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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야기

조선의 왕과 비, 동구릉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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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urimh
  • 조회 644
  • 입력 2021-11-0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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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위의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최대 규모의 조선 왕릉군이 된 구리 동구릉 이해하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은 조선 왕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시대의 자연관과 유교적 세계관, 통치 철학과 무덤 조성 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구리 동구릉(東九陵)은 500여 년에 걸쳐 아홉 왕릉이 조성된 최대 규모의 조선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이란 뜻으로, 조선 초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래,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개의 왕릉이 조성되었다. 왕릉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 또는 동칠릉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된 것을 마지막으로 동구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고양 서오릉이나 고양 서삼릉과 같이 조선의 왕릉이 모여 있는 왕릉군들이 있으나, 구리 동구릉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구리 지역의 뛰어난 자연환경은 구리 동구릉이 조성될 수 있었던 풍수지리적 조건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포함한 총 17인의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구리 동구릉은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일종의 성지(聖地)와 같은 중요한 위상을 가진 곳이다.

[동구릉이 완성되기까지]

구리 동구릉은 구리시 북서쪽에 있는 검암산[구릉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동쪽 자락에 펼쳐져 있다. 동구릉 구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북쪽의 건원릉을 기준으로 동쪽에 목릉(穆陵)·현릉(顯陵)·수릉이 있고 서쪽에 휘릉(徽陵)·원릉(元陵)·경릉(景陵)·숭릉(崇陵)·혜릉(惠陵)이 배치되어 있다. 아홉 왕릉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조 건원릉

1408년(태종 8) 태조가 사망하자 태조를 위한 왕릉을 조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생전에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총애하여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당시 덕수궁 뒤편 현재 정동 지역에 있었던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 본인의 능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 태종(太宗)은 영의정 하륜(河崙) 등에게 명하여 다양한 후보지를 둘러보도록 한 끝에, 최종적으로 능의 위치를 양주 검암산[구릉산]으로 확정하였다. 신덕왕후의 정릉은 도성 밖으로 옮겨져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풍수지리상으로 최고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건원릉은 산세가 좋기로 소문난 구리 동구릉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당시 조선을 방문하였던 명의 사신은 건원릉 지역을 둘러보고, 하늘이 만든 자연적인 땅 중에는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으니 이곳은 반드시 인공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건원릉의 뛰어난 입지 조건을 잘 보여 주는 일화이다. 이처럼 구리 검암산[구릉산]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으므로, 이후 여러 왕릉이 태조 건원릉 주위에 조성되었다.

2. 문종·현덕왕후 현릉

태조 건원릉 다음으로 1452년에 제5대 국왕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이 조성되었다. 1513년(중종 8) 문종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이 이곳으로 옮겨와 현재 현릉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현덕왕후의 능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현덕왕후는 문종보다 11년이나 앞서 세상을 떠났고, 당시 안산에 장사지내어 소릉(昭陵)이라 칭하였다. 현덕왕후는 문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으니, 바로 조선의 제6대 국왕 단종이다. 그러나 단종은 숙부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세조 대에 단종 복위 모의 사건에 현덕 왕후의 가족이 휘말리게 된다. 이 여파로 인해 1457년(세조 3) 죽은 현덕왕후의 지위도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소릉 또한 왕비의 능에서 서인의 무덤으로 격하되었고 위치 또한 바닷가로 옮겨졌다. 1513년 현덕왕후가 복권되고 나서야 왕후의 능으로 격상될 수 있었고, 이때 문종의 능 옆으로 천릉하여 함께 현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3.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 목릉

목릉(穆陵)은 태조 건원릉의 동쪽 능선에 위치해 있다. 목릉은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조성되었다. 가장 처음에 조성된 것은 선조(宣祖)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으로, 1600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현재 위치에 능을 조성하고 유릉(裕陵)이라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건원릉 서편 지금의 경릉(景陵)이 있는 자리에 선조의 능을 조성하고 목릉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1630년(인조 8) 목릉이 수기(水氣)가 차서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자 의인왕후의 유릉 옆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두 능을 함께 목릉이라 하였다. 그런데 막상 천릉을 위해 능을 파보니 수기가 없었으므로, 나중에 그 위치에 경릉이 들어서게 된다. 1632년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의인왕후의 능 옆에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4. 현종·명성왕후 숭릉 숭릉(崇陵)은 구리 동구릉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1674년 8월 제18대 국왕 현종(顯宗)이 사망하면서 조성되었다. 산릉을 조성하는 공역 중에 승려의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드러나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고 또 위치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대로 조성 작업을 진행하였다. 1683년(숙종 9) 12월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사망하자 현종의 능 왼쪽에 명성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5. 장렬왕후 휘릉 휘릉(徽陵)은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가 묻혀 있는 곳이다. 1688년 장렬왕후가 사망한 후 조성되었다. 인조와 인조의 원비(元妃) 인열왕후(仁烈王后)는 경기도 파주시에 소재한 장릉(長陵)에 묻혀 있다.

