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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는 한강 이북 경기도의 중앙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왕숙천과, 북으로는 남양주시, 서쪽으로는 서울의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와 시 경계를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차산과 한강을 경계로 서울과 마주보고 있다. 본래 경기도와 양주군에 속하다가 1980년에 양주군과 분리되어 남양주군 구리읍이 되었고, 1986년 구리시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구리시는, 구리시만의 독자적인 역사 사실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구리시의 역사는 이웃한 양주 혹은 남양주 등과 겹쳐지는 역사의 서술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다만 구리시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 있을 경우는 반드시 서술하되, 일반적인 서술은 양주, 혹은 남양주시와 구분하기가 어려운 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하며, 서술하는 시대는 선사시대부터 해방 이후 제1공화국 때까지 임을 미리 밝혀 둔다.

1.구석기시대 구리시역사 > 선사시대

구리시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는가를 밝히기는 현재로서는 무척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구석기시대인들의 경제활동이 주로 수렵과 어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기존의 연구로 미루어 볼 때, 한강과 접경한 구리시 혹은 그 인근에서도 사람들이 일찍부터 거주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현재 한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30여 곳에서 발견되고, 특히 구석기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유적지로 화도면 검터, 두촌, 마진, 마재 등과 전곡리 유적지 등이 구리시와 이웃하여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강변에 접경한 구리시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매몰되고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구리시와 한강변으로 면한 서울의 면목동 일대에서 채집된 300여 점의 석기와 그 파편들은 그 시기가 3만년을 전후하는 구석기 후기 문화층의 것으로 밝혀졌다. 발견된 석기들은 외면찍개, 양면찍개, 긁개, 망치돌, 마치돌 등의 몸돌석기와 뾰족개, 옆날 긁개, 끝날 긁개 등의 격지석기들로, 모두 석영맥암 석기들로 밝혀졌다.

1.신석기시대 구리시역사 > 선사시대

구석기시대와 비교하여 신석기시대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경제활동이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전환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채집경제단계가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개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농경의 방법이 전수되어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사용된 농기구로는 돌보습, 돌괭이, 돌낫, 반달칼, 짐승의 뼈로 만든 괭이, 낫 등이 나타나며, 주로 도토리, 조, 피 등이 식량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는 약 150여 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구리시 지역의 신석기문화 유적은 구리시 아차산의 동쪽인 현재의 사노동, 인창동, 동창동, 구릉산 일대에서 빗살무늬 파편과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이 수습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유적지들은 모두 일제시대에 수습된 것으로, 현재는 모두 파괴되어 학술적인 검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적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유적지와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서울의 미사리 유적지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기원 전 4,000~3,500년을 상한으로 볼 수 있는 유적지라 추정되며, 이 사실은 미사리만이 아니라 주변의 한강유역지대에서는 한강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배경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주민들의 거주가 있었다는 것을 실증하는 자료라 할 것이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시작은 현재로서는 명확한 설정에 어려움이 있으나, 대개 기원전1,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북방에서부터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그 이전인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살던 주민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북방에서 이주한 어면 새로운 종족에 의하여 전래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중국 측의 역사서에서는 이들을 예맥족(濊貊族)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을 유물을 통하여 살펴보면, 우선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서서히 무늬 없는 토기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늬 없는 토기를 사용한 주인공들은 그 문화의 연결이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지방의 청동기를 바탕으로 내몽골의 오르도스 청동기문화, 스키타이 청동기문화와 연결되며, 지역적으로는 현 중국의 요녕지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주민들은 주로 하천이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지대의 경사면에 움집을 짓고 생활하였으며, 주 생업 경제는 농경생활이었다. 구리시는 한강과 왕숙천을 옆에 끼고 있어 이 시대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매우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발견된 유적지나 유물의 수와 종류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인창동, 교문동, 사노동과 아차산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출토, 수습되고 있는 형편이다. 인창동 일대에서 발견된 유적지는 일제시대 요코야마(橫山將三郎)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나, 현재 유적지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인창동 일대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토기종류로 공열토기, 외반구연토기, 호형토기, 우각형파수부토기 등이 있으며, 석기류로는 양날석부, 외날석부, 환상석부, 외날주상석부, 반월형석도, 마제석검, 마제석촉, 숫돌, 방추차, 어망추 등이 있다. 또한 최근 인창리 일대의 지표조사에서는 무문토기의 파편과 석기 등이 채집되기도 하였다.

교문동 일대에서는 1932년과 1934년 2차에 걸쳐 요코야마(橫山將三郎)에 의하여 조사되어,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채집된 토기류로는 공열토기, 점토대토기 등의 무문토기류와, 석기로는 양발석부, 외날석부, 방추차, 유구석부, 반월형석도, 마제석촉, 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이 사용된 시기는 청동기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사노동에서는 구릉지대에 있는 석관묘에서 동검 1점, 동포 1점, 한식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역시 일제시대에 조사된 유적으로서 토기를 비롯한 유적 전체의 양상은 알 수가 없다 아차산 유적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의 경계지점의 해발 282m의 나지막한 봉우리 주변에 위치한다. 이 유적지에 대한 조사는 이미 1965년에 보고서가 제출된 바가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주변이 공동묘지인 관계로 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마제석부, 반월형석도 등의 석기류와 토기류 약 500여 점 이 수습되었다. 특히 이 유적지에서는 흑색마연토기, 즉 흑도(黑陶)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흑도는 인접한 남양주시의 석수리(水石里)유적지의 흑도와 흡사한 형태로 굽접시가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유적지에서는 최근 구릉의 정상부에서 무문토기편이나 점토 대토기편 등이 발굴되기도 한다.

한편 청동기시대의 가장 보편적이 묘제는 고인돌이다. 현재 구리시에서 발견된 고인돌 혹은 고인돌로 추정되는 유적으로는 우선 구리시 인창동의 고인돌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지는 동구릉 남측 구릉 사면의 묘목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4년 한신대학교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곳으로,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되는 커다란 석괴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개석 추정 석괴의 하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보다 확실한 유적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는 별다른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인창동에는 이와 함께 양지말의 고인돌 유적도 있다. 1994년 한신대학교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 때 확인된 곳으로, 인창동 아파트단지 서쪽에 있는 남북으로 긴 장타원형의 낮은 구릉의 정상과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로 보이는 석괴는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면에 분포하는데, 대체로 기반식 고인돌 내지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되나, 정형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없다. 괴석 하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야 명확한 성격 파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는 고인돌과 관련된 유물은 채집되지 않았다. 이외에 사로동 언재말의 고인돌 유적과 동구동의 동구릉 동북쪽의 암석군도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다. 사로동 언재말의 유적지에는 탁자식 고인돌로 추정되는 1기를 비롯해 개석식고인돌로 보이는 크고 작은 석괴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곳에서 석촉이 수습된 적이 있다고 하나 현재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동구릉 동북쪽에서 확인된 유적지도 1994년 한신대학교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시 고인돌군일 가능성이 제기된 지점이나 주변에는 별다른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출토된 유물들은 대체로 농기구류, 공구류, 어로 도구 등과 토기류가 주를 이루면서 주로 구릉지대에서 출토되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청동기시대 구리시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한강과 왕숙천 주변을 생활 근거지로 삼아 농경과 어로에 종사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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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한시대 구리시역사 > 삼한,삼국시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으로 이루어진 당시는 지역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마한의 경우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이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구리시 지역은 마한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구리시는 종전 양주군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구리의 역사는 양주군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마한조’ 에 의하면 마한에는 모두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은 고리국(古離國) 혹은 모수국(牟水國) 중의 하나일 것으로 여겨진다. 고리국으로 보는 이유는 현재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를 고구려가 점령했을 때의 행정지역명이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골의’의 음과 ‘고리’의 음이 유사한 때문이다. 모수국으로 보는 이유는 역시 고구려 때 양주지역의 행정지역명이 매성현(買省縣)으로, ‘매성’과 ‘모수’의 음이 흡사한 것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

1.마한시대 구리시역사 > 삼한,삼국시대
1)백제시대

마한의 영역 내에 있었던 구리 지역은 서울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부근의 백제가 성장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백제의 판도로 흡수되었다. 특히 구리시 지역은 백제 왕궁의 건너편인 한강 북안에 자리 잡은 관계로 백제의 입장에서는 국방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강 북안의 아차산 지역에는 아차산성과 관련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장성의 존재가 주목된다.

