 일반적으로 지녔던 속성에서 연유한 정체성과 페쇄성을 지닌 것만은 사실이지만 촌계에서 보이는 인정과 상호부조는 바로 오늘 날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중요한 자원이자 전통인 것이다.
우리 나라 여타지역이 모두 그러하듯이 구리시의 마을신앙도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것이현 실정이다. 더구나 구리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인접하여 주민들 중의 많은 수가 구리시의 원주민이 아닌 타 지역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마을신앙의 전통도 급격하게 쇠퇴, 혹은 축소, 변모하고 있는 것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현재 남아서 시행되고 있는 구리시의 마을 신앙을 통해서 몇가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 각 마을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신앙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 아천동 우미내마을 대동고사
  • □ 교문동 한다리마을 대동고사
  • □ 토평동 벌말 도당나무 치성, 서낭나무 치성
  • □ 수택동 수늪마을 산치성
  • □ 수택동 검배마을 서낭나무 고사
  • □ 수택동 이촌마을 산치성
  • □ 인창동 궁말 산치성
  • □ 인창동 동창마을 산신제, 부군제
  • □ 사노동 산치성
  • □ 언재마을 산치성
  • □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
  • □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

이상이 이번의 조사에서 드러난 마을신앙의 종류들이다. 이를 통하여 구리시 마을신앙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마다 제명(祭名)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산신신앙>과 결부되어 있으며,
둘째, 산신신앙과함께 <도당굿>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토평동 벌말, 수택동 이촌마을, 인창동 동창마을, 사노동, 갈매동 담터마을과 도촌마을).
셋째, 현재는 도당굿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으나, 예전에는 모두가 도당굿의 형태를 지녔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넷패, 몇 군데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제일(祭日)이 대부분 음력 10월 초순에 집중되어 있으며, 10월이 아닌 경우는 인창동 동창마을 산신제(음력 1월 1일), 갈매동 담터마을 산치성(음력 2월 초하루),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음력 3월 3일) 등이다.
다섯째, 산신신앙과 함께 신목(神木)을 모시는 고목제(古木祭)가 나타난다(교문동 한다리마을, 수택동 검배마을, 사노동 등).

이외에 토평동 벌말에서 조사된 정제(井祭), 즉 우물고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널리 조사되는 마을신앙의 한 형태로 구리시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아천동 우미내마을의 나무장승, 인창동 응달말과 양지말의 돌도깨비, 사노동 등에서 장승신앙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우리나라 마을신앙에서는 일반적으로 산제(山祭) 혹은 산신제(山神祭)와 당제사, 당고사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산제를 드리는 신체(神體)나 장소를 당(堂)으로 관념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대체로 우리 나라 마을신앙의 경우는 상당신(上堂神)과 하당신(下堂神)의 구분이 있는바, 상당신은 바로 산신을 의미하며, 하당신은 산신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로 내려와 마을의 장승이나 솟대, 탑, 우물 등에 제사를 올리는 하당신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하당신을 모시는 신앙도 크게는 상당신을 모시는 산신제의 연장선상에서 제의가 열리는 경우이므로, 현재는 마을에 따라서 산신을 모시는 상당신의 제의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는 모두 산신제와 연결되는 제의(祭儀)의 한 형태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볼 떼 구리시의 경우 현재는 산신제의 흔적이 없이 하당신격인 서낭나무를 모시는 제의만 남아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결국 이 제의들도 모두 산신제와 연결되고 있다.
구리시의 산신제가 도당굿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유래가 오래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서는 산신은 곧 천신(天神)이었다. 사람들은 천신, 곧 하늘과 교통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날짜를 정하여 산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미미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천신인 산신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신을 만날 수 있는 대표를 뽑아서 산신을 만나도록 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마을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祭官)들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제관은 아무나 될 수가 없었다. 특히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에서는 정치와 제의가 서로 구분이 없어서 행정의 기능과 종교의 기능이 하나로 합치되어 있었으나, 점차 이 기능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제정일치사회에서는 행정을 담당하는 존재나 종교를 담당하는 존재는 모두 하나로서, 하늘의 점지가 있어야만 이를 담당할 수 있었고, 제정이 분리된 시대에도 종교를 담당한 자들은 특정한 신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말하는 무당들인 것이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는 제사가 바로 정치였으며, 당은 곧 제사와 정치를 동시에 집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당의 의미는 대청(大廳), 대옥(大屋), 제사를 지내는 장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 등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대 사회 이래로 자치적인 기능도 함께 가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마을 제의가 끝나면, 마을 공회당에 주민들이 모여 올해 마을에서 행할 행사를 의논하고 지난 해의 일을 되돌아보는 등의 행사가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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