6. 단의왕후 혜릉 혜릉(惠陵)은 제20대 국왕 경종(景宗)의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숙종 44)에 세상을 떠나 단의빈(端懿嬪)이라 하였다.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죽은 그녀에게도 왕후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단의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혜릉은 조성 초기 세자빈 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종이 즉위하여 단의빈이 단의왕후로 추존되자, 묘 또한 능으로 승격되었고 능호를 혜릉이라 하였으며, 1722년 왕후의 능 형식을 갖출 수 있도록 석물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경종과 그의 계비(繼妃) 선의 왕후(宣懿王后)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의릉(懿陵)에 모셔져 있다.

7. 영조·정순왕후 원릉 원릉(元陵)은 구리 동구릉 서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영조(英祖)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이다. 영조의 원비 정성 왕후(貞聖王后)는 고양 서오릉 내 홍릉(弘陵)에 묻혀 있다. 원릉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완성되었다. 원릉은 본래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이 있던 자리에 조성되었다. 1673년(현종 14) 효종의 영릉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능을 여주에 있는 세종(世宗)의 영릉(英陵) 옆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 자리는 비어 있었던 것이다. 천릉 작업을 위해 봉분을 열었을 때 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영조의 원릉이 이곳에 자리 잡게 것이다. 영조는 정성 왕후를 위해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도 이곳에 마련해 두었으나, 1776년 영조가 사망하자 정조(正祖)가 현재 원릉 자리에 모셨다. 1805년 정순 왕후가 승하한 후, 쌍릉 방식으로 영조의 옆에 묻히게 되어 현재 원릉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8. 익종·신정왕후 수릉

수릉(綏陵)은 추존왕 익종(翼宗)과 익종의 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능으로, 두 번의 천릉을 거쳐 현재 위치인 구리시 동구릉 구역의 동남부에 자리 잡았다. 1830년(순조 30) 익종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세자의 신분이었으나, 나중에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 또한 왕으로 추존된 것이었다. 따라서 익종의 능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왕이 아닌 세자의 묘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며, 연경묘(延慶墓)라 하였다. 위치 또한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경종(景宗)의 의릉(懿陵) 왼편이었다. 이후 익종이 국왕으로 추존되자 연경묘 또한 왕릉으로 승격되어 수릉이라 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헌종 12) 수릉이 위치한 곳이 풍수상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양주 용마봉[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용마산]으로 천릉하였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풍수 문제가 제기되어 동구릉 경내의 현재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왕후가 사망하자 수릉에 합장릉(合葬陵)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9. 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경릉 경릉은 조선의 제24대 국왕 헌종(憲宗)과 헌종의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그리고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가 묻혀 있는 곳이다. 경릉이 위치한 곳은 본래 목릉이 있던 자리로, 물이 차서 좋지 않다고 하여 1630년(인조 8) 목릉을 동구릉 경내 다른 위치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막상 천릉 작업을 위해 땅을 파보니 물기가 없었으므로, 1843년 효현왕후가 사망한 후 이곳에 능을 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1849년 헌종의 능과 1904년 효정왕후의 능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조선 왕실의 장례와 구리 동구릉]

조선 시대 국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국장도감(國葬都監)‧빈전혼전도감(殯殿魂殿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 등 이른바 삼도감(三都監)이 만들어져 국장 의식을 담당하였다. 이 중 왕릉을 조성하는 공역을 맡은 것은 산릉도감이었다.

조선 왕릉은 『주례(周禮)』의 기본 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풍수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하여 위치가 결정되었다. 우선 국왕이 참배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했고 또한 관리가 수월해야 했기 때문에 궁궐 반경 10리[약 4㎞] 밖에서 100리[약 40㎞] 안에 만들어졌다. 현재 조선 왕릉은 대부분 이 입지 조건에 부합하나 예외의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단종의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들과 달리 강원도 영월의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청령포에 귀양 간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본래 단종의 시신은 영월에 버려졌으나,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몰래 매장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임금으로 복위되고 나서야, 비로소 왕릉의 대접을 받아 장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잠드는 곳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풍수지리적 조건 또한 고려되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어, 좌청룡과 우백호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바깥으로도 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어야 했다. 또한 산세의 배치상 능역에 들어가는 입구가 좁은 형태여야만 했다. 국상(國喪)이 있게 되면, 몇몇 후보지에 담당 관료와 지관(地官)이 파견되어 풍수지리적 여건을 세세하게 따져 왕릉을 조성할 입지를 선택하였다. 무려 아홉 개의 왕릉이 조성된 구리 동구릉의 경우에는 도성 근처에서는 최대의 명당 지역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 왕릉을 조성한 경우에도 풍수지리적 여건이 좋지 않다고 판단되면 왕릉을 새로 만들어 옮기기도 하였다. 구리 동구릉 내에서는 선조의 목릉이나 익종의 수릉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선조 목릉은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건원릉 서편 지금의 경릉 자리에 조성되었으나, 1630년(인조 8)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익종의 수릉은 무려 두 번이나 천릉한 끝에 현재 동구릉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집필자] 이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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