장성의 흔적은 뚝섬 부근의 한강변에서 북쪽으로 높은 지대를 따라 아차산에 거쳐 지금의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아천동 일대까지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장성 건축의 주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이 장성은 백제와 관련 없는 조선시대 살곶이목장(箭串牧場)의 담장 흔적이라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장성이 조선의 살곶이목장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으나, 처음 축조연대는 백제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장성이 백제에 의하여 처음 축조되었다면, 방어의 대상이 고구려인데, 장성의 위치, 형세가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조기에 포착할 수없다는 점에서 한강 남쪽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방어하는 성으로서는 그 기능이 취약하지만, 아차산 능선에서 확인되는 보루(堡壘)의 존재를 들어 장성의 백제 축조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 보루는 현재 아차산의 줄기를 따라 중랑천 방향으로 뻗어 있는 것과, 반대편인 광장동쪽의 아차산 봉우리에 방어목적을 지닌 보루들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현재는 이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알려져 있지만, 아차산의 모든 보루가 고구려가 축조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견해이다. 말하자면 현재 고구려의 보루로 알려진 것 중의 많은 것이 백제가 축조한 보루의 상당 부분을 고구려가 확대, 이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루의 내부에서 백제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발굴이 고구려 문화층 밑에 존재할 것으로 보이는 백제 문화층까지 도달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성과에 의하면, 이 보루들의 백제 축조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다년간에 걸쳐 발굴, 조사한 결과 보루의 고구려 축조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1)고구려시대

고구려가 구리시 일대를 점령하고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한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왕성이 함락된 이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확실한 것은 장수왕이 고구려를 침범한 475년이라 할 수 있다. 장수왕은 당시 백제왕인 개로왕을 포로로 잡아 처형하고 아단성(阿旦城), 곧 지금의 아차산성까지 장수왕이 내려와 군진을 설치하였다. 아차산 일대를 점령한 고구려는 현재 양주군의 영역 내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고, 그 관내였던 지금의 남양주 진접읍과 진건면 일대에 골의노현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과 인접한 현재 구리시 지역도 골의노현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지금의 서울 북쪽 양주방면에는 남평양성(南平壤城)이라는 별도(別都)가 설치되었다. 또한 남평양성의 방어를 위해 현재의 마장동에서 아천동 방면으로 뻗쳐 있던 기존의 보루들을 보강하였다. 이 때문에 현재 아차산지역에서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고구려의 군사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고구려 유적들은 주로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서 발견되는데, 초기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남하하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로 축조되었다가, 나중에는 북상하는 백제와 신라를 방어하는 기지로 활용된 곳이다.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88년으로, 백제의 몽촌토성을 발굴, 조사할 때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인 나팔입항아리가 발굴되면서 부터이고, 이를 근거로 1977년 발굴 조사된 구의동 유적이 실제로는 고구려 군사 요새, 즉 보루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1994년 구리시와 문화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를 통하여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대에서 많은 고구려 유적지가 확인되었고, 1997년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표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바로는 현패 모두 15개소의 고구려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조사 전에 이미 파괴된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더 많은 유적지가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발굴, 조사된 보루를 몇 군데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아차산 1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아차산 줄기 중 해발 250m의 봉우리에 위치한 고구려 보루로 서울시광진구 중곡동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유적은 평면 장타원형의 토루가 가운데의 평탄한 지형을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크기는 토루의 상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장축은 약 50m, 단축은38m 내외로 계측되며, 면적은 1,900㎡로 토루의 가운데는 움푹 들어간 상태로 평탄면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1994년에 행해진 지표조사에서 다량의 고구려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유물들은 이미 발굴 조사된 아차산 4보루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토루는 석축성벽이 붕괴되고 난 후, 흙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근 군사활동으로 가운데 부분의 흙을 굴토하여 토루를 보강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성벽의 흔적은 유적의 남동쪽에 위치한 등산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등산로는 유적 외곽의 일부분을 삭토하면서 형성되었는데 등산로와 인접한 부분에 성벽으로 보이는 석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어 석축성벽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등산로 주변에는 유적의 성벽이나 건물석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다량 흩어져 있고, 등산로를 계단형태로 만들면서 유적의 석제를 재사용한 것도 보인다. 토루의 폭은 대략 6m 내외이며, 토루의 상면과 내부 평탄면과의 높이 차는 약 1.2m이다. 유적 내부와 토루에는 소나무와 잡목들이 자라고 있다.

②아차산 2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해발 276.2m의 봉우리에 위치한 고구려 보루 유적이다. 아차산 1보루를 지나서 아차산 3보루(그네터)쪽으로 약 350m 정도 진행하다가 아차산 주 능선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작은 봉우리에 위치한다. 현재 지표면에는 다량의 석제가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는데, 돌무더기 남서쪽에 인접해서 2~3단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의 평면은 형태로 보아 성벽의 치(雉)부분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본 성벽은 평면 원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흔적을 통해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데 지름이 약 27m 내외로 면적은570㎡로 비교적 소규모의 보루이다. 유적의 남동쪽에도 석축이 확인되는데, 원래 유구의 정확한 형상은 알 수 없지만 성벽이었거나 성 내부의 유구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치 부분의 성벽은 장방형의 비교적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 안쪽지역에는 다량의석재가 쌓여 있는데, 이는 유적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후대에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 대부분의 성벽은 이미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되며, 1994년의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석축 내부에는 단단한 소토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③아차산 3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해발 296m의 봉우리에 축조된 고구려 보루로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상부는 상당히 넓은 평탄면이 장타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차산 2보루와는 직선거리로 약 250m 정도 떨어져 있다.
유적의 장축방향은 남북방향으로, 유적의 남단의 동편으로는 6~7단의 석축이 노출되어있다. 동쪽에는 성벽으로 보이는 남북방향의 석축이 길게 남아 있으며, 그 안쪽으로 한 단 높여서 또 하나의 석축이 이와 평행하게 남아 있다. 두 석축열의 간격은 6.5m 내외이다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 유적의 발굴 결과를 통해 볼 때 두 석축 중 바깥쪽의 것은 성벽인 것으로 생각되고 안쪽 석축은 내부 건물의 벽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유적의 남쪽에도 성벽의 흔적을 관찰할 수 있는데, 북쪽과 서쪽에는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평탄면의 규모와 북단 등산로의 바닥에 노출되어있는 석재들을 통해 추측해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보루로 판단된다. 대략적인 규모는 장축 약 100m, 단축 약 40m이며 내부 면적은 4,000㎡로 추정된다. 유적의 북쪽 등산로상에는 바닥에 많은 석재가 노출되어 있어 이 부분에 성벽 등의 유구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차산 4보루로 이어지는 등산로 상에는 기존에 아차산장성으로 보고된 폭 3m 내외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유적의 북단에서도 이러한 석축이 관찰된다. 1994년의 지표조사에서 다량의고구려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④아차산 4보루

구리시 교문 1동에 위치한 유적은 해발 285.8m의 아차산 정상에 축조된 고구려 보루로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남쪽으로는 아차산의 보루들과 연결되고, 서북방으로는 용마산과 연결되는 지점에 해당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상당히 법은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다.
유적은 크게 외곽의 석축성벽과 내부의 건물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은 타원형으로 둘레 210m, 높이 4m 가량이며 동쪽과 서쪽에 각 1개소의 치가 조사되었다. 성벽은 유적 정상부의 평탄면에서 직선거리로 5~7m 바깥쪽에 쌓여 있으며, 한강 쪽이 바라보이는 동쪽은 비교적 많은 부분이 남아 있으나 용마산 쪽인 서쪽은 거의 훼손되어 있다. 성벽 안쪽의 평탄면에는 모두 7기의 건물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건물지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었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3호 건물지의 경우 광장을 포함하여 3칸의 온돌방과 2기의 집수시설 및 배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밖에 3호 건물지 북서모서리 외곽에 간이 대장간 시설도 1기가 설치되었다.
저수시설은 2기가 확인되고, 온돌은 모두 13기가 조사되었다. 2호 온돌을 제외하면 모두건물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어 취사와 난방을 주요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13기 모두 납작한 할석으로 벽을 쌓고 뚜껑돌을 얹은 후 점토를 바른 온돌로 평면형태에 따라 직선형과 ‘ㄱ’ 자형으로 나뉜다. 아궁이는 온돌 고래의 진행방향과 수직으로 설치되었다. 4보루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는 모두 26개 기종, 538개체 분이 출토되었다. 주로 온돌유구 주변에서 많이 출토되어 실생활과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토기류는 기능상으로 저장용기, 운반용기, 조리웅기, 배식용기 등으로 구분된다. 토기류는 대략 6세기 이후로 편년되며, 일부는 5세기 중반경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철기류는 총 319점이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 등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완전히 복토한 상황이고 안내간판 및 보호시설을 설치하여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차산 제4보루는 5세기 중엽 남하하던 고구려군의 전초기지로 축조되었으며, 그 이후 6세기 중반에는 북진하는 나제동맹군의 저지를 위한 방어기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⑤용마산 5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아차산 능선과 용마산 능선이 만난 후 북쪽으로 뻗어 가는 능선상의 첫번째 봉우리(해발 316.3m)에 위치한 유적으로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과의 경계가 지나간다. 북동방향의 경사면에는 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평탄면의 외곽과는 6m의 간격이 있다. 성벽은 많이 무너진 상태이지만 세장방형의 석재를 횡적해서 축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10단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을 포함한 규모는 장축 75m, 단축 30m이며 면적은 대략 2,250㎡이다.

⑥망우리 1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용마산과 아차산 줄기가 만나 북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능선 중에 완만하게 솟아오른 해발 280.3m의 봉우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정상부의 평탄면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고, 정상부 바로 남쪽 완경사면에는 타이어를 사용하여 대규모의 군용 교통호가 만들어져 있어 유적이 상당 부분 파괴된 것으로 생각된다. 교통호 등지에서 수 점의 고구려 토기가 수습되었으며, 이전 지표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고구려 토기편이 수습된 바 있다.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지형 상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보루로 추정된다.

⑦망우리 2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구리시와 서울시의 경계를 이루며 용마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오는 능선은 낮아지면서 작은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는데, 유적은 이 중 해발 281.7m의 봉우리에 위치하였다. 이 지역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포함된 곳으로 유적의 전 지역에 분묘가 조성되어 있어 원래 형태와 규모를 찾기는 어렵다. 분묘 주변에는 축대를 둘러서 보호하거나 석재를 이용하여 담을 친 것이 관찰된다. 이 중 석재의 형태 및 치석상태로 보아 보루의 축성 시 사용한 것을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지표조사에서는 고구려 토기편이 출토되어 이와 관련된 유적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⑧망우리 3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망우리 2보루에서 북동쪽으로 160m 떨어진 해발 275m의 봉우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의 경계지점이다. 망우리 2보루와 같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포함되어 정상부를 비롯한 전 지역에 분묘가 조성되었고, 이로 인해 유적의 원래 형태와 규모를 찾기는 어렵다.
정상부의 남사면 에는 큰 규모의 묘지가 있는데, 이 뒤편으로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이 석축은 무너졌으나 현재 5~7단 정도 남아 있으며, 치석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석재의 형태 등을 통해 볼 때 현대에 가공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보루 축성시 사용한 석재를 현대 무덤 조영시 재사용했을 가능성과 이 석축 자체가 보루의 성벽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상부에도 석재를 이용하여 담을 친 것이 관찰되며, 이 역시 유구의 축조에 사용한 것을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표조사에서는 고구려 토기편과 무문토기편이 출토되었다.

⑨시루봉 보루

구리시 교문 1동의 시루봉(해발 205.8m)은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는 아차산의 주능선에서 동남쪽 한강으로 흘러내린 능선상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유적은 남으로는 한강, 동 으로는 왕숙천과 구리 일대의 평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하고 있다. 유적의 상부 평탄면은 평면 형태가 활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북쪽 부분에 비해 남쪽 부분은 지대가 약간 높다. 1999년과 2000년의 발굴조사 결과 총 둘레 220여m 이상의 석축성벽이 유적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쪽으로 성벽과 평행하게 대형 건물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남동쪽 성벽에서는 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남서쪽의 성벽 트렌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벽의 잔존 높이는 1.7m이며 13단이 남아 있다. 성벽의 원래 높이는 최소한 대형 건물의 기단 높이 이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성벽의 높이는 3m에서 높은 곳은 4m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온돌은 총 6기가 조사되었는데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것을 통해 볼 때 모두 직선형의 평면형태이며, 아궁이는 온돌의 장축방향과 수직이다. 배수시설과 저수시설이 남아 있으며, 출토된 유물은 주로 토기류로 유적의 훼손 정도가 심하여 대부분 깨어진 채로 수습되었다. 수습된 토기를 보면 고구려 토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선 태토는 고운 니질로 되어 있고, 표면색은 황갈색이나 흑색을 띠고 있으며, 소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나 표면은 만지면 손에 묻어날 정도로 연질이다. 출토된 토기 기종은 대옹과 호?시루?접시?완?장동호 등이며 모든 토기가 평저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루나 동이류의 경우 특징적인 대상파수(帶狀把手)가 달려 있다. 아차산 4보루에서는 접시 바닥에 명문이나 기호와 같은 것을 새긴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서는 아직까지 명문이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동일한 기호를 새긴 2점의 접시가 출토되었다. 철기는 약 1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무기류와 공구류로 나눌 수 있다. 무기류로는 화살촉과 철모, 창고달이 등이 있는데 화살촉은 모두 가늘고 긴 형태이다 공구류로는 철정과 철부,U자형 삽날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와 철기류는 이미 조사된 아차산 4보루의 토기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토기들의 기종 및 기형을 통해 볼 때 유적의 중심연대는 대략 6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 된다.
시루봉 보루는 현재까지의 양상으로 보아 아차산 제4보루와 동일한 성격의 군사유적으로 확인되며, 다만 성벽의 축조양상이나 출토유물의 양상, 유적의 입지조건 등을 고려할 때, 아차산 4보루보다는 하위부대가 주둔한 장소로 추정된다.

1.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구리 구리시역사 > 삼한,삼국시대

현재의 구리시 일대와 한강 유역을 점령, 지배했던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 동맹군의공격을 받아 76년 만에 이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구리시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토로 환원되었지만 불과 9년 후 신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한강 하류지역에서 백제군이 철수함에 따라 구리시 지역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신라는 경기도 하남시 일대를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아마 구리시 지역도신주의 범주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603년에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한 고구려의 재공격이 있었으나, 신라는 진평왕이 직접 이곳으로 와서 고구려를 막아 내었다. 604년 신라는 이곳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신설하게 되어 구리시 지역도 포함하게 되면서,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로서 구리시 지역의 전략적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다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북한산군 한양군(漢陽郡)으로 하고, 관내의 골의현군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칭하면서, 지금의 구리시 일대도 황양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구리시 지역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행정구역명칭이 변경되는 것과 관련하여 이 지역의 아차산에 축조되어 있는 아차산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은 현재 구리시 교문 1동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아차산의 줄기가 한강변에 이르러 마지막 봉우리를 이루는 곳으로, 남쪽으로는 강남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북으로는 아차산 1보루를 비롯하여 아차산 및 용마산 일대가 조망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아차산성은 아단성(阿旦城), 아차성(阿且城), 장한성(長漢城) 등으로 불려 왔으며,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백제 책계왕(責稽王) 원년(286)에 축성되고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공취한 성으로 기록되었다 또 475년 백제 개로왕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는 등 삼국이 한강유역을 놓고 벌인 각축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그 후 고려 조선시대에는 산성으로 사용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차산성은 1973년에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고, 1994년 이후 수차례의 발굴조사와 기초학술조사가 이루어줬다. 또한 1999년에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아차산성의 성벽과 성 내부 전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아차산성의 축성방법과 축성시기 및 내부 시설물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시굴조사 결과 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과 축조시기에 대한정보 및 성 내부에 산재되어 있는 유적의 대략적인 분포와 구조에 대한 기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성의 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산성의 성격을 좀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분석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성벽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 한강유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언급한 문헌기록과는 상반되는 결과로 주목된다.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 증 토기는 총 12종으로 945개체가 출토되었고, 철기는 총88개체가 수습되었다. 이 외에 명문기와를 포함한 수천 점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모두 신라 토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며 백제 및 고구려 토기는 확인할 수 없었다. 토기질은 경질이며 전체적인 색조는 회청색인 것이 대다수이다. 뚜껑과 사발의 표면에는 도장과 같이 찍은 문양[印花文]을 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목이 긴 항아리의 목에는 물결무늬[波狀文]를 그어서 문양을 내었다. 토기의 종류는 각종 고배(高杯), 항아리[壺?甕], 굽 달린사발 [臺附碗], 사발[?], 동이[大鉢], 시루[甑], 뚜껑[?], 접시, 각병(角甁), 주름무늬병 등이다. 인화문의 문양 새김 기법과 파상문, 그리고 대부완, 고배, 각병, 주름무늬병 등은 신라의6세기 후반에서 9세기 중반의 토기양상의 중요한 특징에 해당한다.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철기는 무기류, 농공구류, 용기류, 기타 철기로 구분되는데, 무기류는 화살촉이나 살상용 도끼 등이며 농공구류는 자귀?보습?쇠스랑 등이다. 용기류는 철제촉두, 철솥편이며 기타 철기는 문고리, 허리띠 등 다양하다 화살촉을 제외하면 무기류보다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기와는 수천 점의 평기와와 막새기와 그리고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조사되었다. 당시 기와를 얻는 건축물이 흔치 않았을 것을 감안할 때 아차산성에서 다량의 기와가 조사된 것은 중요한 건물들이 아차산성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명문기와는 대부분 “북(北)”, “북한(北漢)”, “한산□(漢山□)”, “수(妥)”, “해(蟹)”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이미 보고된 “북한수국해구선(北漢受國蟹口船)”의 파편으로 생각된다. 또한 “북한산□(北漢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와도 다량 조사되었는데, 신라가 한강 이북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다는 기록과 비교가 가능하여 아차산성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점이다.

후삼국시대에는 이곳에도 새롭게 호족이 등장하여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게 되는데, 양주지역에서는 매조성 장군(買曺城 將軍)을 지칭하는 능현(能玄)이란 호족이 있었다. 매조성은 곧 매초성(買肖城)이며, 능현은 925년에 고려에 귀부한 인물이다. 즉 능현이 고려에 귀부하기까지 양주와 구리시 일대는 능현의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935년에 양주지역은 다시 후백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그의 식읍이 되는데, 그 기간은 불과 1년 정도였지만 구리시를 포함하는 양주 일대가 백제 초기의 근거지였다는 점과 함께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의 비중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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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시대 구리 지역의 연혁 구리시역사 >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구리 지역은 전 시기에 걸쳐 양주에 소속된 역사로 등장하고 있다. 양주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궁예전>이며, 그 후 고려에 항복한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의 양주는 양주 이외에 남경(南京) 한양(漢陽)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양주는 성종 2년(983년) 12목을 설치할 때 양주목(楊州牧)이 되면서 지방 행정상의 요지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목에 목사와 부사, 판관 등을 파견하여 목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목 지역이 너무 광대하여 통제의 효과를 기대하기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제도의 보완을 꾸준히 시도하여 985년부터는 목에 파견되는 지방관들이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각 1인씩을 파견하여 지방교육을 담당하고, 아울러 지방의 인재들을 중앙으로 천거토록 하였다. 995년에는 다시 지방제도의 개편을 실시하여 10도제 및 12절도사제로 개편될 때,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한 절도사체제로 개편되었다. 양주는 비록 관내도에 소속되었지만 도(道)의 장관으로부터 행정적인 간섭은 받지 않았다 당시의 도는 조선시대와 달리 상주관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순찰하는 정도의 기능만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목을 파하면서 군사적인 기능을 강화하여 지방을 통제하고자 하였는데, 이대 양주는 해주의 우신책군(右神策軍)과 공조를 이루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이는 아마도 거란족의 침입을 경험한 고려가 다른 침략에 대비할 필요성에 의하여 지방 호족세력들과 긴밀한 협조를 이룩할 필요성에 의한 개편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다시 현종 3년(1012년) 절도사제를 폐지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안무사(道按撫使)를 둘 때, 양주는 안무사(按撫使)가 되었다. 그러나 1018년의 지방제도의 개편 때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앙의 행정력이 그 전대에 비하여 보다 더 하부까지 침투되어 지방통제를 강화하고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에 내실을 기하려는 움직임으로 파악된다.

그 이후 문종 21년(1067년)에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5도양계 체제하에서 양광도(楊廣道)의치소가 되어 충렬왕 때까지 지속되다가 충렬왕 34년(1308년) 다시 한양부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당시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이유는 풍수도참설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즉 당시 수도인 개경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로 문종은 이어(移御)를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중지한 일도 있었으니, 문종의 남경 설치는 풍수도참설의 한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경의 설치가 처음의 의도와 달리 일시적인 조처로 끝이 나자 양주는 다시 옛 명칭인 양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다가 숙종년간에 다시 남경재건치(南京再建置) 시도가 이루어진다. 당시 숙종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순탄치 못한 점이 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인주(仁州) 이씨(李氏) 집안의 이자의(李資義)와의 충돌, 잦은 천재지변 등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재도약을 위한 지리도참사상이등장하도록 하였고, 남경을 다시 두자는 의견도 이때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왕권은 안정시키고 지방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경의 재건치 지역으로 거론된 곳은 조선시대의 노원(盞原)과 해등(海等)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은 구리 지역에 일부가 편입되었던 노해면(蘆海面)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그 아래에 속군(屬郡)으로 교하(交河) · 견주(見州) · 포주(抱州)의 3개 군과, 속현으로 행주(幸州) · 봉성(峰城) · 고봉(高峰) · 심악(深岳) · 풍양(豊壤) · 사천(沙川)의 6개 현을 거느리게 되면서, 서경(西京) · 동경(東京)과 함께 고려 지방행정체계의 최고의 단위로 부상하였다.

2.남경시대의 구리 지역 구리시역사 > 고려시대

남경의 재건치가 이루어진 이후, 고려의 왕들은 이곳에 자주 이어하면서 가궐(假闕)의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예종 · 인종 · 의종 등은 수차례 이곳으로 이어하였고, 특히 몽골의 침략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도참행사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종은 남경에 죽판궁(竹坂宮)을 지어 이어하였고, 한 승려의 말에 따라 남경의 가궐에 어의를 봉안하게 된다. 이는 기록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만큼 양주가 지리도참설에 있어서 중요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라 할 것이다. 남경시대의 이 지역은 또 외적의 침입을 맞아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고려는 국초 이래로 거란족(契丹族), 몽골족 등의 침입이 연속되었다. 성종 때의 거란 침입은 서희의 담판외교로 물리쳤으나, 강조(康兆)의 변(變)을 구실로 내침한 거란의 2차 침입 때는 현종이 나주로 몽진을 갈 정도로 피해가 심하였다. 당시 양주는 현종의 몽진 경유지였었고, 거란족이 물러간 이후, 파괴된 개성을 복구할 때와 송악성, 서경의 재성(在城) 등을 수축할 때 개경의 직접적 통제를 받고 있었던 당시의 양주민들은 개성 주변의 성곽공사에 부역 동원되어 각종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거란족의 침범 이후, 양주일대가 직접 전장이 된 것은 몽골의 침략 때이다. 양주지역은1216년부터 121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경험하였는데, 특히 첫 번째의 침입 때 김취려(金就礪)가 이끈 군대들이 몽골군대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양주의 백성들도 김취려의 관군에 소속되어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로를 세우게 된다. 또한 몽골과 관련하여 양주 또는 남경지역이 사료에 나타나는 것은 몽골의 1차 원정군을 인솔한 사리타이(撒禮塔)가 고려를 침범하면서 별동대(別動隊)를 보내 광주 · 충주 · 청주 등과 함께 양주를 침범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2차 몽골 침입 때 고려가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하자 몽골군이 개경을 거쳐 남경의 한양산성(漢陽山城)을 공격하였다는 기록과 3차 침입 때 광주와 남경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들여와 강화도 방어에 주력하였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볼 때, 몽골군이 남부지방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전략적 거점지역이 양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기록은 3차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에도 몽골의 침입이 계속 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실제로는 더 많은 몽골과의 전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양주의 백성들은 한양산성이나 혹은 강화도에 들어가 생활터전을 마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3.한양부(漢陽府) 시대의 구리 지역 구리시역사 > 조선시대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후,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사회는 많은 변화를 수반하였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고려 3경 체제의 전면 개편이 있게 되고, 양주는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된다. 한양부로의 격하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즉 양주를 한양부로 격하할 당시의 충선왕(忠宣王)은 왕권의 강화와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하여, 그 전대에 비하여 더 많은 지방관을 중앙에서 파견하게 되었다. 이에 양주도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되면서 부윤(府尹), 판관(判官), 사록(司祿) 등의 관리가 중앙에서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개경과 근접했다는 이유로 장단, 풍양등과 함께 왕실의 전렵지가 되었다.

공민왕대에 이르러 고려 조정에서는 남경천도안이 등장하게 된다. 공민왕의 남경천도계획은 비록 천도 반대 여론에 밀려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남경천도론은 그 다음 왕이 우왕대에 다시 등장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게 되었다. 우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주청을 받는 형식으로 우왕 7년(1382년), 남경 천도를 결정하고, 그 해 9월, 자신이 직접 남경으로 이어하였다. 우왕은 공민왕대의 남경천도가 여론에 밀려 실패한 것을 감안하여 6개월간이나 남경에 머물면서 천도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으나,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우왕과 창왕을 축출하고 고려의 전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공양왕 때, 다시 한번 남경천도를 시도하였다. 이성계는 개성이 지닌 고려 수도로서의 상징성 등을 고려하여 이미 고려시절부터 가궐지(假闕地)가 있었던 남경지역을 천도의 적격지로 판단하고 시도했으나 1년 만에 계획을 중단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따라 양주도 다시 한양부로 격하되어 고려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공민왕 이후 우왕을 거쳐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양주가 천도의 적격지로 부상한 것은 고려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지리도참사상이 주 요인이 되었다. 특히 우왕 때의 천도 계획은 당시지리도참을 관장하던 서운관(書雲觀)의 주청으로 시도되었다는 점과, 그 주청이 [도선비기(道詵秘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양주지역이 일찍부터 지리도참의 관점에서 매우 주목되었던 지역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공양왕대에는 1년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실질적으로 천도가 단행되었다는 점을 볼 때 지리도참설이 유행했던 고려사회에서 양주가 지닌 행정적인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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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리 지역의 연혁 구리시역사 > 조선시대

구리시는 고려시대 양주목과 남경, 한양부 등 명칭의 변경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재의 양주 관할 하에 속하게 된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개창한 후 신 도읍지의 후보를 물색하던 중,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장소의 변경과 논의가 있었던 끝에 결국 조선의 새 수도로 한양이 결정되고, 궁궐조성이 끝나기도 전인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새 왕조의 수도를 옮긴 조선은 다시 행정체제의 개편을 시도하여, 강력한 중압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군현제의 실시를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제도는 전국을 8도체제로 고정하였다. 도 아래에 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각각 편제하였고 이에 따라 경기도 관내에는 4목 7도호부 7군 19현이 편제되었다.

구리시가 속한 양주는 1394년 수도가 한양으로 천도되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그 다음 해 양주군으로, 1399년에 양주부로, 1413년에는 양주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세조 12년(1466년)에 양주목이 되었다.
군현제 하에서는 각 군현 급까지만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고, 그 아래의 면리에는 면임과 리임을 임명하여 자치적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에 양주목의 관할 하에 어떤 면리들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18세기의 자료를 통하여 양주목에 소속된 34개의 면과 140개의 리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邑內面 : 府君里, 蓮亭里, 弘門里, 中里, 鄕校里, 紙藏里, 麻田里, 山北里, 南方里, 於斗里, 院祠里, 氷庫里
  • 北古州內面 : 古邑里
  • 檜巖面 : 末汗里, 內檜巖里
  • 於等山面 : -牌里, 二牌里
  • 泉川面 : 道德里, 遯溪里, 德亭里
  • 陳畓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 縣內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 伊淡面 : 松羅里, 舍堂里, 黃梅陰里, 廣巖里, 傑山里, 柯亭子里, 安興里, 鳳巖里
  • 靑松面 : 金材里, 白虎里, 蟻要里, 坪村里, 官材里, 炭洞里, 長淵里, 二牌里, 大田里, 哨村里
  • 山內面 : 射亭里
  • 嶺斤面 : 一牌里
  • 西石積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五牌里, 杏洞里, 車馬洞里
  • 廣石面 : 加羅非里, 長性里, 後庭里, 文城里, 廣綾里, 廣石里, 所加里, 加自洞里, 牛谷里, 三古介里, 黑石里, 槐音里
  • 白石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 長興面 : 一牌里, 二牌里
  • 神穴面 : 二牌里, 木甘里, 三牌里, 四牌里, 黔巖里, 舊把撥里
  • 東柴北谷面 : 一牌里
  • 內洞面 : 笠巖里
  • 別非谷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 接洞面 : 本接洞里, 全洞里, 峯峴里, 內同里, 祭斤里, 縣倉里, 凡材里, 官洞里, 中洞里
  • 乾川面 : 一牌成陵里, 二牌白橫里, 三牌於南里
  • 上道面 : 一牌里, 二牌寒沙里, 三牌里, 四牌里
  • 下道面 : 一牌孟洞里, 二牌里, 三牌里
  • 凡孔面 : -牌里, 二牌草代里
  • 榛伐面 : 馬山里
  • 南芚夜面 : 一牌里, 二牌里, 三牌里
  • 眞官面 : 一牌月陰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 金村面 : 一牌鼎谷里, 二牌鳳頭里, 三牌馬山里, 四牌平丘里
  • 禿音面 : 一牌金門里, 二牌水邊里, 三牌里
  • 龜旨面 : 一牌里倉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 古楊州面 : 一牌廣津里, 二牌雌馬場里, 三牌新川里, 四牌蠶室里
  • 忘憂面 : 陵洞里, 二牌里, 三牌里, 四牌里
  • 蘆原面 : 上里, 中里, 下里, 四里
  • 海等村面 : 靈國里, 樓院里, 巖面里, 所羅里, 牛耳里, 馬山里, 覺心里

물론 이 지명과 현재의 양주와 구리시 영역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구리시의 영역은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각 면리의 책임자들인 면임과 리임들은 촌락의 대표자들로서, 국가의 부세 · 역역 · 조세 등을 관리하거나 촌락의 각종 업무를 대행하기도 하고, 촌락의 모든 행사들을 수행하는 임무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양주목의 각 면리에 소속된 인구의 수는 시기에 따라 매우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에서는 대체적으로 호적 조사를 3년마다 1번씩 시행했는데, 이때 각 군현과 면리에 거주하는 인원도 파악하였다. 다만 당시는 모든 인구를 파악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국가의 조세부담자들인 ‘남정(男丁)’이 그 대상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15세기 당시 양주의 호수는 1,481호(戶), 남정은 2,726구(口)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다가 영조 대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양주 관할 하에는 34읍면에 11,254호에 53,497구(남 23,775 , 여 29,722)로 조사되어, 15세기에 비하여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 『여지도서』보다 약간 늦게 만들어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34면 140리에 총 12,465호, 60,515구(남 30,300 ; 여 30,215)로 약간의 증가현상이 나타난다.

2.임진왜란과 구리지역 구리시역사 > 조선시대

1592년 4월, 조선을 침범한 일본군은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갔으며, 조선 각지에서는 관군을 대신한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의 후방을 교란하거나 향리를 침범한 왜적들을 몰아내면서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경기도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적과 대치하였는데,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에서는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부원수 신각(申恪), 안성의 홍계남(洪季男), 강화의 우성전(禹性傳) 등이 의병으로서 큰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시 지역에서는 건원릉이 있는 검암산(儉巖山)을 근거지로 고언백(高彦伯)이 큰 활약을 보여 주었다.

“교동의 향리인 고언백은 일찍이 왜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도원수를 따라 영장이 되어 적들의 목을 벤 공을 세우고, 자청하여 양주로 돌아가 병사들을 모아 적들을 공격하였으니, 선조가 양주목사로 제수하여 능침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은 산의 정상 험한 곳에 자리를 잡고 때때로 적들을 초격하였는데, 일찍이 능침에 복병을 두어 적들을 사살하였다.”

당시 고언백이 따랐던 도원수는 김원명으로 한강의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고언백이 김원명의 휘하가 되어 활약하다가, 양주의 해유령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양주로 돌아가 왜적을 막아내기를 자청하자, 선조는 고언백을 양주목사로 제수하고 주차방어사(駐箚防禦使)를 겸직토록 하였다. 고언백은 건원릉의 주산인 검암산 정상에 2개의 보루를 설치하여 왜적들을 유격전으로 격퇴하였으며, 나중에는 한양수복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왜적들은 각 지방 의병들의 활동과 이순신장군의 수전 승리 등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토요토미(豊臣秀吉)의 사망과 함께 7년간의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경제를 황폐화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 결국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3.구한말의 토지 개혁과 구리 지역 구리시역사 > 조선시대

구리시가 속한 양주일대는 고려시대부터 길지(吉地)로 소문이 나 천도설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양주가 길지라는 관념은 조선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천도설 대신 구리시를 중심으로 조선 왕조의 능침지(陵寢地)로 널리 활용되었다.
구리시에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까지 모두 9릉 17위가 모셔지게 된다. 구리시에 능침들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즉 조선의 농민들은 각종 조세의 직접 부담자였는데, 이 지역에 능침이 들어서면서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되면서 각종 역의 부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주의 면세지는 총 761결(結) 49부(負)로, 경기도의 면세지 871결 76부의 87%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면세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양주 자체의 전답의 경우도 실결수의 70%가 면세전답이었다.
면세지의 광점(廣占)에 따른 양주지역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경기도고양지역과 함께 양주의 비면세지에 대해서는 전세를 감하는 조치를 내려 양주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타 지역과 비교한 양주 주민들의 부역 부담은 상대적으로 과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한말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이른바 ‘甲午陞總’이라 부르는 면세지 철폐조치를 단행하였다. 즉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는 「宮土, 驛土, 屯土의 出稅에 관한 件」이 발표되어, 궁장토 등의 수입은 계속 각 궁의 소관이지만, 지세는 조세금납화 조치에 의거하여 거두고, 역둔토의 경우는 은결(隱結)과 결세가 헐한 토지 등을 조사하여 역시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토록 하였다. 또한 모든 세금은 탁지부에서 일괄 거두도록 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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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방행정제도의 개편 구리시역사 > 일제시대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발표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시에 헌병경찰정치를 자행하여 조선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개편하기 위한 폭압정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일본은 군현제로 편성되었던 조선의 지방행정체제를 소규모의 면중심으로 개편하고 면 단위까지 경찰서와 행정관서를 설치하여 총독이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지배기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1910년 9월 30일의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라는 칙령 357호를 필두로 군수의 임용, 도의 명칭과 관할 구역, 부, 군의 명칭과 관할구역, 도 사무 분장규정, 면에 관한 규정 등을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 지방행정구역을 일본인 중심으로 개편하였으며, 가장 중심적인 조치로 1910년 10월 1일 「面에 관한 규정」을 반포하여 각 면을 통치기구의 최말단 단위로 확고하게 위상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구리 지역도 행정구역상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구리 지역은 일제 식민지 초기까지만 해도 경성부의 두모면과 경기도 양주군의 구지면, 망우리면, 고양주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개편으로 양주군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통합되고, 여기에 양주군의 진관면, 별비면, 미음면, 노원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어 구리면이 되었다. 또한 동리(洞里)도 통폐합되어 중하리 · 상봉리 · 신내리 · 망우리 · 인창리 · 사노리 · 교문리 · 수택리 · 토평리 · 아천리 · 갈매리 등의 12개 리로 편성되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1914년 5월 「지방금융조합령」을 공포하여 금융조합을 각 지방까지 급속히 보급하여, 조선을 식민지 금융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구리 지역에도 고리대적인 착취를 담당하는 금융조합이 양주군 내의 양주 · 금곡 · 동두천 등지에 들어서게 되어 농민들을 수탈하게 되었다.

2.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구리지역 구리시역사 > 일제시대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식민통치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토지소유권 조사를 통하여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조사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사업과, 토지가격조사를 통하여 전국의 지가(地價)를 조사하고 지세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또 지형지모조사(地形地貌調査)로 전국의 지형도를 만드는 작업을 세부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의 경제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의 생산수단을 완벽하게 파악 · 장악하려는 시도였으며, 이 사업은 향후 조선의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토지조사사업은 구리 지역에도 예외 없이 진행되었다. 구리 지역의 토지조사사업은 준비조사, 일필지조사, 분쟁지조사 등으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1)준비조사

준비조사는 면, 동, 리의 명칭 및 경계를 조사하고, 토지신고서를 거두어들이면서, 동시에지방의 경제와 관습을 조사하는 사업이다. 1910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16년 5월까지 시행되었는데, 구리가 속한 양주지역에서는 1913년 8월부터 준비조사가 시작되었다. 양주를 관할한 것은 제5준비조사반으로 책임자는 나카무라(中村三輔)였다. 이와는 별도로 9월부터는 제29준비조사반도 양주에 대한 준비조사를 담당하게 되어 결국 양주지역에서는 2개 반이 준비조사를 진행한 셈이었다. 준비조사위원의 구성은 조선인 2명과 일본인 2명으로 구성되었다. 준비조사의 핵심은 새로 조사된 동리간의 경계를 기준으로 토지신고서를 배포 · 수집하는 것으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기초자료가 되는 사업이었다. 일반적으로 1개 군에 배당된 준비조사의 기간이 9~10개월이었는데, 양주는 비교적 규모가 큰 군이었기 때문에 토지신고기간이 1913년 8월 1일부터 1914년 7월 31일까지 1년간이었으며, 신고서 수집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1914년 1월에 전체 157개 동리 중 135개 동리에서 신고서 수집이 완료가 되었다. 구리면의 토지신고서 접수도 동일한 기간에 거의 이루어졌다. 그런데 신고의 대상이 된 토지 중 국유임야에 대한 신고는 신고기일을 넘기고 말았다. 조선의 관행상 동네의 야산은 누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었으며, 이에 아무도 주인 없는 야산 등을 신고하지 못하였다. 신고가 끝난 후 이 토지들은 모두 국가소유통지를 하였고, 그것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정리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2)일필지조사 및 査正

일필지조사는 지주조사, 경계조사, 지목조사, 지번조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지주조사는 신고주의에 의거하여 2인 이상의 신고가 있거나 소유권에 의심이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고자를 소유자로 인정하였다. 경계조사는 실지조사를 통하여 인접토지와의 관계를 확정하는 것이며, 지목조사는 토지를 18종으로 구분하여 조사 당시의 현황에 따라 지목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번조사는 한 필지마다 순서대로 지번을 부여하는 사업이다. 실지로 조사를 할 때는 지주 또는 관리인, 이해 당사자 또는 그 대리인과 지주 총대들의 입회 아래 일필지의경계에 표목을 세우고, 가지번(假地番)을 부여하였다.
일필지조사 때에 조사한 내용은 실지조사부에 기재되었고, 실지조사부는 사정 공시에 사용될 토지조사부 작성을 위한 자료가 되었다. 실지조사는 개황도에 의거하여 토지신고서를 참조하여 동리별로 가지번 순서에 따라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실질조사부에는 지번, 가지번, 지목, 사용세목, 신고 또는 통지일, 면적, 구분, 주소, 성명 등이 기재되도록 하였다. 일필지조사는 1910년 6월부터 1916년 11월까지 완료되어, 조사된 필지는 총 19,101,989필지였다.
구리 지역의 일필지조사는 외업 제1반에서 담당하였다. 반장은 송전갑(松田甲)이었으며 감사원과 측량기사들로 구성되었다. 제1반의 조사 구역은 고양의 한지, 뚝도면과 양주의 구리 · 미금 · 와부 · 화도 · 진건 · 진접 · 별내면을 담당구역으로 하였다.

3)분쟁지조사

분쟁지조사는 1910년 9월에 착수하여 1918년 1월에 종료하였다. 분쟁지의 총 건수는33,937건에 99,445필지였다. 이중 구리시의 분쟁지는 총 5건에 12필지였으며, 분쟁지 중에는 국가의 명의로 된 8필지가 대부분이었으며, 동양척식회사의 명의 3필지, 조선인 명의 1필지로 되어 있다. 이때의 분쟁은 분쟁의 한쪽 당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구리의 경우 대부분은 국가와 동양척식회사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시토지조사사업국에서는 토지의 사정에 불만이 있는 경우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토지조사위원회는 사정에 대한 불복 및 재심의 신청에 대해 재결을 내리는 기관으로 토지소유권의 확정에 관한 최고 심사기관이라 할 수 있다.1928년 8월까지 접수된 불복신청 수는 모두 20,147건으로, 이중 9,315건이 취하되었고,1,444건은 반부되어 실제 재결을 구한 것은 9,388건이었다. 구리 지역의 불복신청은 경계분쟁으로 신청한 수택리, 사노리의 경우와, 소유권 분쟁으로 신청한 갈매리(2건), 아천리, 인창리(2건) 등이 있었다. 분쟁을 제기한 것은 동양척식회사가 대부분으로 나타났으나, 자료의미비로 불복신청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이 현 실정이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지적도를 통하여 확인해 보면 경계분쟁이 발생한 수택리의 경우는 경계를 수정한 흔적이 없고, 사노리의 경우는 지적도를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복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라 하겠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 구리 지역의 토지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목에 따른 현황을 보면 구리 지역의 지목은 전, 답, 대지, 임야, 분묘지, 잡종지, 지소(池沼)로 구분되어 모두 4,652필지에 총 4,249,805평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논이 전체의 39.2%를 차지하고 있어서 경기도 내에서는 비교적 논의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하는 지역의 하나로 밝혀졌으나 답작(畓作)지역으로 분류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국유지는 107필지에 124,447평으로 조사되었고, 동양척식회사 명의의 토지는 모두 446필지에 928,630평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는 모두 전답과 대지에 국한하고 있으며 논의 비율이 59.2%를 차지하여 전체 구리 지역의 논답비율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동양척식회사의 소유 토지가 논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인 토지 소유자는 7명으로, 소유 토지는 83,346평으로 집계되었다.
구리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국가와 동양척식회사, 면리소유토지를 제외하면 모두 977명이었고, 그중 260명이 0.2정보 미만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작농의 하한으로 지적되는 1정보 이하 소유자가 전체의 1/4를 초과하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구리 지역에서는 전체 1할 미만의 농민이 전체 경지의 절반 정도를 경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토지의1/4정도가 부재지주의 소유였다.

3.구리지역의 3.1 운동 구리시역사 > 일제시대

일제의 헌병경찰정치에 대한 불만은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3 · 1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구리 지역도 예외일 수가 없었고, 이에 3월 28일, 당시 구리면 아천리에 거주하는 면서기 이강덕(李康德, 당시 28세)이 농부인 심점봉(沈點奉, 당시 27세) 등과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만세시위는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고, 시위 지역도 토평리, 교문리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주동자인 이강덕과 심점봉은 각각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만세시위에 참가한 양주지역 주민 증 117명이 경찰에 검거되어 상당히 치열한 시위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대표와의 연결이 없고, 특별한 비밀결사조직체도 없었던 상황에서도 군민들의 대다수가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기할 만한 점이다.
3 · 1운동의 결과, 일제는 헌병경찰정치를 청산하고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3 · 1운동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발생한 반제국주의운동이었고, 중국과 인도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3 · 1운동을 계기로 민주공화제 이념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결국 공화제 형태에 의한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3 · 1운동 이후에도 구리 지역의 사회운동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수많은 청년단체들이 결성되었고, 1923년을 기점으로 다수의 청년단체들이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성격이 전환되었고, 결국 1924년 조선청년동맹으로 결성되었다. 이들 청년단체들은 청년들의 조직화와 계급의식 고취 등을 목표로 하였고, 구성원들은 각 지방의 노동운동 단체, 농민운동 단체 등에 참여하여 이들을 지도하였다.
구리를 포함하는 양주지역에서도 청년단체와 사회단체의 조직 활동이 활발하였다. 1922년 2월 1일에는 종교단체로 <양주천도교청년회>가 결성되어 강연회 · 체육행사 · 야학운동 등 계몽운동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으며, 1922년 봄에는 <양주청년회>가 조직되었다. 다시 1924년 10월에는 <회천청년수양회>가 설립되어 빈한한 가정의 자제와 보통지식을 배우지 못한 일반 아동, 노동자를 위하여 3개소에 야학을 설치하는 농촌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5년 2월에 <창동소년회>에서 <신흥의숙>을 만들기도 하였다. 어느 청년단체든 그 활동 내용은 야학의 개설, 강연회 개최, 산업장려 등으로, 다른 지역의 청년단체들의 활동과도 일치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피?청년단체들의 활발한 계몽운동과 함께, 양주군내에는 보통학교 5개소, 간이실업학교1개소, 사립학교 2개소와 서당 158개소 등의 교육시설이 있어서, 청년단체의 야학 강연회 산업장려 등과 병행하여 순수 교육활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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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구리시 구리시역사 > 현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다. 해방된 한국은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국토가 양분되었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 은 민족의 분열에 의해 지지부진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세력들은 민족세력의 결집을 위한 구심점이 없었고, 통일전선 수립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환경 등으로 민족문제의 자주적인 해결이 어렵게만 되었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일시적인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각 지역에서는 항일인사와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치안유지회나 건국준비위원회 등을 설립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1945년 10월 말까지 전국 13개 도와 21개 시, 215개 군에서는 일종의 지방자치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구리시가 속했던 양주에서도 양주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성호(李星昊), 이경규(李景圭), 이덕창(李德昌)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특히 이성호는 1945년 11월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서 경기도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목적을 지닌 정당과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사회주의자 세력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11일,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당 조직의 확장과 노동자, 농민조직의 건설에 노력하여, 지방 인민위원회와 대중조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구리 지역에서도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었다. 당시 양주의 회천면을 중심으로 이규찬(李圭燦), 민명운(閔明運), 남완희(南浣熙), 노화균(盧華均) 등이 군당(郡黨)을 결성하고, 구리면 상봉리 등지에서 세포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당시 양주군의 군당위원장은 이규찬이었다. 1945년 19월,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소련, 영국 등 3국의 외상들이 모여 한반도문제를 논의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삼상회의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 사실은 곧 서방측 통신에 의해 12월 27일 남한의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르자, 남한의 대중들은 민족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을 가릴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12월 31일, 서울에서는 서울시민 반탁시위대회가 개최되어 거국적인 반탁운동의 시작을 알렸으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평양을 다녀 온 이후, 공산진영은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으로 노선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공산진영과의 갈등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시행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의 덕수궁에서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위한 준비를 시작한다는 것을 알렸고, 이 회의에 미국과 소련의 대표가 협의하여 특별히 초대한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될 정당 단체의 문제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1946년 5월 6일 이후 무기한의 휴회에 들어갔다. 이 이후 남한의 정치세력간의 대립, 분열은 극도로 첨예화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 등의 좌우합작이 추진되는 가운데, 이승만에 의한 <남한 단정수립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6월 3일, 이른바 정읍발언을 통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남북 분단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이후, 미군정은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공산당은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통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시킨다는 신전술을 채택하였고, 동시에 인민당, 남조선 신민당과 합작하여 1946년 11월 3일, <남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미 조선공산당은 9월총파업을 주도하여, 미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들을 가세시켜 파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 협의하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하였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의 의지에 따라 한국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고, 유엔에서는 11월 5일의 유엔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1월 23일, 북한이 유엔임시위원단의 방북을 거절하자, 미국은 곧 남한만의 단독 선거안을 유엔에 제출하였고,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통과되었다.

남로당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하여 반대 움직임을 치열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2월 7일에 남로당의 주도하에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전국적인 파업과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였고, 4월 3일 제주도의 단독선거반대에 대해 제주도의 극우청년단체들에 의한 4·3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구리 지역에서도 남로당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남로당의 양주군당위원장은 구리면 상봉리에 거주하는 이희원(李喜源)이었다. 그는 1946년 3월, 공산당 양주군 구리면 책임자인 최창렬(崔昌烈)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외에도 구리면에 거주하는 이정근(李廷根), 이강운(李康運), 우기용(禹基用), 변용구(卞容九) 등이 남한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1948년 5월 10일에 시작되어 임기 2년의 제헌국회가 결성되었고,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이 공식 출법하였고, 미군정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성립되자 북한에서도 독자적인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1948년 8월 25일, 북한의 각 시군에서는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결과 572명의 대위원으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농지개혁과 구리시 구리시역사 > 현대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안을 공포하고, 이어 1950년 3월 대통령령296호로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농지개혁법안의 대상이 된 토지는 농경지에 한정하고, 산림, 임야와 같은 비농경지는 제외하였다. 소작지와 3정보 이상의 소유지를 유상몰수하여 소작인 또는 영세농, 농업노동자, 귀환농민들에게 유상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토지 대금은 연 평균 소출액의 1.5배를 5년간 평균 분할 상환하되, 상한 완료 전에는 소유권의 이전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농민의 입장을 배제한 지주층 중심의 개혁으로, 해방 당시 144만 정보였던 소작지가 5년 동안 처분되어, 농지개혁 당시에는 55만 정보만 남아있을 정도였으며, 농민의 상환곡과 소득세의 부담이 수확의 39%에 이르러 농민들은 분배된 농지를 전매하는 등, 자작농 육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농지개혁에서 행정기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농지위원회였다. 1950년 3월, 농지위원회 규정에 따라 농지위원회가 중앙과 각급 행정단위, 동, 리 단위에 까지 설치되었다. 위원회는 동, 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관청과 민간인으로 혼성하여 구성하였으며, 등, 리 위원회는 전부 민간인으로 구성하였다. 구리면에서도 농지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위원장에 정준섭(鄭俊燮), 위원에 안순봉(安順奉), 현천업(玄千業), 이명덕(李命德), 신환식(申煥湜), 김용배(金容培) 등이 선출되었다. 이들에 의해 농지를 분배받은 농가의 수는 살펴보면, 우선 귀속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구리면 전체에서 439호였으며, 매수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629호였다. 분배받은 농가 1호당 평균 매수농지는 1,295평이었으며, 귀속농지는 1,997평에 이르렀다.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과 매수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겹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귀속농지의 소작농들이 상대적으로 소작지의 면적이 높았던 셈이다. 그런데 분배가 결정된 농지의 전부가 분배된 것은 아니었다. 분배 포기를 희망하는 농가들이 생겨났는데, 그 이유는 상환액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기한 농지는 다시 분배를 희망하는 농민들에게 재분배되었다.

구리면의 경우에도 분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구리면 아천리의 경우 분배를 포기한 필지가 105필지에 75,780평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밭은 59필지에 41,680평, 논이 46필지에 34,100평으로 아천리 전체 분배면적인 170,483평의 44.5%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처음 농지의 분배가 이루어진 후 구리면 지역의 분배농지 경작농가의 수를 살펴보면, 귀속농지 경작농가가 전 135호, 답 105호, 전답 199호였으며, 매수농지 경작농가는 전 163호, 답142호, 전답 324호였다. 그런데 분배 과정에서 본래 분배 예정지였다가 홍수 등으로 토지가 황폐화되어 분배가 취소된 토지, 농지개혁 당시에는 분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토지가 그 이후 개간되어 다시 농지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분배가 결정된 토지 등으로 최초의 분배당시와 그 이후 분배의 양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구리면의 경우 1958년 농지분배 면적을 살펴보면 매수농지의 경우 전 1,512단보, 담1,257단보, 계 2,769단보였으며, 귀속농지의 경우 전 2,956단보, 답 2,791단보, 계 5,747 단보로 최종 결정되어 농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시행된 가장 큰 사업 중의 하나였던 농지개혁법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작농의 배출이라는 처음의 목표와는 달리, 농지개혁 이후 전국적으로 영세소작농층이 비대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지주들의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정부의 목표도 전면적인 실패로 귀결되었다. 소작료 수입에 근거하여 안주하던 지주층들이 기업의 경영에 적응하기를 기대한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주에 대한 보상이 지가증권에 기재된 수량만큼을 그 해의 법정곡가로 환산,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고, 1955년 이후의 보상분이 그 해의 곡가가 아니라 1950~1954년 사이의 평균 곡가를 적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인플레가 진행되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지가증권의 보상이 터무니없는 낮은 수준이어서 결국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다는 이상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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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크게 행정동과 법정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리시 관내의 행정동(갈매,동구,인창,교문1.2, 수택1.2.3)과 법정동(갈매,인창,교문,수택,사노,아천,토평동)은 각각 8개 7개이다. 여기에는 행정동만의 지명, 법정동만의 이름, 그리고 행정동과 법정동의 명칭이 같은 세가지 경우가 있다.

1. 행정동 구리시역사 > 동연혁
1)갈매동(葛梅洞)

본래 양주군 노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노원면의 담터 전부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갈매리라는 명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해방된 직후인 1945년 11월 2일 법령 제21호에 의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지방관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1973.3.12 공포)에 의해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갈매리라는 명칭 그대로 구리읍에 소속되었다. 1979년 4월 30일 군조례 제629호(1979.4.30 공포)로 갈매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면 4월 1일 법률 제3169호(1979.12.28. 공포)로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 구리읍 갈매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의하여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갈매동이 되었다.

2)동구동(東九洞)

1986년 1월 1일 구리시 승격과 함께 사노리와 인창리 일부를 합쳐 동구동이 생겼다.

3)인창동(仁倉洞)

본래 양주군 구리지면의 지역으로 1914년 구지면의 동창리와 인장리의 각 일부가 합쳐져 인창리라는 면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인창리는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구리읍에 소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어 인창동이 되었다.

4)교문1.2(橋門1.2洞)

본래 양주군 구지면의 지역으로 1914년 이문동과 백교리 전부, 인장리 일부가 합쳐져 교문리라는 명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읍에 소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 구리읍 교문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교문동이 되었다. 1995년 3월 13일 군조례 제510호에 의해 교문1동과 교문2동으로 분리되었다.

5)수택1.2.3동(水澤1.2.3洞)

본래 양주군 구지면의 지역으로 1914년 수택리,인장리,평촌리 각 일부, 미음면 수변리 일부가 합쳐져 수택리라는 명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수택리라는 명칭 그대로 구리읍에 소속되었다. 1979년 4월 30일 수택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 구리읍 수택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수택동이 되었고, 1996년 1월 8일자로 수택1동으로 동명이 변경되었다.
1986년 1월 1일 시 승격에 따라 토평동 전부와 수택동, 교문동 일부 지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수평동은 1996년 1월 8일자로 수택2.3동으로 분동되면서 동 명칭이 없어졌다.

2. 법정동 구리시역사 > 동연혁

7개의 법정동 가운데 갈매,인창,교문,수택동은 앞에 서술한 행정동에서 그 연혁을 살펴보았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나머지 사노,아천,토평동의 연혁을 알아보겠다.

1)사노동(四老洞)

본래 양주군 구지면의 지역으로 1914년 구지면 사노리, 동창리 각 일부, 진관면 배양동 일부, 별비면 퇴계원리 일부가 합쳐져 사노리라는 명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구리읍에 소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 구리읍 사노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사노동이 되었다.

2)아천동(峨川洞)

본래 양주군 구지면의 지역으로 1914년 아차동과 우미천리 전부, 토막리 일부가 합쳐져 아천리라는 명칭으로 구리면에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구리읍에 소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 구리읍 아천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아천동이 되었다. 행정동으로는 교문동에 속한다.

3)토평동(土坪洞)

본래 양주군 구지면의 지역인데 1914년 구지면 평촌리, 토막리, 수택리 각 일부와 미음면 수변리, 석도리 각 일부가 합쳐져 토평리라는 명칭으로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자 구리읍에 소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로 편제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자 토평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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